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진실의 추 (2)
어째서 그녀는 자신이 정기호를 암살했다고 거짓주장을 한 걸까.
그녀는 대영주였다. 누구도 그녀를 겁박할 순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가면을 쓴 것일지도 몰랐다.
황국의 법은 엄격하기 그지없었다. 대영주나 대영주의 직계를 암살한 죄는 극형으로 다루어졌다.
게다가 일단 기소가 된다면 여섯 번째 권능인 심판자 그니르의 힘에 의해 진실이 백일하에 가려지게 된다.
감히 대영주를 법정에 세울 만큼 간 큰 자는 없을 테니, 그녀가 자리를 유지하는 한은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굽니까?”
이졸데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용의자가 많지는 않겠군요. 당신이 자신의 명예를 더럽혀서까지 지키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합니까?”
그녀가 원망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죄송하지만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그 망나니가 이번 생은 똑바로 살았나봅니다.”
그녀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웃음은 머지않아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녀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이 입술을 벌리다가, 그만 고개를 가로젓고 말았다.
“역시 안 되겠습니다. 아직은 제가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게 끝나고 나서 스트리아가 안녕을 찾는다면, 그때는 제가 먼저 그에게 진실을 털어놓겠습니다.”
그녀는 내게 유예를 달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그녀는 신체적인 고통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한계에 내몰린 상태였다.
더군다나 그녀가 밝힐 진실은 필시 스트리아 가문의 더러운 치부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영지에 얼마나 더한 혼란이 찾아올지 몰랐다. 일에 순서라는 게 있다면, 영지를 방어하는 게 우선인 건 옳았다.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편히 쉬시길.”
나는 문을 닫고 복도로 빠져나왔다.
정기호는 내가 침실로 들어가기 전 그대로의 자세로 서있었다. 그는 내가 나오자마자 무뚝뚝한 투로 물었다.
“뭐라더냐?”
“널더러 망나니라던데.”
정기호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졌다. 그는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말했다.
“역시 아니었다는 거냐.”
그는 곧장 결론으로 건너뛰었다.
찰떡같이 알아듣는 것도 정도가 있지,
“전쟁이 끝나면 말해주겠다더라.”
“그렇다면 전쟁을 빨리 끝내야겠군.”
“어떻게?”
“...며칠 자리를 비우겠다.”
그가 어디론가 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앞서서 중대한 결심을 고민할 때보다 훨씬 진지한 얼굴이었다. 잠시 후, 그가 사라진 방향에서 하얀 새가 깃털을 휘날리며 어두운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나는 정기호가 떠난 동안 도시를 방비할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무얼 하러 내 곁을 떠났는지는 모르겠으나, 도시가 넘어간다면 그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나는 크록 전사들과 함께 성벽을 보강하거나 포격을 대비한 방공호를 파는 등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일본은 예측대로 사나흘 동안은 아무런 도발이 없었다. 그러나 정찰병들로부터는 흉흉한 소문만 잇따라 들어왔다.
함락된 도시에서 생존자가 발견되지 않았다던가, 늪지대에 엄청난 병력이 집결중이라던가.
일본은 두 명의 에사인이 지키는 거점조차 날려버릴 군대를 모으고 있다는 듯했다.
나로서는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의문이었다. 일본도 대외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를 자처하는 입장이었다. 자위대 병력을 끌어오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터였다.
그러나 설령 그들에게 대단찮은 병력이 없다하더라도, 기엔 영지는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였다.
“보이십니까?”
이졸데가 오른손에 쥔 지휘봉으로 들판을 가리켰다.
들판은 마치 묘지 같았다. 징벌용 말뚝이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이 꽂혀있었다.
그리고 말뚝의 묘지 사이를 넝마를 걸친 괴인들이 방황하는 중이었다. 괴인들은 얼핏 멀쩡한 듯 싶기도 했으나, 자세히 관찰해보면 몸 군데군데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커다란 결손이 엿보였다.
“최근 들어 시체걸이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불어나는 중입니다. 너무 많은 전쟁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탓에 부패의 에사인이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시체걸이는 에신의 골칫거리였다. 평시에도 그랬을진대, 지금 같은 세기말에는 얼마나 기승을 부려댈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근처에 큰 군집이 있는 것 같군요.”
이졸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일본보다 그들이 더 무서운 적일지도 모릅니다. 기엔은 이미 몇 차례나 시체걸이 무리와 교전했습니다. 매번 성문을 열고 나가 맞서 싸운 탓에 막대한 손실을 입고 말았죠.”
