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진실의 추 (1)
나는 정기호와 함께 약 백여 명의 패잔병들을 모아 기엔의 영지로 돌아왔다. 잔병들은 늪 속에 엎드려 시체로 위장하거나, 덤불이나 나무 위에 기어 올라가 숨는 등 갖은 방법으로 죽음을 모면했다. 그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기엔이 자신들을 사지로 내몰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우리는 성문을 통과하자마자 영지민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들이 가장 처음 물어본 것은 영주의 행방이었다.
“기엔 영주는 군령을 어긴 죄로 처형되었다.”
정기호가 의식을 잃은 이졸데를 대신하여 대답했다. 영지민들의 반응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흉흉했다. 기엔의 친족으로 보이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영주에게 애도를 표하지 않았다.
대영주와 영주의 대립은 영주가 멋대로 군대를 이끌고 뛰쳐나갔을 때부터 예상되었다. 그것이 전공으로 이어졌으면 모르되, 잘못된 판단으로 전사단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고 말았으니 처형을 당했다고 하여 하등 억울할 일이 아니었다.
“흐흑.......흐흐흑........”
비보를 접한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아바르의 사제 니피가 백발이 성성한 노구를 이끌고 나서 전사자들의 넋을 달랬다.
나는 카룩카이의 모습도 발견했다. 그는 신기에 가까운 바느질 솜씨로 급조된 특대형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기다란 꼬리 끝에 꼬맹이들을 한 다스나 달고 다니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크록을 무서워하는 듯했지만, 개구진 아이들은 낯선 것을 호기심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보기 좋네, 카룩카이.”
“이 어린아이라는 것들은 상당히.......활발하군.”
카룩카이가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이들은 그의 몸을 부지런히 기어올랐다.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고생해.”
“이런 행동에도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당연하지. 여기 사람들은 너희가 아이를 안 잡아먹는다는 걸 알아둘 필요가 있거든.”
나는 그의 허리를 두들겨준 후 성으로 향했다.
시중인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실려 온 대영주 때문에 난리가 났다. 가뜩이나 이곳은 대영주의 직속 영지가 아니기 때문에 수발을 드는 부담이 훨씬 컸다.
나는 정기호와 함께 이졸데의 침실 문을 지켰다. 겉으로 내세운 이유는 경호였으나, 우리는 곧 대화가 필요해지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정기호는 한동안 말없이 창문 너머를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그쪽 방향으로 보이는 건 성벽뿐이었다. 언제 적의 공세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만큼 횃불을 든 초병들이 부지런히 성벽 위를 오가는 중이었다.
“라힐.”
그가 고개를 슬쩍 돌리며 나를 불렀다.
“안 가봐도 되냐?”
그는 어디인지 말하지 않았으나, 나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어차피 오늘 밤엔 별일 없다.”
“뭘 믿고 장담하냐.”
“메시지를 남겨놨거든. 함부로 덤비지 말라고.”
도시는 텅 빈 공동이나 마찬가지였다.
빈집털이를 한다면 지금이 기회였으나, 일본은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료헤이가 그 꼬락서니로 당한데다가 에사인이 둘이나 있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그렇군.”
정기호가 다시 바깥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침묵은 시녀장이 침실 문을 나설 때까지 계속되었다.
“대영주님께서 정신을 차리셨습니다.”
“가자.”
정기호가 내게 손짓했다.
시녀들이 시녀장의 지시를 따라 분분히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녀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센서로 연결되어있는 것만 같았다. 기엔이 죽고 대영주가 쓰러진 지금, 모든 이가 도시의 운명이 우리에게 달렸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너른 침대 한가운데에 이졸데가 누워있었다. 그녀는 상체만을 일으킨 채 우리를 바라보았다. 안면을 익힌 사이라 할 순 없었으나, 갑옷 차림이 아닌 그녀를 보는 게 낯설었다.
그녀의 부상은 치명적이었다. 아무리 주술적인 처치를 받았다고 해도, 지금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순전히 그녀의 의지력이라고 보아야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땀에 절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담쟁이처럼 엉겨 붙어 있었다.
“야즈, 맞지?”
이졸데가 힘없이 물었다.
정기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죽었던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살아 돌아온다던데, 하필 그중 하나가 너일 줄이야.”
그녀는 오빠의 생환을 반기는 기색이 전혀 아니었다. 둘 사이에서 벌어졌던 일을 고려한다면 당연할 것이다.
“왜 왔어. 대영주 자리를 넘겨받고 싶어서?”
“그렇다고 한다면 어쩔 테냐.”
“차라리 죽여.”
이졸데가 턱을 위로 쳐들며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하나뿐이다.”
정기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뭔데?”
“네가 날 죽이라고 지시했냐?”
정기호는 외교부 청사 지하에서 나와 싸울 때, 암살자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드러냈었다.
그는 비열한 방법으로 살해됐음에 분명했다. 그러나 암살자는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 도구를 휘두른 자야말로 그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할 자였다.
하지만 정기호의 죽음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이졸데였다. 그녀 말고는 다른 범인이 존재할 수가 없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흉수라고 확신하기에 스트리아령은 사분오열되고 말았다.
“그래, 내가 시켰어.”
호박빛 눈동자가 정기호를 빤히 응시했다. 정기호는 남의 일을 묻듯 무덤덤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왜 그랬지?”
“넌 자격이 없었으니까. 네가 우리를 파멸시키고 있었으니까.”
