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진실의 추 (5)
이졸데가 계단을 무작정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요른도 곰 같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기민한 동작으로 그녀의 뒤를 쫓았다.
나는 이미 그들보다 앞서가는 중이었다. 대피소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 그들을 떠올린다면 숨을 쉬는 시간조차 아깝게 느껴졌다.
곧 활짝 열린 북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얼마나 강한 힘이 작용한 것인지 뜯겨져 나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러나 우려했던 것과 달리 시체걸이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참상은 벌어지지 않았다.
크록 전사들이 장승처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입구를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흡사 분쇄기가 따로 없었다. 원형진 안으로 걸어 들어온 놈은 설령 부패의 전령이라 할지라도 여지없이 갈려나갔다.
“후우...”
나는 작게 안도하며 속도를 늦췄다.
크록 군대는 거의 무적의 존재처럼 보였다. 안 그래도 강한 개체들이 카룩카이와 다섯 장군의 지휘를 받으며 머리수 이상의 시너지를 발휘했다.
그나저나 기엔은 죽은 건가?
문짝을 뜯어냈다던 기엔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널브러진 시체 대열에 합류한 것 같지도 않았다.
곧이어 이졸데가 도착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며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기엔이 보이지 않는군요.”
“예, 이미 이곳을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멀리가진 못했을 겁니다. 아마도...”
그녀가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런 큰 영지에는 영주를 위한 대피용 시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자가 아직 생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그쪽 길을 열어서 적을 끌어들일 수도 있습니다.”
“위치를 알고 계십니까?”
“아니오. 그저 추정만 할 뿐입니다.”
이졸데의 말이 끝나자마자 도시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요른, 전사단을 두 갈래로 나눠라. 나는 동쪽, 너는 서쪽을 맡는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결단이 빨랐다. 그녀는 떠나가면서 내게 굳이 북문을 부탁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잃은 힘을 회복하면서 크록들이 무너지지 않는지 예의주시했다.
문득 시체걸이 두 놈이 내 뒤에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보다 훨씬 무거운 죄업도.
시체걸이들은 이졸데와 요른이 찾아내지 못한 다른 통로를 통해 들어온 듯했다. 나는 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하지만 나는 별다른 방어태세를 취하지 않았다. 놈들의 임자는 따로 있었다.
서걱.
두 놈의 머리가 콜라 뚜껑이 날아가듯 동시에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머리 잃은 몸뚱이는 몇 걸음 걷지 못하고 제풀에 쓰러지고 말았다.
건물 그림자 속에서 하얀 머리카락을 짧게 기른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검은 로브로 온 몸을 감싼 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검을 늘어뜨렸다.
“반갑다, 라힐.”
“우티르.”
얼마 전에 안부를 전해주었던 형제였다.
나는 씩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내가 다가가는 만큼 뒤로 물러섰다. 그는 코를 쥐며 장난스레 인상을 찡그렸다.
“너 냄새가 시체걸이보다 더 역한데. 그 사이 악취로 싸우는 술법이라도 익힌 거냐?”
“기왕이면 용맹의 훈장이라고 해다오.”
“나는 그런 훈장은 사양이다.”
“그나저나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나는 우르술라도 와주지 않았을까하는 일말의 기대를 담아 물어보았다.
“의뢰를 받았지. 겸사겸사 네 얼굴도 보고.”
“의뢰?”
“야즈란 귀족이 일본군 장교 머리 하나당 백만 바트를 주겠다는군.”
“...야즈가 말이지.”
“아는 사람이냐?”
“대충은.”
“그 사람이 워낙 크게 판을 벌려서 나 말고도 많이들 내려와 있다. 지금은 누가 마족놈들 모가지를 많이 따오나 내기중이다. 널 사모해 마지않는 테일리시도 왔으니 이따가 감격의 해후를 해보든가 해.”
그러고 보니 어느덧 포격이 멎어있었다.
현대식 군대와 암살자의 대결이라니.
현대의 군인이나 에신의 전사들이나 우두머리가 죽으면 무력화되는 건 마찬가지이나, 현대인들은 장교라고 해서 사병보다 더 강한 게 아니었다. 어린애 손목을 비틀고 돈을 가져가라니, 형제들 입장에서는 거저먹기나 마찬가지인 의뢰였다.
