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 진실의 추 (8) >
나는 발언 후 서류를 한 장 넘겼다. 목차 뒤로 이어지는 내용이 굉장히 본격적이었다. 서류가 이렇게까지 두꺼운 이유는 비전문가인 나를 배려했기 때문인 듯했다.
첫 항목은 국가를 구성하는 개요에 관한 것이었다.
“먼저 국호를 정하라는군요. 괜찮은 의견들이 있으십니까?”
“‘대한민국령 남에신’이 어떻습니까?”
“‘남에신 보호령’을 추천합니다.”
비슷비슷한 아이디어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무슨무슨령으로 시작하거나 무슨무슨령으로 끝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리라고 예상은 했었다. 애초에 속령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던 사람이 나였으니.
그러나 막상 후보군을 들어보니, 이름보다 더 시급한 의제가 있겠다 싶었다.
“김형식 위원장님.”
“예, 말씀하시지요.”
김형식 교수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총독부와 본국간에 권리 설정이 어떻게 됩니까? 왜, 입법권이니 사법권이니 하는 거 있잖습니까. 총독부는 어떤 권한을 가져가고, 본국에는 어떤 권한을 이양하게 됩니까? 그걸 알아야 우리가 정말로 속령에 불과한지, 아니면 속국이나 종속국인지 정체성이 나올 테고, 정체성이 나와야 이름도 지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좋은 지적이십니다만, 그걸 논하려면 먼저 총독이란 직위에 대한 개념부터 정립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총독이 어떤 자리인가를 정의한다면 나머지 문제들은 자동적으로 정리가 될 겝니다.”
“정의해두셨습니까?”
그가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가로저었다.
“부끄럽지만 아직 아무런 논의도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학문적으로만 접근할 수 없는 정무적인 사안이라, 총독대행께서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이런 일을 나 없이 정한다는 게 말이 안 되긴 했다.
나는 좌중을 둘러보며 의견을 구했다.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았기에.
“의견이 있으신 분은 자유롭게 말씀해주십시오.”
“장효진입니다.”
부위원장 장효진이 한 손을 들어 발언권을 신청했다.
나는 그녀에게 발언하라는 의미로 오른손을 내밀어보였다.
“저는 우선 한 가지를 못 박고 가고 싶습니다. 어디까지나 대통령께서 임명하는 임명직이니만큼, 총독의 권한도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따라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총독은 결코 종신직이어서는 안 되며, 연임이 불가능해야하고, 자격에 중대한 결여사항이 있을 경우 국회의 의결을 거쳐 파면이 가능해야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이었다. 여기저기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부위원장님, 대한민국과 총독령을 단순히 동일선상에 두시면 안 됩니다. 총독령은 대한민국을 지키는 방패입니다. 실제로 총독대행께서 전투를 치르시지도 않았습니까? 지금이 국난상황이라는 걸 간과하시는 겁니까?”
“총독령은 주춧돌부터 세워야하는 빈 터입니다. 수장을 자주 바꿔 정책의 연속성을 잃는다면 어떻게 주춧돌이 단단히 자리를 잡겠습니까!”
젊은 위원들이 격앙된 어조로 잇달아 발언했다. 반대쪽에서는 또 나름대로 반론이 나왔다.
지켜보고 있노라니 건준위는 정확히 두 패로 갈라져있는 듯했다.
여와 야.
이 안건은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이었다.
마치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소리처럼 당연하게 들린다만.
나는 일단 사람들을 진정시켜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마침 의사봉이 눈앞에 놓여있었다. 나는 나무망치를 들어 목판을 한 차례 강하게 내려쳤다.
타앙.
맹세코 나는 힘을 싣지 않았다.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그런데 몇몇 의원이 총이라도 맞은 듯이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회의실 분위기가 삽시간에 공동묘지를 방불케 할 정도로 썰렁해졌다.
아무래도 그들은 내 술법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듯했다. 인사기록부에 당당히 쓰인 전직 암살자란 이력도.
“어...정숙하세요. 발언권을 얻거든 발언해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장효진에게 물었다.
“하실 말씀이 더 있으십니까?”
“물론입니다.”
그녀가 당차게 대답했다. 그녀는 내게 전혀 기죽지 않은 듯했다.
