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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60화 (60/205)

60화. < 건국 (1) >

알레한드로를 돌려보낸 뒤 나는 공화국 건설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

국회의 허락이 떨어지기까지 얌전히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최대한 이곳의 규모를 부풀려서 본국에 압력을 넣어야만 했다.

이미 크록의 숫자가 특전사 병력을 압도하고 있었기에, 여기서만큼은 내가 말하는 게 곧 법이었다.

나는 우선 넘쳐나는 원목들을 이용해 주거지를 짓는 걸 목표로 삼았다.

크록은 지금 이 순간에도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수용할만한 시설은 턱없이 부족했다.

자원은 좁은 포탈을 통해 찔끔찔끔 들어왔고, 몇 안 되는 기술자를 굴려먹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다행히 목수 일이 난이도가 낮았다. 일이 쉬워서 난이도가 낮은 게 아니라, 근처에서 가장 흔히 구할 수 있는 자원이 나무인데다가 크록이 요구하는 주거지의 기준이 형편없기 때문이었다.

“위대한분이시여.”

막시무스가 내게 다가와 허리를 꼿꼿이 펴며 말했다.

나는 관청 집무실에 앉아 도시계획 전문가가 작성한 계획안을 들여다보던 중이었다.

막시무스와 눈을 마주치려면 뒤통수가 꺾어지도록 고개를 쳐들어야만했다. 그를 만날 때마다 나는 매번 같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살과 뼈로 이루어진 생물이 이렇게나 늠름할 수가 있는가하는.

“주거지 건설은 순조롭습니다. 내주 안으로 약 사천 채의 집을 완성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부수고 다시 지어야하니 너무 열 내지는 말라고 해.”

“알겠습니다.”

오직 등을 대고 눕는 것만을 목적으로 지어지는 집들이었다. 전기와 수도설비가 도입된다면 모조리 뜯어내야만했다.

“또한 위대하신 분의 궁전을 착공했습니다. 거하시는 데 불편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말해두지만 난 말리고 싶었다.

지을 건물이 까마득한데 벌써부터 궁전이라니, 무리하게 토건사업을 벌이다가 망해버린 왕국이 어디 한둘이냐고.

그러나 크록들은 이걸 단순한 건축이 아니라 내 이름을 드높일 신성한 임무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자신들이 누울 자리보다 더 소중하다는데 말리래야 말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축구장 열 개를 합쳐놓은 듯한 어마어마한 규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현장은 흡사 바벨탑이 건설되던 광경을 방불케 했다. 수백 명의 크록이 달라붙어 밤낮으로 차력 쇼를 하듯 통나무를 때려 박았다. 높이와 폭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 났고, 남아돈다던 나무들은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갔다.

“.......그래, 기대가 되는구나.”

“이상입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막시무스가 보고를 마쳤다.

“잠깐 여길 봐라, 막시무스.”

나는 손가락으로 도시계획안을 관통하는 기다란 물길을 가리켰다. 구획과 구획 사이를 방사형으로 뻗어나간 물길이 도시 외곽을 둥글게 둘러싸 해자를 만든다는 게 계획의 골자였다.

크록은 악어와 많은 면에서 다른 생물이었으나, 축축한 곳을 좋아하며 물속에서 아무런 행동제약이 없다는 점만은 비슷했다.

그런 크록의 특징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도시와 운하를 결합시키겠다는 원대한 꿈이었다.

“인간 전문가를 현장에 보내놓았다. 네게도 따로 말해둔다만 이곳만큼은 전문가의 작업지시를 반드시 준수해야만 한다.”

“그리하겠습니다.”

막시무스가 더욱 꼿꼿하게 허리를 폈다. 그는 내게 예를 갖출수록 허리가 곧추서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면 저는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막시무스!”

막시무스가 인사를 하고 떠나려던 참이었다. 차수진 박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등장했다. 그녀는 막시무스의 손을 덥썩 쥐며 책망하듯 물었다.

“누나가 연구소에 한 번 들르라고 했는데 왜 안 오는 거니?”

“위, 위대하신 분이시여...”

막시무스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나는 그의 당황한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그가 당황이라는 걸 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박사님, 애꿎은 크록 그만 괴롭히시고 이리 오시죠.”

