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늪 (11)
진실의 추.
거짓말쟁이에게 응징의 철퇴를 내린다. 즉발성인데다 침투력이 워낙 높아 방어가 거의 불가능한 기술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술법이 대답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진실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료헤이는 무척 출중한 전사였다. 근성도 있었고, 정신력도 남달랐다.
그러나 일왕에 대한 그의 신앙은 거짓이었다.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사람조차 믿지 않는 신앙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따라줄지 의문이었다. 그 점을 해결하지 못하는 한 일왕은 결코 에사인이 되지 못할 것이다.
탕, 탕.
병사들이 내게 조준사격을 개시했다. 그들은 료헤이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어찌나 급했는지 탄환이 샐 위험조차 고려하지 않았다.
료헤이도 문제였다. 그는 다리가 부러졌음에도 전의를 잃지 않았다. 그는 누워서 방어자세를 취한 채 병사들에게 고래고래 소리쳤다. 일본어를 알아들을 순 없었으나, 비장한 분위기로 짐작컨대 자기는 죽어도 좋으니 망설이지 말고 공격하라는 말이지 싶었다.
“또 보자.”
더 이상 시간을 끌릴 수 없었다.
나는 몸을 돌려 정기호의 뒤를 쫓았다.
“라힐, 도망치지 마라!”
료헤이가 뒤통수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에신의 늪이란 악몽에나 나올 법한 기이한 수생식물의 도가니였다.
두껍고 걸쭉한 녹조류를 헤치고 나아가면, 희끄무레한 물속에서 커다란 물고기들이 엉킨 채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가끔 물고기 대신 퉁퉁 불어터진 시체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럴 때는 나조차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하필이면 왜 이런 지역에다 전초기지를 지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어쩌면 일본도 다르마알의 앙심을 산 탓에 광활한 늪지대 한가운데에 포탈이 열렸을 수도 있었다.
일본의 방어전선은 깊은 늪을 해자처럼 두른 채 형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전투 초반에는 밀렸던 모양인데, 방어전선을 만들고 나서는 형세를 역전해 그야말로 학살극을 벌인 듯했다. 너른 늪지대 전역에 걸쳐 탄흔과 포연이 가득했다. 수많은 전사들이 늪을 벗어나보지도 못하고 수장되고 말았다.
정기호를 발견한 건 전장의 중심부에서 멀찍이 떨어진 외곽지대였다.
그의 옆엔 대영주의 전용 탈것이 얌전히 내려앉아 있었다.
머지않은 곳에 이졸데와 그녀의 호위병들도 보였다. 그녀는 기엔에게 삿대질을 하며 핏대를 올리는 중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이졸데가 두 손으로 기엔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내가 분명히 명령에 불복하면 말뚝에 매달아버리겠다고 경고했을 텐데! 네 덕에 스트리아령은 이제 몰락하는 길만 남고 말았다!”
“그게 왜 제 탓이라는 겁니까?”
기엔이 멱살이 잡힌 채 태연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이졸데는 말문이 막히는지 눈만 부릅떴다. 기엔은 완력으로 이졸데의 손을 떼어내며 냉정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전사단이 뿔뿔이 흩어지고, 영주들이 당신에게 반기를 드는 걸 보고도 느끼는 게 없습니까? 스트리아령의 몰락은 당신이 정당한 후계자인 야즈님을 비열하게 암살했을 때부터 시작됐습니다. 마족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못 이길 상대가 아닙니다. 그걸 불가능하게 만든 게 바로 당신이죠.”
야즈,
그게 정기호의 이름이었다.
정기호는 자신이 거론되고 있는데도 우두커니 서서 아무런 말도 않았다. 그는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감히 내 앞에서 그 이름을 꺼내다니, 배짱도 좋구나.”
이졸데가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 망나니는 대영주 자격이 없었다, 마치 네가 영주 자격이 없듯이 말이다. 그놈이 너희와 전쟁놀음이나 하며 술독을 거덜내는 동안 영지 꼬락서니가 어떻게 됐느냐. 선대가 채워 넣었던 곳간이 텅텅 비고, 기껏 일군 옥토가 버려지고, 현인들이 궁을 떠나고, 칼 쓰는 잡배들이 가주의 이름을 들먹이며 활개를 치고 다녔다. 너희가 바라는 지도자가 그런 자인 것이냐?”
