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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52화 (52/205)

52화. 진실의 추 (4)

가서 거인을 막아야했다.

문이 뚫리느냐 마느냐에 십만 명의 생명이 달려있었다.

물론 괜히 나섰다가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몸을 사린다면, 훗날 에사인이 된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십만 명의 염원을 저버리고도 에사인이 될 수나 있을까?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첫걸음을 떼니 그 다음부터는 더욱 쉬웠다. 나는 바람을 가르며 두 다리를 쭉쭉 뻗었다.

등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기도는 머지않아 바람결에 묻혀 속삭임처럼 희미해지고 말았다.

쿠웅........

또다시 부활한 평지거인이 성문을 걷어찼다. 성문 틈이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수비대가 방패의 벽을 치고 문 앞에서 대기중이었으나, 성문이 열리는 순간 그들이 맞이할 운명이란 너무나도 뻔한 것이었다.

나는 몇 번의 도약만으로 성벽 계단을 단숨에 올라갔다.

성벽 위에서 내려다본 전장의 풍경은 그야말로 한 편의 지옥도였다. 시체걸이의 수는 세는 게 불가능했고, 망자가 뿜어내는 음기로 인해 대지는 잿빛으로 물들고 말았다.

그리고 거인.

거인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일반적인 평지거인보다 머리 하나쯤 더 큰 놈인 듯했다. 부패의 축복을 받은 증거로 놈의 몸 여기저기에 종기가 그득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도 위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전생에서도 나는 인간형 적이나 상대해봤지, 이런 얼토당토않은 괴물과는 마주칠 일 자체가 없었다.

“조준!”

이졸데의 목소리가 흔들리던 내 정신을 일깨워놓았다. 그녀는 지휘봉을 앞으로 뻗으며 매섭게 소리쳤다.

“사격!”

쉬쉬쉬쉭.

궁수들이 거인의 몸통에 일제사격을 개시했다.

궁수들은 화살촉에 마력을 담을 줄 아는 노련한 전사들이었다. 숙련된 전사가 쏜 화살은 총화기를 상회하는 위력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거인, 그것도 킬데인이 강화해놓은 거인을 쓰러뜨리기에는 화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대영주님.”

나는 이졸데를 부르며 다가갔다.

“저놈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화살을 아끼세요.”

그녀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대로 성문이 뚫리게 둘 순 없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라힐님을 믿겠습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들어라, 화살을 거인에게 낭비하지 마라!”

그녀는 내가 뭔가 해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기대하는 강력한 에사인이 아니라, 이제 갓 여정을 떠난 여행자일 뿐이었다. 거인에게 채이면 죽는 건 그들이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성문과 이어진 성벽 위로 이동했다. 여기서는 거인의 정수리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후우......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나서, 성벽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약 삼 초간의 자유낙하 후 나는 거인의 머리 위에 착지했다. 놈의 두피는 더럽다는 말로는 형용이 불가능했다. 온갖 종류의 포자식물이 썩은 세포를 양분삼아 자라나고 있었다.

거인은 내 존재를 전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나는 놈의 정수리로 이동해 양손대검을 역수로 쥐었다.

윙윙윙윙.......

대검이 마력을 토해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바라는 위력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시체걸이를 상대할 때부터 느꼈던 건데, 내 술법은 망자에겐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나는 죽은 자를 심판할 권리가 없다는 듯이.

그러나저러나 이제 와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나는 기합을 내지르며 놈의 머리통 안으로 대검 끄트머리를 쑤셔 넣었다.

빠드득.

대검이 두개골을 부수고 들어가 부패한 뇌 깊이 틀어박혔다. 벌어진 상처로부터 썩은 회백질이 수돗물이 역류하듯 뿜어져 나왔다.

뇌손상이 틀림없을 텐데도, 놈은 움찔거리지조차 않았다.

나는 대검을 풍차처럼 휘둘러 난도질을 시작했다.

피, 뇌수, 그 외 묘사하기조차 싫은 것들이 온 몸에 마구잡이로 엉겨 붙었다. 지금 가장 절실한 건 망자를 심판하는 능력이 아니라 후각을 마비시키는 술법이었다. 가능하다면 미각과 촉각까지도.

한참을 미친 듯이 날뛰고 있노라니, 거인은 더 버티지 못하고 고목이 넘어가듯 서서히 기울어갔다.

쿠우웅.

드디어 거인이 쓰러졌다.

나는 버려진 태반처럼, 썩다 만 유기물을 뒤집어쓴 채 땅에 내팽개쳐졌다.

“우와아아아아!”

위에서는 난리가 났다.

여기도 난리가 났다.

나는 얼굴에 묻은 오물들을 바득바득 닦아냈다.

그들은 내가 신묘한 스킬이라도 있어서 까마득히 높은 성벽 위로 훌쩍 날아오를 것이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안타깝지만 그렇지 않았다. 비익족처럼 날개라도 돋지 않아있지 않은 한은 나도 일개 땅개에 지나지 않는다. 거인보다 거인을 쓰러뜨린 후의 상황을 더 걱정했던 이유였다.

끄끄끄끄...

시체걸이들이 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시체걸이 따위는 내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나는 그들 너머 멀찍이, 음기가 가득 찬 안개 속에서 푸르스름한 안광을 내뿜으며 관망하는 존재들을 쳐다보았다.

부패의 전령.

그들은 주인인 킬데인만큼이나 알려진 바가 없었다. 확실한 건 그들은 시체걸이와는 급이 다른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만의 의지를 지녔고, 전생의 기억을 바탕으로 강력한 통솔력과 전투능력을 발휘했다. 오직 시체걸이의 수가 천 단위를 넘어서는 군집에서만 볼 수 있는 유니크한 개체였다.