차수진 박사는 막시무스 같은 특이종에게 비상한 관심이 있었다. 어떤 조건하에서 그런 변이가 발생하는지 반드시 밝히고야 말겠다는 게 그녀의 꿈이었다.

“에이, 너무하신다.”

차수진 박사가 입을 오리처럼 내밀었다. 자유가 된 막시무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무실을 떠났다.

“오늘은 어쩐 일이십니까?”

그녀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 곁에 다가와 도시계획안을 살펴보며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네요, 정말. 왕이라도 되시려는 거예요?”

“공화국 국가원수가 어감상 더 좋지 않겠습니까.”

“결코 교체되지 않을 원수 말이죠.”

차수진 박사가 킥 웃으며 말했다.

“그거 알아요? 제 팀원 누구도 총독대행님이 투표에서 절대 지지 않을 거라고 건준위 사람들한테 말해주지 않았다는 거."

“말해주셔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저를 지지해주시는 건 고맙군요.”

“이유는 안 물어보세요?”

“왜 지지해주십니까?”

“신기해서요.”

"......."

"농담이에요, 농담!"

그녀가 빙글빙글 웃었다.

“저희 연구팀은 에신으로 건너온 그날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쉬지 못했어요. 이곳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 하나하나가 지구에는 없는 것이잖아요. 곰팡이 하나만 가지고도 논문 몇 개를 쓴다는 거죠.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신비한 건 바로 총독대행님이세요. 인간이 신을 향해 나아간다니, 이건 논문이 아니라 경전을 써야하는 일이 아니겠어요?”

“학자적 호기심의 발로라는 뜻으로 들리는군요.”

“아니에요. 그보다는 뭐랄까....”

차수진이 단어를 신중하게 골랐다.

“사명감? 유대감? 여하간 역사를 함께 만들어나가고 있다는 거죠. 애초에 학자라는 작자들이 명예욕 빼면 시체거든요. 내 이름을 사서에 남기고 싶다, 청사에 길이 새기고 싶다. 자나 깨나 그런 생각들뿐이죠. 총독대행님과 함께하기만 한다면 아주 높은 확률로 그렇게 될 테고요.”

“그러시다면 아예 공화국에 입적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박사님은 장차 국가원수가 될 사람에게 무제한적이고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될 테고, 저는 배양시설을 외부인에게 맡겨야한다는 리스크를 지지 않아도 되니 말입니다.”

"......."

이번에는 그녀가 말문이 막힐 차례였다.

오직 연구를 하겠다는 포부만으로 이십대의 꽃다운 나이에 남극으로 날아갔던 여자.

차수진 박사는 열정과 능력을 두루 갖춘 보기 드문 인재였다. 물론 그 열정이 너무 강해 때로는 민폐를 끼치기도 하지만, 어느 분야나 그렇듯이 혁신은 이런 집요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기 마련이다.

“후후, 이건 예상 못했네요.”

차수진 박사가 부스스한 머릿결을 쓸어 넘기며 미소를 지었다.

“아, 정말 아쉬워요. 제가 오 년만 젊었어도 총독대행님을 꼬셔봤을 텐데.”

“저보다 연하이십니다만.”

“아니면 공화국 헌법에 일부다처제를 넣어버리시는 건 어때요? 저는 연구비만 잘 주신다면 측실이라도 괜찮거든요.”

“연구비만 넣어드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렇게 시작.”

차수진 박사가 허리를 굽히며 웃었다. 나도 설핏 미소를 지었다.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한 테일리시만 그림자 속에서 웃을지 말지를 고민하는 중이었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보시죠.”

“네, 그러려고요.”

차수진 박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빠르게 엷어졌다. 그녀는 팔짱을 끼며, 어울리지 않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제 연구팀에 기재부 사람이 찾아왔어요. 예산에 여유가 없어서 크록 배양을 줄여야한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알기로 편성된 예산이 떨어지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그 돈을 다 어디로 까잡수셨는지 모를 일이에요. 게다가 현지동물을 가축화하는 프로젝트가 너무 빨리 끝나지 않았으면 한다는데, 예산이 없으면 가축화를 빨리 하던가해야지 앞뒤가 맞지 않잖아요?”

“견제가 들어오는군요.”

“역시 그렇죠?”

그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되물었다.

