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 진실의 추 (9) >
“1세?”
“1세라고요?”
여기저기서 반문이 터져나왔다. 대부분 법조인들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아니 그게 지금..1세는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판사 출신의 위원이 두 팔을 벌리며 항의했다. 차라리 15세나 16세였다면 잘못 들었겠거니 했을 텐데, 이건 도저히 납득을 못하겠다는 것이겠지.
“바, 발언권을 신청합니다.”
김형식 교수가 다급히 손을 들었다.
“발언하시죠.”
“총독대행께서 하신 말씀은 어디까지나 1세 이상의 ‘성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래도 총독령은 인프라나 교육적인 측면에서 열악한 곳이다 보니, 일단 성인을 기준으로 삼은 뒤에 구체적인 연령제한을 협의하자는 뜻인 것이지요. 협의결과에 따라서는 그것이 19세가 될 수도 있고 20세가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는 나를 변호하기 위해 갖은 언변을 동원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애타는 노력을 단순한 몸짓 하나로 무너뜨려버렸다. 나는 세상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모두가 잘 볼 수 있도록 검지를 위로 들어올렸다.
“한 살이 맞습니다.”
“휴회, 휴회를 건의합니다. 총독대행께서 아직 여독이 풀리시지 않으셔서...”
“김형식 위원장님.”
“예."
“그만 자리에 앉으시지요.”
"......."
내가 눈짓으로 압력을 주자, 김형식 교수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나는 대가리가 날아 가버린 의사봉으로 목판을 두들기며 주의를 환기했다.
“자자, 집중해주시지요. 왜 1세인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총독령은 크록이라는 이종족이 인구 대부분을 구성합니다. 크록은 인간과 많은 점이 다른데, 그중 하나가 성장속도입니다. 정확히는 생후 일주일이면 성인으로서 기능할 수 있죠.”
“발언권을 요청합니다.”
새치가 희끗희끗하게 난 중년의 남성이 손을 들었다.
“말씀하시죠.”
“저도 크록이라는 종족에 대한 자료를 검토해보았습니다. 그들이 매우 빠르게 성장하는 것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겠습니다만, 몸집이 크다는 것과 몸집에 걸맞은 지적인 능력을 가졌다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투표를 할 정도의 분별력을 가지려면...”
“자료를 제대로 안 보셨군요.”
“...예?”
“크록이 모체의 지식 일부를 선천적으로 이어받는다는 사실을 깜빡하셨으니 말입니다. 따로 교육을 하지 않아도 언어를 구사할 줄 알게 된다는 게 그 좋은 예죠.”
물론 자동으로 습득하는 언어는 에신어뿐이었다. 차수진 박사는 조건이 갖춰진다면 한국어도 자동습득이 가능할 거라 주장하고 있기는 했다.
“가르치지 않아도 말이, 아니, 말을 한다는 거로군요.”
당황했는지 그의 혀가 꼬이고 말았다.
진한 불신의 기운이 장내에 가득했다.
그들은 대부분 성공한 엘리트였다. 말인즉슨 대체로 나이가 많고, 세상을 규정하는 법칙에 남보다 능통한 자들이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보수적이고, 고집이 셌다.
물론 에신 프로젝트의 일부가 된 만큼 어느 정도는 열린 사고를 가진 자들이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평생 믿고 따르던 관념이 하루아침에 뒤집어지진 않았다.
“그렇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장점들을 가진 아주 멋진 종족이죠. 시간이 나시면 연구팀도 들러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께는 장기를 두는 것 말고도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요.”
중년의 남성이 격추되어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발언하실 분이 또 있으십니까?”
“발언하겠습니다.”
장효진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녀는 잠깐 사이 싸울 준비를 마쳤는지 표정에 투지가 가득했다.
“설령 크록이 모체의 지식 일부를 타고난다고 하여도, 그것만으로 투표를 할 수 있는 분별력이 갖춰졌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를 테면 생후 일주일 된 크록이 도덕에 대해 논하거나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자가 리더가 되어야만 하는지 판가름할 수 있는 올바른 잣대를 가졌다고 확신하시는가요?”