“저도 현 시국이 국난상황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만, 민주주의의 대원칙은 균형과 견제입니다. 지금이 19세기도 아니고, 총독이라고 해서 주권자의 감시를 받지 말아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한 젊은 위원이 손을 번쩍 들었다. 아까 강하게 발언했던 친구였다.
“부위원장님, 저희가 지금 주권자의 감시를 피하자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시국의 엄중함을 아신다면서 연임조차 허락을 못하겠다는 건 지나치게 정치적인 노림수가 아닙니까.”
장효진이 가만있지 않았다. 그녀가 즉각 반박하자, 반대측에서는 발언권을 얻지 않았다며 항의했다. 서너 명이 동시에 소리를 높이자 회의장은 또다시 개판 오분전이 되고 말았다.
타앙.
나는 다시 한 번 의사봉을 두들겼다. 이미 머리가 지끈거려오고 있었다. 임기 하나를 가지고도 의견일치가 이렇게 안 돼서야 언제 이 두꺼운 서류를 다 논하겠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여러분 모두에게 충분한 발언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조바심 내지 마시고 품위를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회의는 살벌한 대립구도 속에 계속되었다. 나는 두 세력의 알력을 적당히 중재해가며 오가는 이야기들을 정리해보았다.
우선 야당은 내가 이 자리에 오래 앉아있길 원치 않았다.
반대로 여당은 내가 가급적 자리를 오래 지키기를 바랐다.
둘의 공통점이라면 언젠가는 내가 총독직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게 최선일까?
민주주의 국가에서 나고 자란 그들에겐 국민주권이라는 개념이 당연할지 모른다.
하지만 박병철 장관과 회담을 할 때 울토르가 얼마나 쾌속하게 의사결정을 내렸던가.
이쪽이 며칠 밤낮을 머리를 싸매서 가져간 걸 그는 단박에 담판을 지어버렸다.
울토르는 아바르의 계시를 받았다는 이유로 잘 싸우던 서부전선에서 군대를 물리기도 했다.
만약 그러한 결정이 국회의 비준을 거쳐야했다면, 과연 울토르가 제때 우리와 만날 수 있었을까?
“.......그 발언은 받아들일 수 없군요, 위원장님. 고인 물은 썩기 마련입니다.”
“물을 고아두자는 게 아니지 않소. 최소한 생태계가 자생할 수 있는 시간은 주자는 것이지요.”
“5년은 시간이 아닙니까?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신다면 저희 당은 총독 인선을 동의해드릴 수 없습니다.”
"그건 그냥 강짜가 아니오?”
회의는 점점 삼천포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이젠 날 인정할 수 있니 마니 이야기까지 나오는 듯했다.
나는 이쯤에서 다시 의사봉을 두들겨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타아앙...
의사봉 대가리가 떨어져 나가더니, 팽이처럼 회전하며 날아가 회의실 천장에 부딪혔다. 바닥으로 떨어진 의사봉은 북을 치듯 수십 번이나 요란스럽게 바닥을 두들긴 끝에 간신히 잠잠해졌다.
나는 이번만큼은 고의성이 없다고 주장할 수가 없었다.
물론 감정이 조금 실리긴 했으나, 이런 중요한 도구를 나무로 만든 제조사에게도 일말의 책임은 있지 않을까.
회의장 분위기는 이제 싸늘하다 못해 고드름이 돋아날 지경이었다.
“크흠, 흠.”
나는 어색하게 마이크 테스트를 한 후 발언했다.
“이런 식으로는 끝이 없을 것 같군요. 그러니 이렇게 하는 게 어떻습니까. 먼저 제가 여러분께 사안별로 안을 하나씩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그것을 받을지 말지를 따져보시고, 받지 못하겠다면 이유를 말씀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냉큼 대답한 건 야당쪽 대표인 장효진이었다. 그녀는 내가 제대로 된 안을 낼 리가 없다고 자신한 듯했다.
반대로 불안해지는 건 여당쪽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말실수를 해서 꼬투리를 잡히면 어떡하나 좌불안석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난 번듯한 학위도, 화려한 이력도 뭣도 없는 따라지란 말이지. 여야를 막론하고 그들에게 나란 인간은 돼지 잡는 백정과 흡사한 이미지일 것이다.