공화국수립을 반대하는 여론이 생겨날 거라는 건 예측범위 내였다.

다만 타이밍만큼은 내 예상보다 빨랐다.

의사결정속도가 느리다는 게 민주주의의 최대 단점이기 때문에, 찬성이든 반대든 의견이 모이고 행동에 나서기까지 적어도 한두 달은 더 걸리리라 내다봤었다.

이 견제속도는 외부세력의 개입여부를 시사했다.

하긴 에신 안에서만 치고받으라는 법이 없다. 오히려 현실의 여러 제약으로 얽매인 본국을 공략하는 게 더 효율적일 수도 있었다.

“잠시 본국에 다녀와야겠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테일리시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는 호수처럼 잔잔한 눈으로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저 가라앉은 눈빛이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 나는 잘 알았다.

“박사님. 옷을 한 벌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설마 이 애를 한국으로 데려가시게요?”

“예."

나는 얼마 전 차수진 박사가 입고 나타났던 평상복을 떠올리며 추가로 주문했다.

“가급적 젊은 감성으로 부탁드립니다.”

“...저 놀리는 거 맞으시죠, 지금.”

테일리시가 어색한 표정으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쳐다보았다.

차수진 박사가 준비한 옷은 폴리에스터 소재의 줄무늬 셔츠와 심플한 면 티셔츠, 그리고 통이 넓은 반바지였다.

이게 그녀의 최선임엔 분명했다.

내가 보기에도 최선이었다. 나는 패션에는 조예가 없으나, 테일리시가 굉장히 눈에 띈다고는 말할 수 있었다.

흡사 피규어 같았다.

아니면 코스플레이어라던가.

비현실적으로 파란 눈과 머리카락이 옷의 배색을 극대화했다.

“패배를 인정해야겠네요.”

차수진 박사가 평소답지 않게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이 안 돼요. 오데르는 암살자를 외모로 뽑나요?”

“뛰어난 외모가 암살에 유리하긴 합니다.”

“진지해서 더 재미없으신 거 아시죠.”

“이만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테일리시와 함께 차수진 박사의 숙소를 나섰다. 문을 뚫고 차수진 박사의 한탄이 흘러나왔다.

포탈은 삼중사중의 엄중한 경계 속에 운영되고 있었다. 일반적인 입국심사장과는 엄중함의 차원이 달랐다.

나는 혹시라도 주술력을 가진 자가 본국으로 유입되지 않도록 크록들 중 최정예부대를 투입해놓았다.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쪽은 포탈의 입구와 출구 양쪽에 특전사뿐만이 아니라 경찰특공대까지 동원해두었다. 그들은 우리가 변심할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가정까지 염두에 뒀을 것이다.

포탈은 폭이 고작해야 이 미터 남짓이었는데, 그중 절반은 사람이 드나드는 데 쓰이고, 나머지 절반은 물류가 이동하는 데 쓰였다. 이 좁아터진 창구를 늘리는 게 공화국 설립 후 내 최우선과제가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위한 줄로 가 섰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총독대행님.”

공무원증을 목에 건 젊은 남성이 공손히 인사했다.

그게 수속절차의 전부였다.

하지만 테일리시는 얘기가 달랐다.

총독대행으로서 내 신분은 법적인 보장이 되고 있으나, 아직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라 나를 따르는 부하들은 입지가 애매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에신 현지에서 합류한 부하들일수록 그랬다.

“동행인이십니까?”

“제가 신분을 보장합니다.”

“혹시 주술사이십니까?”

“예."

“죄, 죄송하지만 이런 경우는 매뉴얼에 없어서.......괜찮으시다면 국장님께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직원이 더듬거리며 내게 양해를 구했다.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테일리시가 노래하듯 은은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라힐, 이 사람 거짓말쟁이야.”

“그래, 안다.”

“죽여도 돼?”

우리의 대화는 에신어로 이루어졌다.

남자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불길한 뉘앙스만큼은 감지를 하고 있었다.

국장에게 물어본다는 소리는 그저 핑계일 뿐이었다. 무슨 말로든 둘러대서 주술사를 데려오는 것만큼은 막고 싶을 테지.

“테일리시, 포탈을 건너가거든 결코 허락 없이 사람을 죽여선 안 된다.”

나는 테일리시를 타이른 후, 남자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물어보고 오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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