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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58화 (58/205)

58화. < 진실의 추 (10) >

“라힐.......말입니까?”

“크록 종족이 숭배하는 대상입니다. 이쪽에서는 하느님과 동의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가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서 신생 공화국은 백성들이 애국가를 가장 열심히 부르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면 큰 줄기는 잡혔고...”

나는 서류를 다음 페이지로 넘겨보았다. 다시 다음 페이지로, 이어서 다다음 페이지로.

초기안건을 크게 선회했기 때문에 지금 시점에서는 무의미해진 내용들이 많았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연방제가 저쪽 국회의 승인을 얻고 난 후에 나눌 수 있겠군요. 여러분들께서 수고를 해주셔야겠습니다.”

나는 부서진 의사봉을 세 차례 두들겨 산회를 선언했다.

“이상으로 제 1회 건국준비위원회 총회를 마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의자에 앉아 하나둘 떠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몇몇 사람들에게서 미미한 죄업이 느껴졌다. 카르마가 가장 깊다고 느껴지는 게 여당대표인 김형식 교수였고, 가장 백지상태에 가까운 게 야당대표인 장효진이었다.

이미지만으로는 그 반대여야 할 것 같은데 말이지.

이윽고 모든 사람이 회의실을 떠나자, 그림자로부터 검은 로브를 걸친 소녀가 걸어 나왔다.

“테일리시.”

소녀가 후드를 벗어 파도처럼 출렁이는 머릿결을 드러내었다. 조명이라고는 형광등이 전부인데도 구슬 같은 눈동자가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이 났다.

“많이 변했어.”

테일리시가 테이블 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읽을 수 있는 감정은 호기심이 전부였다.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

“내가 아는 라힐은 이렇게 말을 잘하지 않았는데.”

인정하는 부분이다.

전생의 나는 과묵하고 잔인하며, 농담이라고는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은, 창작물에서 흔히 묘사되곤 하는 암살자의 스테레오 타입 그 자체였다.

어쩌다 나 같은 놈에게 반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나쁜 남자 신드롬 같은 건가.

“내가 아는 라힐은...”

그녀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방해.”

“방해?”

그녀는 뒤로 물러나는가 싶더니, 다시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기고 말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회의장 입구를 돌아보았다. 차수진 박사가 놀란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차수진 박사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그림자 너머를 기웃기웃 살폈다.

“방금 누구에요?”

“제 호위입니다.”

테일리시는 오데르의 검이던 시절처럼 그림자에 녹아들 수 없게 되었다. 어두운 곳에 콕 박혀있는 게 그녀가 할수 있는 전부였다. 그녀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도 암중의 호위라는 컨셉에 몰두하는 중이었다.

“.......대화 가능하신 거 맞죠?”

“물론입니다.”

박사가 서류를 바리바리 들고 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서류보다 박사의 옷차림에 더 눈길이 갔다.

그녀는 연구복은 내다버렸는지, 어울리지도 않는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프로젝트에 몰두한 끝에 이제는 집과 일터의 경계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듯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뭐부터 들으실까요?”

“나쁜 소식부터 말씀해주시죠.”

“크록은 성장기에 어떤 음식을 섭취하느냐에 따라 종이 달라져요. 육류를 먹으면 전사형 개체가 되고, 어류를 먹으면 암살형 개체가 되죠. 기억하시죠?”

“기억합니다.”

기억을 못할 리가 없지. 전사형이니 암살형이니하는 용어를 붙인 게 나인데.

“다른 가능성도 있어요. 마그나크록이라는 신적 존재의 피를 사용하면 하얀 비늘을 가진 주술형 개체를 만들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높으신 분께서 마그나크록의 피는 절대로 구할 수 없는 물건이라고 확언해주셨다는 게 나쁜 소식이에요.”

“그럼 좋은 소식은 뭡니까?”

나는 의아스럽게 물어보았다. 설마 주술형 개체와 관련한 소식은 아닐 거라고 추측하며.

“제 가설이 맞다면 키워드는 마그나크록이 아니라 에사인이에요. 마그나크록과 비슷한, 에사인이라 불리는 초인의 피로 배양을 해보는 거예요. 운이 따라준다면 주술형 개체가 만들어질 수도 있겠고, 어쩌면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변종이 나타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시도해볼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흥미롭긴 합니다만...그건 좋은 소식이 아니라 하나의 가설이 아닙니까?”

“좋은 소식은 이제부터에요. 제가 총독대행님을 위해 비싼 헌혈용 장비를 들여놨다는 거.”

차수진 박사가 내 손목을 덥썩 쥐었다.

“협조해주실 거죠?”

그녀가 사근사근하게 물었다.

내 피를 뽑고야 말겠다는 엇나간 열정으로 얼룩진 제스처였다. 설상가상으로 뒤쪽에서는 살을 저미는 듯한 살기가 뻗어왔다. 테일리시가 차수진 박사의 스킨십을 오해한 게 틀림없었다. 나는 차수진 박사에게 끌려 나가며, 좋고 나쁨이 내가 기준이 아니었다는 걸 뒤늦게야 깨달았다.

