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 건국 (2) >
“감사합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직원이 수속처를 떠났다. 그가 포탈 안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나는 테일리시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가자, 테일리시.”
나는 처음부터 허락 따위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명색이 총독이라는 자가 국장급이 제지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안될 것 같으면 우스운 노릇 아니겠어. 그게 바로 저쪽이 연출하려는 장면이기도 하겠고.
“총독대행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포탈 앞에 서있던 특전사들이 나를 가로막았다. 나와 몇 차례 임무를 함께했던 황승연 중사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황승연 중사는 굉장히 곤혹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듯이.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됩니다. 혹여 불편하신 점이 있으시다면 제가 가서 박문식 대령님께 말씀을 잘 드려보겠습니다.”
“물러나세요, 중사님.”
내가 짧게 경고했다.
“여러분들이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습니다.”
크르르르.......
전사형 크록들이 위협적인 울음소리를 내며 특전사들을 포위하는 중이었다.
말했다시피 이곳에 배치된 크록들은 내 부하들 중에서도 추려낸 자들이었다.
강철처럼 단단한 비늘과 초월적인 완력, 검술과 사격술을 자유자재로 스왑 가능한 실력.
그야말로 한 명 한 명이 일당백의 용사였다. 지금 당장 돌격명령을 내린다면 청사가 뚫리는 건 물론이거니와 서울 시내가 초토화될 수도 있었다.
“...물러납시다.”
중사가 두 손을 위로 들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대원들은 중사를 따라 조심스럽게 거리를 벌렸다.
그들은 애초부터 날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나나 크록을 충분히 겪어봤기에, 윗선에서 내려오는 명령들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를 잘 알았다.
나는 그들을 위해 한 마디 덧붙여주었다.
“여러분들께서는 제가 술법을 써서 저항할 수 없었다고만 하시면 됩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곳 사람들은 시말서 대부분을 술법 때문에, 크록 때문에란 말로 채우고 있지 싶었다.
나는 테일리시의 손을 이끌어 포탈을 통과했다.
즉시 녹음이 우거진 정경이 사라지고, 회색빛으로 가득한 음울한 공간이 나타났다.
포탈 출구는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보다 훨씬 보안이 강화되어 있었다. 모래주머니를 쌓고 기관총을 배치한 시점부터 여길 수속처라고 불러야할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국장을 만나러 간다던 직원은 나와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는 하릴없이 주변을 서성이다가, 날 보더니 입을 떡 벌렸다.
“초, 총독대행님...!”
“또 뵙네요.”
“마, 마침 비서실 답변을 기다리던 참입니다. 회의가 길어지고 있다고 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준비한 변명을 더듬더듬 꺼냈다. 나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단 직원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 시킨 놈이 나빴지.
“이젠 고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턱짓으로 포탈을 가리켰다.
“돌아가세요. 국장님과는 제가 대화를 잘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어서요. 계속 자리를 비워두실 셈은 아니시겠죠.”
그는 내 재촉에 어쩔 수 없이 포탈로 향했다. 그 모습이 흡사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를 보는 듯했다.
나는 테일리시를 데리고 보안구역 구석진 곳에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 케케묵은 서류들이 한가득 쌓인,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장소였다.
“여기가 마족의 집이구나.”
테일리시는 큰 눈동자에 놀라움을 가득 담았다.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서류 끄트머리를 더듬으며 꿈을 꾸듯 읊조렸다.
“이건 마족의 책이고.”
그녀의 손길이 이윽고 책상 가장자리에 놓인 탁상등에 닿았다. 접촉을 감지한 탁상등이 삑 소리를 내며 은은한 빛을 뿜어내었다.
“이건...주술구?”
나는 고양이처럼 움츠러드는 그녀를 보며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그저 잘 만들어진 기계장치일 뿐이야. 다 편하게 살자고 만들어낸 것들이니까 경계할 필요 없어.”
“여기가 네가 살았던 세상이야?”
“그래.”
“삭막하네.”
그녀의 시선이 블라인드 너머를 한 차례 훑었다.
“마치 그림자요새처럼.”
“그 정도는 아닐걸.”