“테일리시는...”
“쉿.”
우티르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손을 들어 하늘 저편을 가리켰다.
“올 때가 됐다.”
나는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해가 졌기 때문에 어둑어둑한 하늘에는 구름 말고는 달리 눈에 띄는 게 없었다.
“그렇지.”
우티르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곧 구름을 뚫고 비익족의 대군이 나타났다. 시체걸이들이 땅을 뒤덮었다면 저들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비익족 부대는 잠시 후 성벽 너머에 착지했다. 고속기동을 위해 수송중이던 지상군을 내려놓는 중일 것이다.
저런 숫자의 비행전단에 지상군까지 합작한다면 잡병으로 이루어진 시체부대를 쓸어버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기도 아주 장관이구만. 네 덕에 남부로 내려와 있었기에 망정이지, 이런 의뢰를 놓쳤으면 섭섭할 뻔 했잖냐.”
“그러게 말이다.”
정기호가 결국 스트리아령을 하나로 만들었다. 그렇게나 귀찮은 일을 싫어하더니, 병력을 토해내라고 영주들의 멱살을 쥐고 흔들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럼 네 얼굴도 봤으니 나는 이만 가봐야겠다.”
“잠깐만.”
나는 떠나려는 우티르를 불러 세웠다.
“왜?”
“혹시 이 동네 비밀통로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냐?”
나는 유등이 켜진 너른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졸데의 말대로 이곳엔 오직 영주만을 위한 비밀스러운 시설이 존재했다. 규모도 장난이 아니었다. 거인의 사이즈에 맞춰 축성된 성이라 마음만 먹는다면 뭐든 우겨넣는 게 가능했다.
통로의 구조는 복잡하기 그지없었으나, 이질적인 죄업이 네비게이터처럼 내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인도했다.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을까.
먼 발치에서 누군가가 다투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나긴 복도가 끝나는 지점이었다.
복도 끝에 자리한 방은 대피소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만큼 호사스러웠다.
그리고 기엔이 방 안에 있었다. 그는 여느 부패의 전령처럼 살아있는 사람과 전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부분이 유난히 부자연스러운 것만 빼놓고는.
“더 이상 다가오지 마십시오!”
한 청년이 칼을 빼들고 위협적으로 외쳤다. 그는 기엔 영주를 본뜬 듯이 얼굴을 빼닮았다.
“왜 그러느냐, 아들아.”
기엔이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너는 내 적자다. 네가 없으면 내가 돌아온 의미도 없지 않겠느냐.”
청년이 격하게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아버지는 돌아오시지 말았어야합니다! 아버지께서 가르친 전사의 명예라는 게 흉신과 야합하는 것입니까? 자기가 일군 터전을 불태우고, 가족을 죽이는 것입니까?”
“너는 오해를 하고 있다.”
기엔이 목의 흉터를 매만지며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네 군주라는 자가 아비를 이렇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일이 너와는 아무 관련이 없을 것 같으냐. 너는 천년만년 그 사악한 계집의 기분을 거스르게 할 일이 없을 것 같으냐. 너도 언젠가는 나처럼 되고 만다, 반드시.”
청년은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기엔을 쏘아보았다.
“우리 가문은 오랜 세월 스트리아 가문을 섬겨왔다. 그러나 충성의 대가란 이렇게나 초라하다. 내겐 너를 지킬 군대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스트리아 가를 축출하고, 기엔 가의 이름을 천년만년 드높일, 우리 부자를 위한 군대!”
기엔이 오른손을 위로 높이 쳐들었다.
“당신은 어머니를 죽였습니다!”
“아들아, 나를 보아라. 죽음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친 것 같으냐? 나는 죽기 전보다 더욱 강해졌다, 더욱 완벽해졌다! 죽음이란 영원한 결속으로 향하는 관문에 불과하다. 너도 내 곁에 남으려면 그 관문을 넘어서야해.”
“.......당신은 미쳤습니다.”
“천만에. 너도 우리들 중 하나가 되면 자연히 깨닫게 될 것이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청년이 위협적으로 칼을 내밀었다. 그러나 칼끝의 떨림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나는 이쯤에서 인기척을 내보기로 했다.