방금 발언으로 그녀는 자기 오빠를 암살했다고 실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나저나 전생의 정기호는 상당한 날라리였던 듯했다.
황국은 지나치게 오랫동안 평화로웠다. 명문가를 말아먹는 망나니 후계자가 드문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나마 정기호는 무술에라도 관심이 있었지, 그 정도 소양도 갖추지 못한 놈들이 부지기수였다.
“그 지도자가 우리를 유일하게 뭉치게 할 수 있는 지도자였지.”
기엔은 이제 이졸데에게 경어를 쓰지 않았다.
“선대께서는 모든 영주들이 입회한 가운데 일곱 권능의 이름을 빌어 야즈님을 후계자로 지목하셨다. 그곳에 너를 위한 자리는 없었어. 네 권력욕을 포장하지 마라, 너는 명예를 모르는 짐승이자, 신성모독을 저지른 죄인에 지나지 않는다!”
“너야말로 네 무능을 포장하지 마라.”
이졸데가 싸늘한 눈으로 기엔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오른손을 들어 연기가 치솟는 전장을 가리켰다.
“명예를 아는 자의 말로가 이런 것이냐? 정찰조차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잘 방비된 적진에 병력을 내다버리는 게?”
“너는 우리더러 기다리고만 했어...”
“그게 유일하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이니까! 그렇게 해야 축축한 습지에서 비참하게 죽어갈 일이 없을 테니까! 네 전사들을 되살려 물어보아라. 명예를 안다는 머저리를 따르다 객사할지, 나를 따라 마족을 무찔러 역사에 이름을 길이 남길 것인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닐 것이다.”
“닥쳐! 너는 대영주가 아니다!”
“나라고 그러고 싶어서 그랬는줄 아느냐? 그는 내 피붙이였다. 욕심 때문이 아니야. 나는 내가 사랑하는 스트리아가 망가지는 걸 볼 수 없었을 뿐이다!”
“닥치라고 했지!”
기엔이 검을 빼들었다. 그는 이졸데의 두 호위병을 짚단처럼 간단히 베어버렸다. 이졸데는 반격을 감행했으나, 주먹질 한 번에 손쉽게 무력화되고 말았다. 기엔은 평생토록 무술을 단련해온 전사였다. 실력으로 칠 것 같으면 이졸데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졸데가 쓰러지는 순간 정기호의 몸이 움찔거렸다. 나는 신중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이 모든 일의 당사자였다. 그가 나서지 않는 한은 나도 나설 수가 없었다.
“하하......”
이졸데가 복부를 움켜쥔 채 억지로 웃음을 쥐어짜냈다. 기엔이 빼든 검이 그녀의 가느다란 목덜미에 닿았다.
“너는 네 친족을 살해하여 부당하게 대영주직을 찬탈한 혐의가 있다. 이에 여섯 번째 권능의 이름을 빌어 너를 심판하겠다.”
그가 추상같은 목소리로 그녀를 추궁했다.
“죄를 인정하겠나?”
“난 잘못한 게 없어.”
퍽.
그가 검손잡이 끝으로 그녀의 얼굴을 후려쳤다.
“죄를 인정해라. 그래야 영혼만이라도 구원받을 것이다.”
그녀는 코피를 흘리며, 흔들거리는 상체를 간신히 바로잡았다. 그녀는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나는 죄가 없다.”
퍼억.
이번에는 기엔이 그녀의 배를 세게 걷어찼다. 그녀는 고통으로 몸을 웅크리면서도 그가 원하는 말을 들려주지 않았다.
“나는.......잘못한 게 없어.”
“독한 년 같으니.”
기엔이 검을 위로 들어올렸다. 그러나 곧장 내리치지는 않았다. 그가 원하는 건 정의가 아니라 이졸데의 굴복이었다. 그는 그녀를 살려 보낸다면 군령을 어긴 죄로 자신을 말뚝에 매달고 말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모멸감을 준 그녀를 최대한 괴롭히다 죽이기를 원했다.
“인정해라.”