끼에에엑!

시체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양손검을 수평으로 세워 횡으로 힘차게 휘둘렀다. 다섯 마리가 동시에 양분되어 땅에 널브러졌다.

이번에는 왼쪽으로.

다시 다섯 마리가 나가떨어졌다.

크록이나 인간이었다면 이쯤에서 겁을 집어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빌어먹을 시체들은 두려움이라는 걸 몰랐다.

반대로 나는 점점 두려움에 잠식되어갔다.

인정하기 싫지만, 내게도 두려움은 있다.

지금 상황이 내가 죽음을 맞이했던 상황과 놀랍도록 일치했다. 그때도 나는 개미떼같이 몰려드는 적들을 어쩌지 못하고 가랑비에 옷 젖듯이 약해져갔다.

여기서 죽으면 또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나는 몇 마리째일지 모를 놈을 베어 넘기며 자문했다.

슬슬 발밑이 거치적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뭉개버린 시체들이 쌓이고 쌓여 발 디딜 틈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나는 핏물로 끈적이는 검손잡이를 다잡았다. 아랫배에서 기운을 끌어올려 호통을 내질렀다.

“덤벼라, 자식들아!”

시체걸이들은 결코 사양하는 법이 없었다. 나도 사양하지 않고 놈들을 박살내주었다.

나는 거의 무아지경의 상태로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베어나갔다.

몇백인지 몇천인지 모를 숫자를 쓰러뜨리는 동안 내 검은 단 한 차례도 저지당하지 않았다.

마침내 검이 가로막혔을 때, 나는 성벽에서 상당히 떨어진 채였다.

“...훌륭하다.”

백발이 성성한 노년의 전사가 장검을 들어 내 검을 막고 있었다.

그는 보석 왕관을 썼으며,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호화로운 갑옷을 걸쳤다.

그는 얼핏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백태가 낀 것처럼 눈알이 온통 흰 것만을 빼놓고는.

그러나 나는 그가 생자가 아님을 직감했다. 모골이 송연한 음기가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삼천 년이란 세월이 흘렀건만 너희 황국은 언제나 좋은 전사들을 가지고 있구나.”

“누구십니까?”

“한때 나도 너와 같은 여정을 걷고 있었다고만 알아 두어라.”

노인이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우리들 중 하나가 되면 자연히 깨닫게 될 것이니.”

노인이 다짜고짜 검을 휘둘렀다. 나는 그의 간격 밖으로 잽싸게 물러났다.

멀찍이서 이졸데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목이 쉰 것으로 보아 한참 전부터 그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라힐님, 돌아오십시오!”

여부가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즉각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정도면 한 사람 몫은 하고도 남았다. 추가수당까지 요청이 가능한 부분이었다.

노인은 날 쫒지 않았다. 그를 대신하여 시체걸이들이 나섰다.

퍼억.

기다란 작살이 시체걸이 한 놈의 대가리를 꿰뚫으며 바닥에 꽂혔다.

작살에는 당길 수 있도록 사슬이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작살을 움켜쥐었다.

“절대 놓지 마십시오!”

성벽 위로 끌어당겨지면서, 나는 작살이 발리스타가 아니라 사람의 완력으로 던져진 거라는 걸 깨달았다. 큰망치 전사단 단장인 요른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낚시를 하듯 사슬을 당기고 있었다.

마침내 안전한 곳까지 건져진 나는 바닥을 짚고 숨부터 몰아쉬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요른이 건틀렛을 낀 손으로 내 등을 두들겼다. 나는 그가 맨손이었으면 그러지 못했을 거라고 장담했다. 그만큼 내 상태가 엉망이었다.

나는 성벽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일어서고 나서는 팔다리의 상태부터 확인해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컨디션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지칠 법도 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체력이 바닥을 칠 때마다 마른 행주를 쥐어짜듯 마력이 샘솟아났다. 지치고 싶어도 도대체가 지칠 수가 없었다.

“라힐님.”

이졸데가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허리춤에서 헝겊을 꺼내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다치셨습니다.”

나는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내가 피를 흘리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헝겊에 묻어나는 혈흔으로 보아 큰 상처는 아닌 듯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으셔서 큰 일이 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때는 제가 제정신이 아니라......”

나는 무안해서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지금도 쉬어있었다. 그녀는 이해한다는 듯이 엷게 미소를 지었다.

“다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더러워진 헝겊을 성벽 너머로 던져버렸다. 나는 머쓱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하니 대영주의 손수건에 신세를 지게 될 줄은 몰랐다.

“대, 대영주님!”

갑자기 누군가가 이졸데를 애타게 불렀다. 병사 한 명이 계단을 헐레벌떡 올라와 이졸데 앞에 납죽 엎드렸다.

“무슨 일이냐?”

병사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는 몸을 가누지도 못한 채 피를 토하듯 읍소했다.

“기엔 영주님이 돌아오셨습니다!”

“뭣이?”

이졸데가 그의 멱살을 쥐고 몸을 일으켰다.

“방금 뭐라고 했느냐?”

“기, 기엔 영주님이...”

“그래, 그걸 네 눈으로 직접 봤으렷다?”

“그렇습니다.”

이졸데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우리는 정기호가 기엔의 목을 날려버리는 걸 목격했었다. 그의 시신이 늪에 삼켜지는 모습도.

“그가 어디로 왔다는 거냐?”

“북문입니다.”

북문은 포위망이 가장 엷어 배치된 병력도 적었다. 이졸데가 한기가 서린 목소리로 병사에게 물었다.

“대답해라, 그놈에게 문을 열어주진 않았다고.”

“대, 대영주님...”

“대답해!”

“죄송합니다. 최대한 막아보려고 했습니다만, 기엔님의 힘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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