예정에도 없던 헌혈을 한 다음날, 나는 기지내 크록들에게 집합명령을 내렸다. 정확히는 1세대, 그중에서도 차세대 크록을 이끌어나갈 리더라고 여겨지는 아주 특별한 개체만을 소집한 것이다. 이들은 고등교육을 위해 원정대에도 포함이 되지 않았었다.

크롱크.

약 150센티미터 가량의 키에 다소 굽은 등, 그리고 장닭처럼 붉게 솟은 볏이 인상적인 개체였다.

도드라진 안와 아래로 작은 눈알이 영민하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는 전사형이 아니라 암살형 개체의 리더였다. 평균적으로도 암살형 개체가 전사형보다 지능지수가 높게 분포되는데, 크롱크는 개중에서도 더 특출나다고 알려졌다. 베이스캠프에 합류한 교육전문가들을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두 손 두 발 들게 했다고.

막시무스.

그의 이름은 크록의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고 내 취향대로 지었다.

생긴 걸 보면 다른 이름을 붙일 수가 없었다.

여느 크록들과 다르게 꼿꼿하게 선 허리와 그 덕분에 훨씬 압도적으로 보이는 덩치, 수염처럼 턱 아래로 자라나 근엄하기 그지없는 뿔.

한손무기와 방패를 쓰는 스타일도 그를 남다르게 만들었다. 물론 그가 다루는 한손무기란 인간의 기준에서는 전봇대나 나무둥치에 더 가깝다.

그는 이레귤러 중의 이레귤러였다. 그가 가진 전투적인 잠재력은 카룩카이보다도 높다고 평가되었다.

“부르셔서 왔습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큼.”

크롱크가 바닥에 바짝 엎드린 채 내게 인사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인사드립니다.”

막시무스는 꼿꼿한 허리를 더욱 꼿꼿하게 세우며 정확한 에신어 발음을 구사했다. 그는 형제들보다 주둥이가 훨씬 짧아 발음이 거의 새지 않았다.

“그냥 라힐님이라고 불러라.”

“알겠습니다, 라힐님, 큼.”

“크롱크. 네게 인간 기술자들을 몇 명 붙여주겠다. 너는 그들에게 광맥의 탐사와 개발까지, 광산 운영에 필요한 제반지식을 배우도록 해라. 앞으로는 인간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자체적으로 자원을 채굴할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큼.”

크롱크가 납죽 엎드린 채 대답했다.

열대우림은 철, 텅스텐, 구리, 주석 등 각종 천연자원의 보고였다. 태초부터 한 번도 개발의 손길이 닿은 적이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정찰된 바에 따르자면 원석이 노천에 널려있는 노다지가 수두룩하다고 한다.

“막시무스, 너는 벌채한 나무를 건조하고 가공하는 작업에 참여해라. 인간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작업이 가능하도록 충분한 수의 숙련공을 확보하는 걸 목표로 잡아라.”

“그리하겠습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막시무스가 생긴 것처럼 우직하게 대답했다. 라힐이라 불러달라는 요청도 우직하게 씹어 먹으며.

풍부한 자원과 노동력이라는, 에신이 가진 강점을 최대한 활용해 기초산업을 육성하겠다는 게 대한민국 정부의 청사진이었다.

내 청사진은 거기다가 공화국을 얹어주겠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은 원자재를 값싸게 공급받고, 장차 인구 수억에 달할지도 모르는 신규시장을 개척하며, 이세계에서 들이닥칠지 모르는 위협을 방지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 대가로 고도로 발달한 기술집약적 산업의 과실을 누리겠지.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도 만족하는 길이 아니겠냐.

물론 그쪽 생각은 다를 수도 있다. 공짜로 자원을 가져갈 생각에 매몰되어 있다면 오히려 손해를 봤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크롱크, 막시무스, 내 용건은 끝났다. 내게 요청할 게 있다면 뭐든 말해 보거라. 가능하다면 들어주도록 하마.”

에사인의 주요업무중 하나가 민원처리였다. 나는 아직 우상으로 기도를 접수할 능력이 안 되기 때문에 면대면으로 묻는 수밖에 없었다.

신도를 본인 민원의 처리대상으로 삼는 에사인도 존재하나,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들은 크록 종족의 미래이자, 내가 그려나갈 새로운 세계의 미래이기도 했다. 이들의 니즈를 알아야만 미래를 안다고 할 수 있었다. 근래 밖으로만 떠도느라 소홀히 했던 걸 벌충할 때가 온 것이다.

“요청을 드리겠습니다, 큼.”

크롱크가 빨간 볏을 좌우로 요란스럽게 흔들었다. 흥분했다는 표현인 듯했다.

