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진실의 추 (3)
“요른, 전사단을 성문 앞으로 집결시켜라!”
이졸데가 고함을 치며 수하들을 휘몰아 떠나갔다. 그녀는 어떻게든 이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해보려는 듯했다.
나는 카룩카이와 함께 자리에 남았다. 우리가 맡은 역할은 예비대였다. 후방에 대기하다가 급한 지역에 우선적으로 투입되는.
“저런 것들과 상대해본 적이 있다. 죽음을 거부한 부정한 존재들이다.”
카룩카이가 바람 새는 소리로 말했다.
“깊은 늪 속에서 끝없이 기어 나왔지. 마그나크록의 왕국을 축소시킨 것도 바로 저것들이다.”
크록은 고기만 충분하다면 일주일마다 두 배씩 늘어난다. 게다가 자원이 넘쳐나는 정글을 독차지하고 있으니 순리대로라면 그들이 남부의 패자가 되었어야만했다.
그러나 늪을 이웃하고 있다는 게 크록의 불운이었다.
킬데인.
부패의 에사인에 대해서는 많은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늪지를 좋아한다든가 시체를 일으킨다는 건 그의 극히 작은 일부일 뿐이었다.
설화에 따르자면 모든 망자는 죽음 앞에 서기 전에 그를 먼저 만난다고 한다.
그는 낡은 고깔모와 닳아빠진 넝마를 걸치고 나타나, 고름으로 얽은 손을 내밀며 망자에게 묻는다.
이대로 썩어가 망각의 심연으로 사라지겠느냐, 아니면 다시 한 번 산 자의 땅을 거닐어 보겠느냐.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았다.
“팁 같은 건 없어? 싸워본 입장에서.”
“지치지 말아야한다. 망자는 우리와 달리 지치지 않으니.”
카룩카이가 간략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살아있는 자를 더 조심해야한다.”
그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부패의 에사인을 따르는 대가로 영원한 생명을 손에 넣은 사제들, 전사들.
그들이야말로 적의 핵심전력이라는 뜻일 것이다.
쐐애애액.
마치 휘파람 소리를 천 배쯤 키워놓은 듯했다. 심장을 저미는 듯한 섬뜩한 소음과 함께 거주지구 외곽이 터져나갔다. 민가 다섯 채가 장난감처럼 허물어지며, 검은 연기가 하늘 위로 거세게 치솟았다.
“모두 대피해라!”
병사들이 목청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사람들은 사전에 훈련을 했던 대로 대피소를 향해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대피소란 별 게 아니었다. 마법사를 인원수대로 구역을 나눠 배치해둔 게 전부였다. 마법사가 방어마법을 전개하면, 가능한 한 많은 인원이 그 안에 구겨져 들어갔다.
각 씨족의 우두머리들이 방공호를 관리하는 일을 맡았고, 전사로서 훈련을 마치지 못한 소년과 소녀들이 입구를 방어했다.
콰콰콰쾅.
이번에는 착탄음이 몇 발이나 겹쳐서 들렸다. 피어나는 불꽃에 온 세상이 집어삼켜질 것만 같았다. 충분한 훈련을 몇 차례나 했는데도, 병사들은 패닉에 빠져 더듬이를 잃은 개미처럼 어쩔 줄을 몰랐다.
“우리도 가자, 카룩카이.”
나는 카룩카이와 함께 크록 전사단을 대기시켜둔 광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도 순탄치 않았다. 갈가리 찢겨진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카둔의 축성을 받은 성문이나 성벽은 포격으로도 어찌할 수가 없었으나, 그 외의 지역은 마법사가 보호하지 않는 한 무방비상태나 마찬가지였다.
크록 전사들은 완전무장을 갖춘 채 광장 한가운데에 도열해있었다.
그들은 세상이 불타고 있는데도 눈곱만큼도 동요치 않았다. 그들에게 세상이란 내 존재만이 전부였다.
“전사들이여!”
나는 목소리에 마력을 담아 그들을 불렀다. 그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내게 집중했다.
그들의 침묵은 자못 경건하기까지 했다. 그들에게 내 발언은 한 마디 한 마디가 계시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그들이 부담스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한가로운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복부에 힘을 잔뜩 넣어 광장이 떠나가도록 큰 목소리로 외쳤다.