일단 그림자요새엔 빛이 들지 않았다. 일 년 내내 그림자에 덮여있기 때문에 경작이 불가능했고, 사람이 모여 살 수도 없었다. 오직 음침한 오데르의 자식들만이 남아 어둠의 땅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나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테일리시를 관찰했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거나 입술을 오므리는 등 소소한 제스처로 바뀐 세계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하는 중이었다. 그저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나 여유는 오래지 않았다. 곧 품에 넣어둔 대포폰으로 기다리던 연락이 도착했다.
- 회의 끝, 내려가는 중.
아무래도 회의가 있었다는 것만큼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곧 사무실 문이 열리며 박병철 장관이 등장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며 두 팔로 얼싸안았다.
“이젠 총독대행이라 불러야겠군. 축하하네.”
“다 장관님 덕분입니다.”
“무슨 소리, 자네가 다했지. 나는 전화 몇 통 돌린 것 말고는 한 것도 없어.”
그가 내 등을 팡팡 두들겼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오데르의 형제들처럼 등을 맞대고 사선을 넘나든 것도 아닌데, 그에게 동지애 비슷한 감정이 느껴졌다.
“헌데 이 아가씨는 뉘신가. 보아하니 에신에서 오신 분 같은데, 맞나?”
“테일리시라고 합니다. 제 부하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입니다.”
“자네가 실력자라고 할 정도면 대단한 분이시로군.”
테일리시의 현재 기량은 크록 장군에게 다소 처지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내게 집착하는 정도를 고려했을 때, 그녀는 현재보다 향후가 더 기대되는 인재였다.
“반갑소, 박병철 장관이오.”
장관이 어눌한 에신어로 인사하며 손을 내밀었다. 테일리시는 그의 홀쭉한 뺨을, 이어서는 새치가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테일리시.”
그녀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게 끝이었다. 장관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내밀었던 손을 거둬들였다.
“자네들은 악수를 안 한다는 걸 매번 잊는구만.”
우리는 두 개의 소파에 나눠앉았다. 테일리시는 여느 때처럼 그림자에 숨지 않고 내 옆자리를 찾아왔다.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바빴지. 공직에 몸을 담고 나서 지금처럼 바쁠 때가 있었나싶어. 하루하루 눈을 똘 때마다 젊어지는 느낌일세."
“실제로 지난번에 뵀을 때보다 더 훤해지셨습니다.”
“하하, 자네도 이제는 정치인이 다 됐다니까.”
박병철이 기분 좋게 웃었다.
“그나저나 포탈 앞에 기관총을 가져다뒀더군요. 혹시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아, 그것 말인가. 나는 그걸 비겁한 자들의 초상이라고 부르고 싶군. 그런 숭한 물건을 내 발밑에 둘 수 없다고 몇 번이나 말을 해봤는데, 막무가내였지.”
“누굽니까?”
“누구라고 말할 것도 없네. 진영과 이념을 가리지 않고 불안감이 확산되는 중일세. 정확히는 자네가 연방정부에 대한 복안을 드러냈을 때부터라고 해야겠지.”
“…역시 그렇군요.”
“나는 이 또한 넘어야할 산이라고 보고 있네. 어느 시대에나 그런 자들이 있지 않나. 한물 간 패러다임을 끌어안고 함께 침몰하는, 망국의 유령 같은 자들 말이야.”
“이틀 전 기재부에서 연구팀에 압력을 넣었다고 합니다. 크록 배양속도를 조절하라고.”
“그래? 그건 이상한 일이로군. 기재부면 우리 쪽 사람일 텐데.”
“저는 외부세력의 개입이 있었다고 봅니다. 현시점에서 저를 압박할 수 있는 세력은 술법의 힘을 틀어쥔 자들 말고는 없을 테니까요.”
“동의하네. 기재부가 나조차 몰랐을 정도로 독자적으로 움직인다는 건 좋지 않은 신호야.”
장관의 얼굴이 사뭇 심각했다. 그는 정치적인 역량으로는 남에게 뒤질 사람이 아니었으나, 술법이 개입되었다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대책이 있겠나?”
“저도 난감하긴 합니다.”
기재부는 예산 운용을 틀어쥐고 있다. 실상 그들이 모든 정부부처의 갑이었다. 그들이 돈줄을 끊어버린다면 배양은 고사하고 당장 크록을 먹여 살릴 수단이 궁했다.
크록이 하루에 먹어치우는 고기가 아프리카 사자의 세 배라던가.