그녀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는 며칠 쉬더니 그 이전보다도 더 팔팔해져서 돌아왔다. 충만한 마력과 각종 약재의 힘이었다.
정신적으로도, 그녀는 언제 나약해진 적이 있었냐는 듯이 특유의 카리스마를 되찾았다.
당장 정기호가 곁에 없어서 그런 여유가 나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만.
땅땅땅땅.
별안간 망루와 종탑에서 시끄러운 놋쇠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초병이 헐레벌떡 달려와 이졸데에게 보고를 올렸다.
“대영주님, 지원군이 도착했습니다! 북문입니다!”
“앞장서거라.”
이졸데가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북쪽 성벽으로 향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가기 전에 들판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았다. 시체걸이들도 소음에 반응하여 뻣뻣한 다리를 어기적대며 움직이는 중이었다.
약 이천 명 가량의 전사들이 스트리아 성시의 깃발을 휘날리며 북문을 향해 다가오는 중이었다.
스트리아 시는 대영주의 직할령이었다. 비유를 하자면 도청소재지쯤 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방 소도시들의 상황이 워낙 위태로웠기 때문에, 이졸데는 그간 날아다니는 탈것을 타고 순시를 다녔다. 지금 보이는 부대는 육로를 따라 이동했던 그녀의 직속 전사단이었다.
“아, 마침내.”
이졸데가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뿌듯한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저들이 바로 그녀의 최대지지 세력일 터였다.
“성문을 열어라!”
그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지시했다.
득득득득......
평지거인이 성문턱을 움켜쥐고 용을 쓰기 시작했다. 수비병들은 장교의 지시를 따라 성문 뒤에 방패의 벽을 형성했다. 이윽고 문틈이 사람 허리 너비만큼 벌어지자, 성문밖에 잠복해있던 시체걸이들이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물러서지 마라!”
장교들이 사납게 호통을 쳤다. 병사들은 뒷발을 단단히 세워 충격을 대비했다.
키야야약!
시체들이 견고한 방패의 벽에 몸통박치기를 시도했다. 마치 파도가 출렁이는 것만 같았다. 무지막지한 돌격력을 견뎌내지 못하고 방패의 벽이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때 나선 게 장교들이었다. 그들은 2선에서 튀어나가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양손둔기를 흉포하게 휘둘러댔다. 잘린 팔다리가 날아다니고, 뭉개진 몸뚱이가 겹겹이 포개어졌다.
“남김없이 쳐 죽여라!”
“이야아아아!”
승기를 잡은 전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그들은 장교들의 분전에 힘입어 시체들을 하나하나 쓰러뜨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체걸이들은 모조리 소탕되었다. 수비병력의 피해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윽고 열린 성문으로 지원군이 입성하기 시작했다. 웃통을 벗어젖힌 채 거대한 전투망치를 쥔 전사들이 열을 맞춰 들어섰다.
큰망치 전사단.
변방에서 이름이 드높은, 스트리아 가문 직속 전사단이다.
그들은 방어구를 전혀 착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용맹의 에사인인 다가트와 신성한 맹약을 맺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옷을 헐벗을수록, 위험에 노출될수록 공격력과 방어력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요른!”
이졸데가 전사단의 선두에 선 곰 같은 사내를 호출했다. 요른이라 불린 자는 그녀를 일별하더니, 느릿한 걸음걸이로 성벽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제가 가장 신뢰하는 전사입니다.”
이졸데가 탐탁찮아하며 덧붙였다.
“그 망나니와는 호적수였죠.”
서늘한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웠다. 요른의 상체가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그는 크록 전사와도 맞먹을 엄청난 거한이었다. 빡빡 밀어버린 두상에는 다가트의 심벌과 경구가 문신처럼 가득 새겨져있었다.
“안녕하시오.”
요른이 내게 고개를 까딱였다.
“반갑습니다, 라힐입니다.”
“내 여주인께서 따로 소개를 해주시는 것을 보면 당신은 대단한 인물이 틀림없겠구려.”
“이분께 잘 보이는 게 좋을 것이다, 요른. 새로운 시대의 에사인이 되실 귀한 분이시다.”
“이분이.......에사인이 된다는 말입니까?”
그가 부리부리한 고리눈을 홉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되물었다. 이졸데를 대신하여 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직 여정중일 뿐입니다.”
“오오, 믿을 수가 없군요. 내 평생 새로운 에사인의 탄생을 보게 될 줄이야!”
요른은 연신 감탄하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호랑이 같던 고리눈은 다시 보니 순박하기가 강아지가 따로 없었다.