그가 이졸데를 몇 대 더 걷어찼다. 그녀는 그럴 때마다 몸을 움찔거리며 피를 토해냈다.
나는 정기호가 이대로 그녀의 죽음을 지켜보려는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그만큼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만약 그가 원하는 게 복수라면, 이 또한 하나의 결말이 될 수는 있었다.
“나는 죄가.......없어.”
그녀가 땀과 피에 젖은 얼굴을 힘겹게 들어 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후회는 드네.”
“무엇이냐?”
“그 망나니하고 조금만 더 친했더라면.......너 같은 버러지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었을 텐데.”
그녀의 호박빛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그것은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타고난 지도자의 눈이었다. 기엔은 그녀의 기세에 눌려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그는 그게 부끄러웠는지 주먹을 꽉 쥐고 위로 쳐들었다.
“오냐, 언제까지 건방지게 굴 수 있을지 보자!”
정기호가 나선 게 그때였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를 좁혀 기엔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뭐, 뭐냐?”
기엔은 정기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팔을 흔들었다. 그러나 정기호는 요지부동이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한 뼘조차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치 수갑이라도 채워놓은 것만 같았다.
“너는 네 대영주를 살해하려 들었다.”
정기호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일곱 번째 권능의 이름을 빌어 너를 심판하겠다. 죄를 인정하겠나?”
기엔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무슨 개소리냐? 일곱 번째 권능은 이케이드...”
빠각.
정기호의 주먹이 기엔의 얼굴을 후려쳤다. 기엔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며 나동그라졌다. 그는 검을 움켜쥐고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 사이 이졸데의 신변을 확보했다.
정기호는 동생의 죽음을 원치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그의 의지를 서포트하는 것뿐이었다.
이졸데는 끊어질 듯 가느다란 숨을 간신히 내쉬는 중이었다. 그녀는 내게 머리를 기댄 채 두 전사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정기호의 뒷모습을.
그녀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그의 뒷모습뿐이었다.
정기호가 대검을 늘어뜨리며 기엔에게 다가설 때였다. 그녀의 숨결이 갑자기 거칠어졌다. 그녀는 연신 눈을 끔뻑이면서 내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게 무어라 중얼거렸다.
“......즈...”
그녀는 무엇을 보았는지 눈에 띄게 동요하는 중이었다.
이윽고 두 전사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정기호의 트레이드마크인 대번격이 연이어 작렬했다. 기엔은 도저히 버텨내지 못했다. 성장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정기호도 나와 처음 겨뤘을 때보다 훨씬 강해져있었다.
“네놈은 이방인이다, 우리 가문의 일에 끼어들 자격이 없다!”
기엔이 발악하듯이 외쳤다. 그는 자신이 살아남지 못할 거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정기호는 몰아치던 공격을 우뚝 멈추었다. 그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조용히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기엔은 정기호가 멈춘 사이 필사적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천금 같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기호의 대검이 다시 마력에 휘감긴 채 진동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에선 더 이상의 미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전생의 나는 아니었다.”
태산 같은 내려치기가 기엔을 찍어 눌렀다. 나조차도 감히 받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일격이었다.
물보라가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았다. 휘몰아치는 검풍 속에서 기엔의 무릎이 꺾이는 게 보였다.
균형을 잃는 순간 승부는 결정이 났다. 정기호는 다섯 합이 지나기 전에 기엔의 수급을 거둬들였다.
머리를 잃은 기엔의 몸뚱이가 늪에 무릎을 담근 채 서서히 스러져갔다.
첨벙, 첨벙.
물고기들이 튀어 오르며 기엔을 늪 깊숙한 곳으로 끌어들였다.
잠시 후 정기호가 굳게 입을 다문 채 내게로 걸어왔다.
그는 이졸데의 몸을 안아 번쩍 들어올렸다. 이졸데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갑자기 벙어리가 되고만 것만 같았다. 그녀는 당황해서 크게 눈을 뜬 채, 주먹을 꽉 쥐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야즈?”
정기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때마침 대영주의 탈것이 고개를 젖히며 빼액 울었다. 녀석은 뒤뚱거리며 다가와 정기호의 어깨에 부리를 비비며 반가움을 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