어느 정도는 맞는 소리였다.
내가 타인의 카르마를 읽으며, 진실과 거짓을 꿰뚫어본다는 걸 빼놓는다면.
그런 종류의 힘 앞에서는 학위나 이력이 무의미하다.
김형식 교수가 발언권을 신청했다.
“물론 총독대행께서도 좋은 안건이 많으실 겝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에게는 얼핏 지루할 이러한 의견수렴 과정이 민주주의에 절차적 정당성을 부여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건준위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을 해내야만 합니다. 설령 몇 년이 걸린다고 한들 충분한 시일을 두고 신중하게 치러져야만 하는 일입니다.”
걸렸다.
‘젊은이들에게는 얼핏 지루할.’
흘려들으면 아무것도 아닌 그 발언이 예의 속에 포장된 그의 진심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내겐 그들이 처음이고, 그들에겐 내가 처음이니.
잘 모른다면 여기서 알아 가면 되는 것이다.
“위원장님, 일단 제 안을 들어보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먼저 국가체제에 관한 건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속령이나 보호령 같은 부속국가를 염두에 두고 오셨을지 모르겠으나, 저는 우리에게 더 어울리는 제도는 연방제라고 생각합니다.”
“연방제라고요?”
“그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여, 야, 양쪽 모두 발칵 뒤집어졌다. 김형식 교수는 내가 드디어 사고를 쳤다며 머리를 감싸 쥐는 중이었다.
최소한 긍정적인 부분이 한 가지는 있었다. 그들이 진영논리를 떠나 대한민국의 이익을 우선하고 있기는 하다는 거.
나는 자치령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해주자는 의미로 연방제를 언급했다. 그러나 그래서는 본국인 대한민국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만다.
“에신은 여러분의 상상 이상으로 광대한 세계입니다. 우리 베이스캠프가 자리를 잡은 정글만 하더라도 아마존을 가뿐히 능가하는 규모입니다. 머릿속으로 한 번 그림을 그려보십시오. 남미대륙에 버금갈 광대한 열대우림이 오직 우리만의 것이라고. 이 자리에 얼마나 거대한 공동체가 들어설지 짐작이 되십니까?”
"......."
분위기가 조금은 가라앉았다.
그들이 여기 와서 접한 건 베이스캠프라는 한정된 세계가 전부였다. 그들은 아직 이 땅이 가진 가능성을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반면 대한민국의 영토는 고작해야 십만 제곱킬로미터 남짓이죠. 우리는 현실적으로 이곳에 들어설 공동체를 실효지배할 수 없습니다.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억지로 가능하게 만들려는 모든 시도가 불화의 씨앗이 되고 말 겁니다. 이미 많은 사례가 역사에 남았지 않습니까?”
“...동의합니다.”
누군가가 작게 발언했다. 역사학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거의 처음으로 입을 연 것 같았다.
“서로 상생할 수 있는 미래를 그려야합니다. 그게 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길입니다.”
나는 발언을 마무리했다. 장효진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방제로 간다고 칩시다. 총독대행께서 구상한 이곳 공동체의 지도자는 단임입니까, 연임입니까. 국회에서 소환 및 파면이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 점을 명확히 해주시면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건 제가 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요?”
“물론 여러분이 정하는 것도 아니죠. 공화국 정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지 않겠습니까? 이곳의 지도자는 이곳 사람들의 투표로 뽑혀야만합니다.”
“공화국이라고요?”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에 따라 세워지는 나라라면 당연히 공화국이 되어야겠지요. 대신 연방정부의 구성은 대한민국 내각을 중심으로 가면 됩니다.”
장효진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느 쪽이 이득인지를 따져보는 중일 것이다. 똑똑한 사람이니 그녀도 어렵잖게 내가 내린 결론에 도달하리라 예상되었다.
낯선 이계에서 되다만 시체들과 레슬링이나 하는 것보다, 대한민국에서 비서 수발을 받아가며 연방정부에 입신양명하는 게 훨씬 나은 일이라고.
“그러면.......투표권은 누가 가집니까?”
“대한민국과 큰 차이가 없겠죠. 현지에서 태어난, 교육을 받았고 분별력이 있는...”
나는 손가락을 꼽으며 조건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1세 이상의 모든 성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