“벌써 놀라면 곤란하다, 요른.”
이졸데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그에게 카룩카이를 소개할 생각에 가슴이 부푼 듯했다.
날이 저물었다. 큰망치 전사단원들이 여독을 푸는 동안 나와 카룩카이, 이졸데, 요른은 회의를 거듭했다. 회의는 적은 병력으로 어떻게 마족 군대를 상대하느냐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도시를 사수해야합니다. 결코 적의 주술구에 아군을 노출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졸데는 여전히 무대응의 원칙을 고수했다. 도시가 불바다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적을 안으로 끌어들여야한다는 것이다.
요른은 심플했다, 그는 이졸데의 모든 말에 반사적으로 맞장구를 치는 중이었다.
카룩카이는 아직 이쪽 세계에 대해 배워야할 게 많은 탓에, 이졸데의 의견을 검증하는 건 오롯이 내 몫이었다.
“적이 우리를 포위해서 말려죽이면 어떡합니까?”
나는 지극히 상식적인 반론을 제기했다. 포위를 당하면 굶주리게 된다. 역사에 기록된 대부분의 공성전은 굶주림 때문에 변변찮은 전투 없이 끝났다지 않나.
“그때는 포탈을 열어서 물자를 보급하면 됩니다. 마법사들이 전력외가 되고 말겠지만,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성문이 버텨줄까요?”
“성문은 카둔의 사제가 축성한 물건입니다. 성벽보다 훨씬 단단한데다 무겁기 그지없어서 거인이라도 데려오지 않는 한은 결코 부수거나 열 수 없습니다.”
이졸데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잘 방비된 도시를 함락시킨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러 이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말의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다른 도시들이 어떻게 함락되는가하는.
정찰병들은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만을 보고했을 뿐이었다. 생존자가 아무도 없었기에 유의미한 데이터를 뽑아낼 수도 없었다.
그때였다.
땡땡땡땡땡.
종지기가 미친 듯이 종을 쳐대기 시작했다. 낮에 지원군을 환영하기 위해 쳤을 때와는 템포가 확연히 달랐다.
나와 이졸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요른은 여주인을 따라 엉거주춤 엉덩이를 떼었고, 카룩카이는 애초부터 앉을만한 의자가 없었기에 일어설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서둘러 성을 빠져나왔다. 병사들이 엉덩이에 불이 붙은 망아지처럼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곧 장교 한 명이 사색이 된 채 달려와 이졸데 앞에 엎드렸다.
“대영주님, 저, 적의 대군이 나타났습니다!”
“어디냐?”
이졸데가 침착하게 물었다.
“남쪽입니다!”
“가시죠.”
우리는 잰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나 적의 규모를 확인하는 데엔 남쪽 성벽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다가트시여.......”
요른이 망치를 꽉 쥐며 용맹의 에사인의 이름을 주워섬겼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성벽 너머를 노려보았다. 장교가 말했던 대군이란 표현엔 부족함이 있었다. 이것은 대군을 초월한 무엇이었다. 남쪽 늪지대에서 몰려온 거대한 물결이 동서로 도시를 포위해가는 중이었다.
흡사 양탄자라도 깔리는 것만 같았다. 너무나도 엄청난 병력이라 숫자가 아닌 면적으로 가늠을 해야 할 지경이었다.
“비켜라.”
이졸데가 관측병을 뒤로 물렸다. 그녀가 구형 망원경으로 전방을 살피는 동안, 나는 쌍안경을 꺼내 배율을 조절했다. 곧 불어터진 시체들이 동그란 렌즈 안을 가득 채웠다.
저들은 시체걸이였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었다.
욱일기를 꽂은 수송트럭들이 헤드라이트를 켠 채 열병식을 하듯 도열하고 있었다. 박격포와 견인포, 전차, 보병용 장갑차, 장교용 지프차도 보였다. 이쪽의 물량도 족히 사단급에 견줄 만했다.
.......좀비와 기계화군대의 합작이라니.
일본은 다르마알을 대체할 흉신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본국에서 군대를 무한정 빼낼 수 없는 한 에사인과 협력관계를 맺는 건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그게 하필이면 부패의 에사인일 줄은 몰랐다.
기엔을 쫓아 들어갔던 늪지대가 떠올랐다. 수면 아래에 물고기와 함께 숱한 시체들이 도사리고 있었던.
그것이 바로 부패의 에사인, 킬데인의 군대였다. 망자의 대군을 숨기는 데엔 늪만 한 곳이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