“가서 죽음을 거스른 죄인들을 심판하라!”
텅, 텅, 텅.......
전사들이 가슴팍을 주먹으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은 광기로 인해 벌겋게 물들어갔다.
카룩카이의 신호를 받아 다섯 명의 장군들이 앞으로 나섰다. 장군들은 나와 신성한 계약을 맺은 후로 더욱 강력해졌다. 그들의 무기는 넘쳐나는 마력을 주체하지 못하고 터질 듯이 진동하고 있었다.
“출발하라.”
카룩카이가 명령을 내리자, 오백인의 전사들이 한 몸이 된 듯이 동시에 걸음을 떼었다. 전사들의 보보마다 중장갑이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나는 남쪽으로 전사단을 인솔해갔다. 현재 가장 위태로운 곳이 남문이었다. 포격이 집중되고 있는 지점도 남쪽이었다.
그러나 남문이 가까워질수록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다. 남문 근방의 어딘가에서 이질적인 죄업이 느껴졌다. 죄업의 크기가 아닌 질적인 문제였다. 그것은 분명히 죄업이었으나, 내가 심판할 수 없는 종류라고 여겨졌다.
“라힐.”
카룩카이가 나를 불렀다. 그도 나의 대사제로서 같은 걸 느끼고 있는 듯했다.
“카룩카이, 방향을 튼다. 왼쪽으로 가자.”
“알겠다.”
우리는 즉시 행군방향을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대피소를 하나 찾아냈다.
마법사 다섯 명이 반구형의 방어마법을 유지중이었다. 반구의 지름은 약 백 미터가 넘었다. 그 백 미터 안에 콩나물시루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밀집해있었다.
“아직 늦지 않은 것 같군.”
카룩카이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피소 앞에 시체걸이가 수십 마리나 서성이는 중이었다. 새파랗게 어린 소년소녀들이 검을 쥔 채 필사적인 저항을 벌이고 있었다.
“어이!”
나는 놈들이 소리에 반응한다는 걸 떠올렸다.
“이쪽이다, 이 못생긴 것들아!”
캬아아악!
놈들은 기괴하게 고개를 꺾으며 몸을 틀더니, 대가리를 앞으로 빼고 물소처럼 맹렬하게 짓쳐들었다. 놈들의 돌격력은 앞서 익히 본 바였다.
크록 전사들이 송곳니가 촘촘한 주둥아리를 벌리며 마중을 나섰다. 잠시 후 벌어진 일은 그야말로 일방적인 도륙이었다. 전사들은 무기조차 쓰지 않았다. 시체걸이의 양어깨를 맨손으로 붙들어 좌우로 찢어버렸다.
크륵, 크르륵.......
전사들은 찢어진 몸뚱이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눈 깜짝할 사이 시체걸이 수십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렸다. 하는 짓만 보자면 어느 쪽이 흉신의 하수인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나는 전사들을 지나쳐 대피소를 향해 다가갔다.
소년소녀들이 검을 늘어뜨리며 토끼처럼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잔뜩 확장된 동공에 극심한 스트레스의 잔상이 남아있었다. 그들은 방금 전 문자 그대로 죽음과 마주했었다.
“잘 버텨주었다.”
나는 소년소녀들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그들의 용기가 아니었다면 마법사는 방어마법을 잠시 내리는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폭탄이 날아든다면 눈 뜨고 보기 힘든 참상이 벌어졌을 것이다.
“우에엥.......”
소녀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내게 엉겨 붙었다. 소년들은 힘 풀린 다리로 풀썩 주저앉거나, 크록 전사들을 신기한 눈초리로 구경했다.
“카룩카이.”
“불렀느냐.”
“전사들을 다섯 갈래로 나눠. 도시를 한 바퀴 돌고 와라.”
“알겠다.”
이곳에만 시체걸이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떤 경위에서든지 후방이 뚫린 것만큼은 분명했다.
카룩카이와 다섯 장군들이 흩어지자, 군중 속에서 사제복을 입은 노파가 나타났다. 아바르의 사제인 니피였다.
“역시 와주셨군요, 라힐님.”
