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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62화 (62/205)

62화. < 건국 (3) >

쥬리.

예전 같았으면 누구인가 싶었겠으나, 지금은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다.

그녀는 소미가 소속된 걸그룹 투시즌의 멤버였다.

포지션은 메인보컬.

투시즌을 역대 원탑 아이돌의 반열로 올려놓은 일등공신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없다면 그룹을 유지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라고 들었다.

“예, 제가 박봉팔입니다.”

“풋.”

그녀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황급히 수습에 나섰다.

“죄송해요, 안 웃으려고 했는데 이미지랑 이름이랑 너무 매치가 안 되셔서..."

“이해합니다. 저도 아직 적응이 덜 된 이름이니까요.”

“말 놓으세요, 봉팔오빠. 저 올해 스물둘이에요.”

“아, 그럴까.”

“언니한테 오빠 얘기 진짜 많이 들었거든요. 어떤 분일까 엄청 궁금했는데 드디어 만나게 됐네요, 히히.”

쥬리가 푼수같이 히죽거렸다.

그녀는 무척 독특한 사람이었다.

소미는 나를 만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아이돌이라는 가면을 내려놓았었다.

그러나 쥬리에게는 가면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보여지는 이미지와 자아가 정확히 일치했다.

“이쪽은 테일리시, 내 호위역이야.”

“어머, 귀여우셔라! 진짜 인형 같으세요!”

쥬리가 두 손을 맞잡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안녕.”

테일리시는 무심한 목소리로 할 줄 아는 유일한 한국어를 말했다.

테일리시도 보여지는 이미지와 자아가 일치하긴 했다. 그 자아가 사교성이 너무 떨어져서 문제인 것이지.

“여기에 앉으시면 되어요.”

소미는 새로 들인 듯한 소파로 나를 안내했다.

“오늘은 못 보던 사람이 있죠?”

소미가 쥬리를 바라보며 애정이 듬뿍 담긴 미소를 지었다.

“쥬리는 제 사제이자, 아끼는 동생이에요. 나이는 저보다 어리지만 굉장히 의지가 되는 친구랍니다. 쥬리가 아니었다면 힘든 연습생 시기를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전혀 사실이 아니거든요. 언니는 저보다 똑똑하고 말도 잘하고...”

“춤도 못 추고 노래도 못 불렀으니까.”

“그렇지 않아요. 언니는 노력을 했잖아요. 저보다도 훨씬.”

“다 네가 응원해준 덕분이야.”

소미가 방긋 웃었다.

“아무튼 제가 아는 건 쥬리도 전부 알고 있으니까, 편하게 말씀해주시면 되어요.”

나는 우선 소미에게 박병철 장관과 나눈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주었다. 기재부의 견제 때문에 정착지가 위기에 빠졌으며, 소미의 사제들을 용병으로 투입해보고 싶다는.

반응은 쥬리로부터 먼저 나왔다.

“와, 정말 본격적이네요.”

영양가있는 반응은 아니었다.

“괜찮네요.”

소미가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백발로 염색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안 그래도 사제단을 어떻게 유지해야하나 고민하고 있었어요. 제가 원한다고 해서 오래 잡아둘 수 없는 분들이니까요. 정부에서 도움을 주신다면 제 부담이 훨씬 덜하겠어요.”

역시 그녀도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나야 맨땅에서 크록과 헤딩중이었으나, 그녀는 남의 집 귀한 아들딸들을 규합하고 있으니 압박의 차원이 다를 것이다.

종교단체로 인정받아 수익을 창출해낸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아직 그 단계에는 이르진 못한 듯했다.

나는 여기서부터는 에신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쥬리가 알아듣지 못하도록.

“그리고 한동안 네게 테일리시를 맡길까 해. 아무래도 네 사제단은 전투에 익숙하지 않을 텐데, 상대가 알레한드로처럼 무르기만 하다는 보장은 없을 테니까.”

“저는 좋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소미가 대답을 하기 전이었다. 테일리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테일리시.”