걸려들었다.
그러나 나는 티를 내지 않았다.
나는 점잖게 헛기침을 하며, 그녀에게 되물어보았다.
“그러면 부위원장님께서는 얼마나 교육을 해야 크록에게 그런 자격이 갖춰진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제가 아니라 교육전문가가 판단할 문제입니다만, 최소한 중등교육에 준하는 과정은 수료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좋습니다. 중등교육 수료를 기준점으로 잡죠.”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그녀의 눈매가 바늘처럼 가늘어졌다.
내가 무슨 꿍꿍이속인지 알고 싶겠지.
“교과내용은 투명하고 공정하게, 대한민국 각계의 전문가들을 두루 초빙하여 만들어져야합니다.”
“옳습니다.”
“그리고 교육행정부의 구성은 좌우 편중되지 않게 천거를 통해 공평하게 이뤄져야 합니다.”
“마땅히 그래야지요.”
"......."
할 말이 떨어졌는지 그녀의 입이 다물렸다.
그녀는 크록들이 섬기는 우상이 날 본 따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죽었다 깨도 모를 것이다.
크록들이 나를 숭배하는 한 투표는 하나마나였다. 러시아처럼 투표율 합산이 100%를 초과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설령 이들이 그 사실을 안다고 해도 날 막을 명분은 없을 것이다. 그때는 종교의 자유도 보장해준다고 하면 그만이 아니겠냐고. 조건을 아무리 주렁주렁 단다고 한들 내가 살아있는 우상이라는 건 불변하는 사실이니까.
장효진이 마지못해 자리로 돌아가자, 나는 반토막이 난 의사봉을 세 번 두들겨 안건을 확정했다.
“정리합니다. 우리는 공화국을 설립하여 연방제로 갑니다. 건준위 여러분들은 공화국 정부의 1기 내각을 구성합니다. 여러분들 각자가 대표하시는 집단으로 돌아가셔서 연방제의 필요성에 대해 잘 어필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나는 그들을 ‘우리’라는 말로 은근슬쩍 하나로 묶으며, 공화국 정부의 각료자리를 보장해주었다.
말하자면 골드 러시였다.
건준위 위원 대부분은 재야에서 학자연하던 사람들로서, 언젠가는 행정부로 진출해 임명직 공무원이 되고 말겠다는 청운의 품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신생 공화국은 명목상 대한민국과 비등한데다가 규모는 훨씬 크니, 그들로서는 기회의 땅이라 아니할 수가 없었다.
물론 재수 없게 전쟁에 휘말려서 사망하는 루트도 존재한다.
선택은 본인이 하기 나름이었다.
나는 반토막이 난 의사봉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반대하시는 분 계십니까?”
사람들은 서로 눈치만 보기 급급했다.
여기서 손을 든다면 누군가의 출세길을 공공연히 막겠다는 건데, 그건 여야를 넘어서서 같은 진영끼리도 머리채를 붙들고 싸울 일이었다.
“가결되었군요.”
땅, 땅, 땅.
나는 의사봉 자루로 목판을 세 차례 두들겼다.
이 타이밍에 두들기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꼭 한 번은 해보고 싶은 행위였다.
“위원장님과 부위원장님 두 분이 주도해서 공화국에 적합한 정부조직도를 만들어오세요. 건준위 위원들로만 내각을 구성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외부에서 유능하다고 생각되는 인재들을 천거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김형식 교수가 대답했다.
“괜찮은 분들이 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그 까다롭던 장효진도 한 발 물러섰다.
나는 그들의 욕망에 두 번째로 불을 지폈다.
김형식과 장효진은 여야의 대표자였다. 그러나 그들의 권력이란 그저 자문위원 중 발언권이 조금 더 강한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인사권은 차원이 다른 권력이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먼저 다가와 허리를 숙이게끔 하는, 어떤 술법보다도 신묘한 권능이랄까.