그녀는 이 난리통에도 불구하고 평온한 표정이었다. 세상을 살 만큼 살아서 달관한 것인지, 아니면 이마저도 운명의 에사인인 아바르의 예측범주 내인 것인지.
“어디서 온 놈들인지 아시겠습니까?”
나는 그녀에게 시체걸이의 출처부터 물어보았다.
“사람들의 말로는 땅을 뚫고 나타났다고 합니다. 마치 오늘만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렇습니까.”
몇 가지 그림이 그려졌다. 일본군이 전투준비를 하는 동안 킬데인은 추종자를 시켜 도시 안에 몰래 시체를 매장해왔던 듯했다. 충분한 전력의 예비대가 없다면 당할 수밖에 없는 작전이었다.
“저기, 라힐님.”
한 소녀가 내 소매깃을 잡았다. 나는 소녀가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 있도록 미소를 지어주었다.
“무슨 일이니?”
“저기 보세요.......”
소녀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남쪽을 가리켰다.
“응?”
나는 손가락을 따라 남쪽을 살펴보았다. 높다랗게 솟은 성벽과 화살을 퍼붓고 있는 수비대, 성문이 열리지 않도록 버티는 평지거인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집중해본다면 금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수성을 진두지휘하는 이졸데도 식별이 가능했다.
그게 전부였다, 소녀가 겁을 낼만한 존재는 아무것도 없었다. 제아무리 많은 병력을 데려왔더라도, 성문이 굳건한 이상 적은 우리에게 위해를 끼치지 못했다.
그때였다.
쿠웅.......
무겁고 둔탁한 충격음이 고막을 흔들어놓았다. 크고 작은 소음이 수없이 생겨나는 전장이라지만, 그 소리만큼은 무언가 질적으로 달랐다. 그것은 현대식 무기를 감안하더라도 우리가 예상 가능한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 물리력을 담고 있었다.
“저, 저쪽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기겁하여 소리쳤다. 이제는 남쪽을 가리키는 게 소녀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곧 나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을 발견해냈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성벽의 끄트머리에 기둥 같은 살덩이가 삐져나와있었다. 종기와 고름에 뒤덮인, 어마어마하게 큰 손이었다.
“...거인이로군요.”
나는 침이 말라가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저것은 평지거인이었다.
킬데인에 의해 되살아난.
쿠웅.......
다시 한 번 충격음이 들렸다. 지반이 들썩이는 바람에 몇몇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사람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나도 목구멍이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성문은 결코 이렇게 빨리 열려서는 안 됐다. 이러면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틴다는 선택지가 사라지고, 죽을 때까지 전원 옥쇄하는 길만이 남고 만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나가서 거인을 요격해야 하나?
그러나 나는 아직도 힘이 전부 돌아오지 않았다. 신도 수가 모자란 탓에 마력의 회복이 너무나도 더뎠다.
“아바르시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사람들이 니피의 발밑에 넙죽 엎드리기 시작했다. 니피는 노구를 지팡이에 기댄 채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모든 희망이 사라질 때, 인간은 기적에 매달리게 된다.
오직 현실을 넘어선 초현실만이 이들을 구할 수 있었다.
에신은 그것이 가능한 세상이었다. 그러나 아바르는 이곳에 없었다. 기도가 아무리 간절하다한들 몇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까지 닿을 리 만무했다.
쿠웅.......
성문이 또다시 들썩였다. 성문 중앙에 새겨진 카둔의 인장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우그러들었다. 가느다랗게 벌어진 틈으로 시체걸이들이 팔을 집어넣어 노를 젓듯이 휘저었다.
시민들은 얼굴을 감싸며 절규했다. 답이 없는 이름을 소리 높이 부르짖었다.
“.......기엔의 선량한 시민들이여.”
니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목소리에 아무런 마력도 불어넣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음성은 포화를 뚫고 구석구석으로 신기하리만치 또렷하게 퍼져나갔다.
사람들이 기도를 멈추며 고개를 들었다. 길을 잃은 수천 쌍의 눈동자가 그녀에게로 모여들었다. 그녀는 그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바르님이 아닙니다. 라힐님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불현듯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깨달았다. 크록들에게 계시가 내려졌듯이, 나도 이 순간 어떤 계시가 임한 게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