“.......뭐냐.”
기엔이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살기를 일으키면서도 본능적으로 나를 경계했다.
“끼어들지 마라, 너는 조금 뒤 죽여줄 테니.”
“미안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기엔 영주.”
나는 대검을 꺼내 바닥에 내리찍었다.
“어서 도망치십시오! 이 자는 제가 어떻게 해보겠습니다!”
청년이 내 앞을 가로막으며 다급히 소리쳤다. 그런 실력이 있는가 여부는 둘째 치고, 용기만큼은 높이 살만했다. 남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설령 그가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하더라도.
나는 기엔을 상대하기 전, 먼저 청년에게 질문부터 던져보았다.
“네 이름이 뭐지?”
“라드입니다.”
“너는 대영주가 밉지 않나?”
라드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그는 나를 돌아보며 흔들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밉습니다.”
기엔이 가래 끓는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더 밉습니다. 아버지는 그릇된 이기심으로 많은 좋은 분들을 사지로 떠밀었습니다. 그분들은 부패의 에사인을 피하기 위해 제대로 매장될 권리조차 가지지 못했습니다. 이제 아버지가 죽음에서 돌아왔으니, 저는 아버지와 같은 성을 쓰는 것조차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라드!”
기엔이 벼락 같이 호통을 쳤다.
“모든 게 너를 위해서였다! 나 하나 잘되고자 했으면 그런 선택을 했겠느냐?”
“저를 위한다면 돌아오시지 말았어야합니다!”
“배은망덕한 놈! 약해빠진 놈! 네놈도 결국 나를 버린 그 년과 다를 바가 없구나!”
기엔이 광분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침착하게 쳐다보며, 라드의 어깨에 슬며시 손을 얹었다.
“라드, 마지막으로 하나 물으마.”
라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네 아버지를 다시 망각의 저편으로 보내드리려고 한다. 괜찮겠지?”
라드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는지 거듭해서 이를 악물었다. 아직 어린 그에게는 잔인한 질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그의 답이 필요했다. 나는 내 다음 일격이 자의적인 심판이 아니길 바랐다.
“.......부탁드립니다.”
마침내 그가 대답을 해냈다.
나는 바닥에 꽂아두었던 대검을 뽑아들었다.
“용서하지 않겠다,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
기엔이 무시무시한 고함을 내질렀다.
“참고로 세 번이다.”
“뭐가 말이죠?”
“네 아비가 거짓말을 한 횟수.”
나는 대검을 사선으로 늘어뜨렸다.
징벌의 일격은 망자에게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다른 술법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었다. 진실의 추를 통해 세 차례나 강화된, 초월적인 힘이 일찍이 닿지 못했던 경지로 나를 밀어 올렸다.
윙윙윙윙.
대검의 빛무리가 너무 강렬해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기엔은 내게 다가오지조차 못했다. 아직 검을 휘두르지도 않았는데도, 나는 마력의 압력만으로도 그를 밀어내고 있었다.
첫째, 아들을 위해 돌아왔다는 거짓말.
그는 그저 차기 부패의 전령이 될 후보자를 설득하고 있었을 뿐이다. 생전에는 아들을 사랑했을지 몰라도, 지금 그에게 남은 건 킬데인을 향한 충성만이 전부였다.
둘째, 스트리아 가문을 위한 군대를 일으켰다는 거짓말.
성벽 밖에서 만났던 부패의 전령도 기엔과 같은 말을 했었다. '우리들 중 하나'가 되면 깨닫게 될 것이라고.
그들은 그들 누군가를 위한 군대가 아니라 서로 동등한, 킬데인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피조물일 따름이었다.
셋째, 죽음으로서 완벽해졌다는 거짓말.
나는 발을 힘껏 앞으로 내딛었다. 증강된 마력을 견뎌내지 못하고 무릎이 뒤틀리고 있었다.
온 몸의 근육이 어서 힘을 해방시키라며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과 함께, 전력을 다해 대검을 올려쳤다.
시야가 닿는 곳까지, 존재하던 모든 물질이 두 쪽이 났다.
기엔, 그리고 자주포로도 무너뜨릴 수 없었던 성벽마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