“날 떼어놓으려는 거지, 지금.”

“잠시일 뿐이야. 어디까지나.”

“날 떼어놓으려는 거잖아. 또 날 두고 멋대로 사라져버릴 거잖아!”

그녀가 두 주먹을 쥐며 소리쳤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있는지조차 모를 만큼 존재감이 옅을 정도로.

나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비를 맞듯 처량하게 떨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또다시 잃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 죽음이 그녀에게 큰 트라우마를 남겼음에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그 감정에 공감해줄 수가 없었다.

“테일리시.”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다음 말을 하려면 결단이 필요했다.

“난 네가 좋아했던 그 남자가 아니야.”

그녀의 동공이 충격으로 확장되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솔직히 말하마. 날 위한답시고 오데르의 힘을 버렸을 때 나는 무척 우려스러웠어. 네게는 잠깐이었을지 모르겠지만, 내겐 다시 태어난 뒤로 수십 년이란 시간이 흘렀으니까. 네 감정을 이해해주기에 나는 너무 먼 길을 왔어.”

“상관없어. 내가 괜찮다잖아.”

“내가 괜찮지 않아.”

내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렸다. 반대로 그녀는 차츰 위축되고 있었다.

“네가 날 에사인으로서 따르겠다면 그건 좋아.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날 따르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 노력할 테니. 그러나 네가 품은 감정이 애정이라면, 그 감정의 출발점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여야만 해. 내가 살아가는 건 현생이야, 현재야말로 지금의 나를 정의할 수 있어.”

"......."

그녀가 너무 울적해하기에,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현생의 나는 네가 좋아했던 라힐만큼 멋진 놈이 아닐지도 모르거든. 난 네가 여기서 더 많은 사람을 겪고 많은 걸 배웠으면 좋겠다. 나보다 잘난 남자들하고도 원 없이 만나보고. 그러고 나서도 내가 좋다면 그때는 나도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너보다 잘난 남자는 없을 거야.”

테일리시가 뾰족하게 말했다.

“그런 놈은 내가 죽여 버릴 테니까.”

진심이 느껴졌다.

아닌 게 아니라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섣불리 그녀에게 작업을 걸다간 다리 하나쯤은 부러질 각오를 해야 할 듯했다.

“어때, 남아주겠니?”

“...알았어.”

테일리시가 힘없이 대답했다.

“실은 나도 너에 대해서 더 알고 싶긴 해. 아까도 나만 못 웃었고.”

그녀는 쥬리가 박봉팔이란 이름을 듣고 웃었을 때 소외감을 느낀 듯했다.

그런 웃음은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되긴 하겠다만.

“잘 부탁드릴게요, 테일리시님.”

소미가 방긋 미소를 지으며 테일리시를 끌어당겼다. 테일리시는 끈 떨어진 마리오넷처럼 소미의 품 안으로 딸려 들어갔다.

뭔가 미진한 마무리였다.

나는 기운을 다한 테일리시를 위해 아이디어를 짜낼 필요성을 느꼈다.

그녀에게는 일부러 모진 말을 했으나, 전생이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진 않았다. 전생도 엄연히 나를 정의하는 일부였다. 그 일부에 테일리시의 이름이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소미, 테일리시를 연습생으로 받아주는 건 어떨까?”

여기서부터는 한국어였다. 에신어에는 연습생이란 단어가 존재치 않았으므로.

“연습생이요?”

소미와 쥬리가 입을 맞춘 듯 한목소리로 되물었다.

“보호자 없는 외국인 여자애가 사람들 틈바구니에 묻어가면서 언어나 문화를 배우기엔 아이돌 연습생만한 게 없을 것 같은데. 너희도 스케줄이 바쁘니 일일이 챙겨주기 어려울 테고.”

그녀들은 서로 한 차례 눈빛을 교환했다.

“저는 찬성이에요.”

소미가 대표로서 대답했다.