“라힐님께서 막시무스의 덩치들만 데리고 전투를 하셔서 제 부하들이 불만이 많습니다, 큼. 커다란 몸은 쓸데없이 칼로리만 많이 소모할 뿐이고, 느린 속도와 피격기회 창출로 이어집니다. 그것들은 전술적으로 기용가치가 없는 하자덩어리이므로 광산으로 보내버려야 옳습니다 큼."

“위대한 분이시여. 이 도마뱀은 감히 위대한 분의 결정에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허락을 해주신다면 제 손으로 처분하고 싶습니다.”

막시무스가 점잖게 발언했다. 나는 그가 도마뱀이라는 표현을 어디서 배웠는지를 먼저 묻고 싶었다.

“또 있습니다. 제 부하들은 창작이나 연구 등 다양한 활동에 욕심이 많습니다, 큼. 그러려면 인간들에게 재화를 주고 설비를 구해야하는데, 저희에겐 그럴만한 재화가 없습니다. 막시무스의 덩치들을 노동력으로 활용해서 재화를 획득하시고, 제 부하들에게는 고등한 지적인 임무를 맡기셔야 옳습니다, 큼.”

“위대한 분이시여, 허락을.”

막시무스가 거듭 요청했다. 여기서 그가 구하는 허락이란 크롱크의 모가지를 따버릴 수 있는 권리였다.

나는 일단 침묵했다.

내가 그간 무관심했다는 건 인정해야겠다.

크록들이 교육을 받다 못해 파벌까지 만들어냈을 줄이야.

게다가 크롱크에 한해서는 사유재산의 개념과 계급론까지 입력이 된 듯했다.

“크롱크.”

크롱크가 대답으로 볏을 흔들었다.

“네 부하 일부를 일선부대에 기용하는 걸 고려해보마.”

“감사합니다, 큼.”

당분간 큰 전투는 없으리라 예상되었다. 이럴 때야말로 암살형 개체가 활약할 때였다. 적진에 침투해 기밀을 빼오거나 요인을 암살하거나,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재화는 너희가 내가 맡긴 임무를 잘 해낸다면 자연히 굴러들어올 것이다. 지금은 인간의 기술을 배우는 것에 주력하자.”

“명을 받들겠습니다.”

“서로 싸우지도 말고. 동족이 아니냐.”

“저는 제 꼬리보다 작은 동족을 둔 적이 없습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막시무스가 정중히 답변했다. 크롱크는 볏을 활짝 펼치며 캇캇대고 웃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만큼이나 둘 사이에 풀어야 할 앙금도 많은 듯했다.

크롱크와 막시무스를 만난 뒤 며칠 후였다.

나는 빈 숙소를 빌려 테일리시에게 이런저런 상식을 가르치던 중이었다. 어차피 떼놓고 다닐 수 없다면 대한민국 사회에 적응을 시켜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안녕하세요.”

누군가가 문을 반쯤 열어놓고 노크를 했다. 소미였다. 그녀는 그 사이 머리카락 색이 또 바뀌어있었다. 이번에는 눈처럼 소복소복한 백발이 컨셉이었다.

“아, 이거요?”

그녀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머리카락 끝을 당기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이 다른 팀하고 컨셉이 너무 겹친다고 하시더라고요. 여름이랍시고 파란 계통으로 물들이는 거, 식상하다면서."

소미는 뒤늦게야 테일리시의 존재를 눈치 챘다. 테일리시는 그 말을 들었는지 무심코 자기 머리를 매만지는 중이었다.

“오늘은 못 보던 분이 계시네요.”

소미가 테일리시를 흥미롭게 바라보며 말했다.

“잘 왔어. 서로 인사해. 이쪽은 테일리시. 전생의 동료이자 현생의.......”

그녀를 수식할 어휘가 애매했다.

호위무사? 경호원?

“그림자에요. 잘 부탁드릴게요.”

테일리시가 가르쳤던 대로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그림자란 표현은 밤낮으로 근접경호를 하는 오데르의 검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내 힘을 받은 전사들 중 유일하게 소형무기를 고집하고 있었다. 그녀는 바뀐 정체성에 크게 개의치 않아하는 듯했다.

“그리고 여긴 진소미. 내게 에사인으로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주고 있지.”

“아…"

테일리시가 납득했다는 듯이 감탄성을 내었다. 그녀는 차수진만큼은 소미를 견제하지 않는 듯했다.

소미는 한계를 초월한, 강력하기 짝이 없는 주술사였다. 술법의 세계에 발을 담근 자라면 그녀를 결코 평범한 여성으로 대우할 수가 없었다.

“진소미에요. 오빠가 제게 배운다는 말은 흘려들으시면 돼요. 저 없이도 뭐든 잘 해내는 분이니까요.”

“후후, 그렇구나.”

테일리시가 갑자기 행복하게 웃었다. 마치 자기가 칭찬을 받은 것처럼.

나는 민망해져서 화제를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그건 어떻게 됐니? 다르마알의 점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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