이 권능을 받든 이상 공화국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 되었다고 보면 된다.
벌써부터 같은 위원끼리도 눈빛으로 줄을 서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욕망에 눈이 멀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최종 인사권은 내가 가지고 있다는 거.
투표가 치러지면 나는 선출된 권력이라는 강력한 명분을 얻게 된다. 그러면 2기 내각부터는 얼마든지 내 입맛대로 사람을 갈아치울 수가 있다. 설령 행정부를 크록 관료들로 채운들 찍소리도 못한다는 거지.
“그러면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외교권이나 국방권이 어디에 있을지도 명시해둬야 할 것 같은데, 발언할 분이 계십니까?”
김형식 교수가 손을 들었다.
“외교권은 대한민국 정부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는 양보를 해야 연방제가 구색을 갖출 수 있을 겝니다.”
“저도 위원장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김형식과 장효진의 의견이 최초로 일치했다. 두 사람의 변화된 입장이 확연히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그렇다면 국방권은요?”
“국방권은 외교권에 종속된 개념에 가깝습니다. 외교권을 넘긴다면 국방권 또한 넘어가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총독대행님, 발언권을 신청해도 되겠습니까.”
멀찍이 떨어져 않은 노년의 남성이 손을 들었다. 그는 홀로 군복을 입고 머리를 짧게 깎은, 무척이나 완고한 인상을 지녔다.
“예, 말씀하시죠.”
“김춘길입니다. 중장으로 퇴역했습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회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는 김형식 교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발언을 이어갔다.
“총독대행님, 국방권은 절대로 넘겨주시면 안 됩니다. 자주국방이 안 되는 나라는 나라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뻣뻣한 수염이 부들부들 떨렸다. 흡사 개항기를 맞이한 흥선대원군을 보는 듯했다.
그는 대체 어느 대목에서 자극을 받은 건지, 아직 세워지지도 않은 나라에 과몰입을 하는 중이었다.
물론 그의 발언 자체는 필요했다. 나 또한 순순히 국방권을 넘겨줄 생각이 없으니.
“일리가 있군요.”
내가 수긍하자, 박형식과 장효진의 안색이 눈에 띄게 불편해졌다. 그들은 돌아가서 협상을 해야 하는 당사자이니 이런 흐름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연방정부가 외교적인 판단하에 동원령을 내릴 수는 있다고 봅니다. 그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야겠지요. 그러나 구성국은 구성국대로 독립적으로 군대를 운용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차원에서 벌어지는 변수에 시의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허나...”
“일단 우리 입장은 이렇다고 정리를 하고, 가서 말씀을 잘 드려보세요.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조정을 하면 될 일이지요.”
“알겠습니다.”
김형식 교수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큰 것들은 정해졌군요. 다시 개요로 돌아가 보죠.”
나는 서류 몇 장을 휙휙 넘기며 빠르게 훑어보았다.
“국호나 국기는 당장 이 자리에서 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아이디어를 공모해서 시안을 제출해주시죠. 그리고 국화나 국장은.......이런 게 꼭 필요합니까?”
“반드시 필요합니다. 특히 국장은 나라를 상징하는 문양이기 때문에, 그게 없으면 공문서를 만들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도 시안을 만들어서 제출해주세요. 그리고 또.......”
나는 개요의 마지막 항에 도달해 손길을 멈추었다.
“문화예술계에서 오셨다는 분이 계셨지요?”
“예, 접니다.”
머리카락을 사자갈기처럼 기른 오십대 남성이 손을 들었다. 그는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밴드의 멤버였다고 들었다. 가슴털이 훤히 보이도록 풀어헤친 셔츠에서 자유로운 영혼이 느껴졌다.
“애국가, 만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맡겨만 주시죠.”
그가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한 가지 주문을 덧붙였다.
“단, 가사에 라힐님이 보우한다는 구절을 꼭 넣어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