“저희 회사에도 외국인 연습생들이 많아요. 국적은 전혀 문제되지 않을 거예요. 제가 말씀을 잘 드린다면 대표님도 오케이하실 테고요. 음, 혹시 춤이나 노래에 특기가 있으실까요?”

“테일리시, 네 특기가 뭐더라?”

“특기......”

테일리시가 소미의 품에 안긴 채 멍하니 대답했다.

“......오데르의 창. 지금은 못 쓰지만.”

“그렇다는데.”

“특기가 없어도 괜찮아요. 테일리시님처럼 예쁜 분이 드물기도 하고, 신체능력이 월등하니 춤은 연습만 하면 금방 늘 거예요.”

“노래는? 노래를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을 텐데.”

“일단 목소리가 좋으세요. 목소리를 타고났으면 반은 끝난 거죠. 요새는 기교보다 음색을 더 쳐주거든요.”

“흐음......”

어째 약팔이 멘트 같았다. 전문가가 아닌지라 태클을 걸 순 없었으나.

“마침 내년에 저희 기획사에서 주관하는 오디션이 열려요. 거기에 합격하는 걸 목표로 훈련을 하면 되겠네요.”

“오디션?”

잊힌 기억이 되살아났다. 친구놈이 자기가 미는 아이돌 후보에게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해달라며 사정사정하던.

“네, 케이블 TV로도 방영되는 큰 프로젝트에요. 데뷔조에 들기만 해도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을 수 있죠.”

“지금은 한국어를 배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아. 굳이 아이돌이 될 필요까지는...”

“기왕에 연습생이 된다면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도전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테일리시가 아이돌이 되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냥 아이돌도 아니다. 말끝마다 죽여 버리겠다는 게 입버릇인, 전직 암살자 출신의 아이돌이다.

어쩌다가 접대 같은 걸 요구받는다면 피디 모가지가 문자 그대로 날아가고 마는, 사상 초유의 유혈극이 벌어지고 말지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종교의 힘이 나날이 약해지는 현대에서 팬덤의 힘을 거머쥐는 것보다 강한 권력은 없지 않을까하는.

팬덤이 가진 강력함은 소미가 이미 증명해보였다.

소미는 그 힘을 기반으로 현대에서 차곡차곡 자신의 기반을 다지는 중이지만, 나는 이곳에서만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두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적을 상대하려면 나도 두 세계를 아우르는 힘을 갖춰야만 했다.

설령 테일리시가 투시즌을 능가하는, 전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켜 새로운 에사인으로 거듭난다고 한들 나로서는 손해 볼 게 없다. 등을 맡길 동료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일단 당사자 의견을 들어보는 게 어떨까.”

“그래요.”

나는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들을 정리하기 위해 나섰다.

“테일리시, 지난번에 말했던 전사단 있지. 예쁜 사람들을 모아 훈련시킨다는.”

“응.”

“여기가 바로 그곳이야.”

“아?”

“소미와 쥬리도 그 전사단 소속이야. 넌 두 사람을 따라 다양한 재주를 배우다가, 몇 달 후 춤과 노래를 겨루는 경연에 참여하게 될 거야. 거기서 우승한다면 수많은 사람이 널 우러르게 되겠지.”

“왜 날 우러러봐?”

“그야 춤과 노래를 잘하니까.”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나는 더 설명할 말이 궁해 억지를 부렸다.

“그냥 그렇다고만 알아둬. 여긴 그런 세계거든.”

“그렇구나.”

“기왕이면 열심히 해봐. 네가 경연에서 우승한다면 남아서 내 곁을 지키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보탬이 될 테니.”

“내가 널 돕는 거구나. 몸이 떨어져있어도.”

“그래, 그게 요점이지.”

“그러면 할게.”

테일리시가 내게 상체를 기울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가 웃음을 되찾자 비로소 나도 안심이 되었다.

그녀는 내게 몸을 기댄 채 작게 속삭였다.

“대신 내가 우승하면 소원을 하나 들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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