수렵만으로는 결코 조달할 수 없는 수준의 식사량이다. 생태계 파괴를 각오하고 야생동물을 남획한다면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그쯤 되면 지속가능한 발전은 물 건너간 이야기였다.
“그래서 장관님께 몇 가지 부탁을 드리려합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언제나 자네 편일세.”
“가장 시급한 문제는 우리 편이라고 여겨지는 정치인들을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입니다. 마침 대한민국에 주술을 다룰 줄 알고 추적과 감시에 능한 조직이 있습니다. 정부차원에서 이들의 활동을 보장해주실 수 있겠는지요.”
“물론일세, 나도 그런 조직을 고대하던 참이라네.”
소미의 사제단.
전원 연예인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던 사생으로 구성된, 국정원 저리가라 할 스토커 집단이다.
집요하기로 따지면 테일리시 못지않을 인간들이었다. 소름이 끼치는 걸로는 더할 테고.
최근에는 알레한드로의 마약조직을 박살내면서 전투력을 입증한 바도 있다.
일본, 다르마알, 국내에 어떤 자들이 들어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사생들의 스토킹을 감당해낼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두 번째는 먹고 사는 일의 해결입니다. 꼬인 정치문제는 당장 해결할 수 없으니, 다른 곳에서 길을 뚫어야겠습니다.”
“다른 곳이 있겠나?”
“혹시 저를 경제인과 연결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기왕이면 유통업을 쥐고 계신 분이 좋겠습니다. 제철업에서도 한 분, 원목을 수입하는 업체에서도 한 분씩 와주셨으면 합니다.”
"......."
장관이 나를 묘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는 잠시 후 자기 무릎을 짝 소리가 나도록 세게 내리쳤다.
“그렇군, 그게 정답이야! 자네는 국가원수가 될 사람이 아닌가. 무역길을 자네가 직접 뚫는다면 기재부도 할 말이 없겠구만. 절차상의 사소한 문제들은 내가 뭉개버리면 될 테니.”
“바로 그렇습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돌고 돌아 원점이라더니.
마케팅회사를 때려치우고 공무원이 된 게 엊그제 같은데, 다시 두 발로 영업을 뛰려는 걸 보면 실은 암살자보다 이쪽이 천직이 아니었나 싶다.
“며칠 내로 좋은 자리를 주선해주겠네. 그때까지 서울 관광이나 하고 있게나. 그쪽 아가씨는 우리나라가 처음이지?”
“그렇지요.”
“마침 한강유람선이 성업중이라네. 내 적극 추천하지.”
“한 번 들러보도록 하겠습니다.”
테일리시는 이 모든 이야기와 동떨어진 채 나를 빤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장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가 내게 물었다.
“라힐, 끝났어?”
“그래.”
“이제 어디로 가?”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부터 움직이면 얼추 약속한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JSY 엔터테인먼트.”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연예기획사와 대치될만한 어휘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려보았다.
“예쁜 사람들을 모아서 훈련시키는.......전사단 같은 곳이랄까.”
나는 외교부를 빠져나오자마자 택시를 잡았다.
소미와 나눌 이야기가 많았다. 그녀의 사제단과 협업하는 것부터 테일리시를 가르치는 것까지.
JSY 사옥 앞은 오늘따라 더욱 붐비는 중이었다. 마침 연예인 퇴근시간이 임박해와 그런 듯했다.
직원전용의 문을 통과하기 전에 약간의 소요사태가 일어났다. 몇몇 팬들이 테일리시를 연예인으로 착각하고 모여든 탓이었다.
소미의 작업실이 있는 6층은 언제나처럼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테일리시를 이끌고 작업실 문을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소미가 아니었다. 그보다 한층 피치가 높은, 어리고 발랄한 목소리였다.
내가 멈칫거리자, 문틈에서 숨죽인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오빠, 얼른 들어오세요."
이번에는 소미가 맞았다.
방 안에는 소미 말고도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기다란 오렌지빛 머리카락을 등허리까지 늘어뜨린 소녀였다.
“안녕하세요, 쥬리에요.”
소녀가 꾸벅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서클렌즈를 낀 녹색 눈동자가 나를 탐색하듯 살펴보았다.
“맞으시죠? 에사인이 되실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