“그것으론 답이 되지 않는다. 왜 그랬지?”
“그야 내가 대영주가 되고 싶었으니까!”
이졸데가 한층 언성을 높였다.
“왜 다시 태어나면서까지 유난을 떨어. 우리가 단 한 번이라도 남매 같았던 적이 있었어? 우리 같은 사람들이 오데르의 검을 사는 게 하루이틀인가? 우린 스트리아의 자식들이잖아,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뺏어서라도 쟁취하는 게 당연하지.”
“...알았다.”
정기호가 턱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나가자는 신호였다.
우리는 문을 닫으며 침실을 빠져나왔다. 침실을 빠져나오자마자 정기호가 꺼질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 이제 거의 다 왔다.”
“거의 다 오다니, 어디에?”
“.......”
정기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가 중대한 결심을 앞두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그가 내릴 수 있는 결심이란 두 가지뿐이었다. 이졸데를 죽이거나, 전생과 연을 완전히 끊어버리던가.
후자의 경우에는 프로젝트에서 이탈해버릴 수도 있었다. 둘 중 어느 쪽이건 그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이졸데가 암살을 인정한 게 그에게 일종의 방아쇠로 작용했던 게 틀림없었다.
“...잠시만 기다려봐.”
“뭘 말이냐?”
그가 무성의하게 되물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어 내게로 돌려세우며 말했다.
“진실의 추라는 술법이 있어. 거짓말을 하면 발동하는 술법이지.”
“진실이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냐. 본인이 인정을 했는데.”
“닥치고 기다려봐.”
나는 정기호의 가슴을 툭 쳤다. 나는 그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아 정기호에게 손가락질로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내가 나올 때까지 꼼짝 말고 여기 있어라.”
나는 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졸데는 나를 발견하더니 소매로 눈가를 스윽 훔쳤다.
그녀는 아까보다 훨씬 힘이 없어보였다. 단지 고통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닌 듯했다.
“무슨 일이죠?”
나는 조용히 침실 문부터 닫았다.
암살자는 인상훈련이라는 걸 받는다. 모든 술법을 포기한 내게 오데르가 남긴 유일한 유산이었다.
그녀는 거의 완벽한 연기를 해냈다. 노련한 전사, 영주, 측근들, 심지어 자기 혈육마저 속일 정도로.
그러나 나는 어느 대목에서인가 그녀가 부자연스럽다는 걸 느꼈다. 그녀는 단 한 차례, 자신이 잘 모르는 내용을 얼버무렸다.
그녀는 오데르의 검을 샀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다. 귀족들은 유구한 세월동안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내 형제들을 애용해왔다. 하지만 정기호가 묘사했던 수법은 형제들의 방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 수많은 암살자를 만나봤다. 대부분은 잠들었을 때 기습을 하거나, 음식에 독이나 타는 찌끄레기였다.
그가 겪은 모든 암살시도가 형제들에겐 코미디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음식에 독을 탄다는 소리는 신성모독이나 다를 게 없었다.
일격에 저승으로 보내거나, 술법을 동원해 검술로 마무리를 하거나. 형제들은 어느 쪽이건 당하는 입장에서 불만을 가지기 어려운 방식을 애용해왔다.
“저도 질문을 하나 드릴까 합니다.”
그녀가 불안한 눈초리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내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미리 경고를 드립니다. 저는 진실을 꿰뚫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러니 아까처럼 거짓말을 하시면 안 됩니다.”
이졸데는 눈에 띄게 동요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안간힘을 쓰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가운의 옷깃을 힘겹게 여미면서, 내게 한사코 항변했다.
“당신에겐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
“저는 스트리아령을 다스리는 대영주입니다. 당신은 제 동의 없이 술법을 걸 권리가 없어요. 저는 당신의 행위를 우리의 주권에 대한 침해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녀의 주장이 옳았다, 내겐 그럴 권리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대로 물러서지 못했다. 물러설 수가 없었다.
친구이자 부하인 자가 일생일대의 결심을 앞둔 마당이다. 그러한 종류의 결심은 반드시 진실을 토대로 세워져야만 했다.
“좋습니다.”
나는 그녀가 보란듯이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녀는 내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을 검을 뽑으며 애원하다시피 부탁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술법을 발동시켰다.
진실의 추.
술법이 발동되었다.
다만 방향이 달랐다. 나는 그녀가 아닌 나를 대상으로 술법을 작동시켰다.
진실의 추는 내게서 기인한 술법이다. 내게 작동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공격기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바뀐 용례에 따라 새로운 법칙이 생성되었다. 이제부터 진실의 추는 내게 쓰일 경우 소미의 찬트처럼, 일종의 버프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상대가 거짓말을 할수록 나는 더 강해진다는 것이다.
“원하시는 대로 당신에겐 술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자, 이제 대답하시죠. 당신이 야즈를 죽였습니까?”
그녀가 힘없이 침대 모서리에 주저앉았다. 낯빛이 어찌나 희던지 핏줄이 비쳐 보일 지경이었다.
그녀는 한참 후, 입술을 경련하듯 당겨 미소 비슷한 걸 만들어냈다.
“왜 아니겠어요? 그 사람은 자격이 없었는데.”
나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내가 해줄 말은 한 마디밖에 없었다.
“거짓이로군요.”
그녀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진실이 드러난 순간 그녀에게 떠오른 건 오직 절망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