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늪 (10)
“가서 어쩔 셈이냐.”
“나도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기호가 조용히 선글라스를 썼다. 번민하던 눈은 짙은 색조유리에 완벽하게 가려졌다. 그는 평소와 거의 차이가 없는 무감각한 톤으로 말했다.
“하지만 내 여동생이다. 다른 놈 손에 죽게 두진 않는다.”
미묘한 표현이었다. 직접 죽이겠다는 건지, 가서 지켜주겠다는 건지.
그런 미묘함이 그의 번뇌를 잘 말해주었다.
나는 옆을 지나치려는 그의 어깨를 강하게 붙들었다.
“기다려, 같이 간다.”
그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넌 내 부하잖냐. 다른 놈 손에 죽게 둘 수야 없지.”
“혹시나 해서 말해둔다만 날 말릴 작정이라면...”
“그럴 거면 보내지도 않을걸.”
그가 뭘 걱정하는지는 이해했다. 여기까지 오게 되니 나란 놈에게도 정치적인 입장이라는 게 생겨버렸다.
에신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하자면 나는 그를 막아야만 옳았다. 그는 감정적으로 상당히 격앙된 상태였다. 가서 무슨 사고를 칠 줄 몰랐다. 그러나 최근 박병철 장관과 가까이 지내면서 느낀 게 하나 있다면, 나는 정치인은 못 될 놈이라는 것이다.
“카룩카이.”
“불렀느냐, 라힐.”
석상처럼 서있던 카룩카이가 몸을 움직였다. 라크릭의 털이 긴장으로 바짝 곤두서는 게 보였다.
“대사제로서 첫 임무를 내리마. 내가 돌아올 때까지 도시를 안전하게 지켜라. 여기 사람들에게 내 이름으로 보호받고 있다는 걸 널리 알려다오.”
“그리하겠다.”
“그리고.......”
나는 카룩카이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는 지나치게 위협적이었다. 안 그래도 무서운 외모인데, 뿔 달린 갑옷까지 입고 있으니 그야말로 흉악하기 그지없었다. 저런 모습으로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기는커녕 겁이나 주고 말 것이다.
“아무래도 네게 어울리는 사제복이 필요하겠는데.”
나는 이졸데의 수하인 라크릭을 쳐다보았다. 라크릭은 당황하면서 도리질을 쳤다.
“저, 저는 그런 거 모릅니다.”
“알 바 아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럴듯한 사제복을 만들어 입히도록. 식탁보를 찢던 시녀장과 함께 바느질을 하던 방법은 상관 안 할 테니.”
“.......알겠습니다.”
라크릭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성 밖으로 나서자, 흰 깃을 가진 거대한 생물이 활개를 치며 서쪽으로 날아가는 게 보였다. 대영주의 전용 탈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이졸데가 날아간 방향을 향해 무작정 뛰었다. 마법사를 수소문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믿을 건 오직 두 다리뿐이었다.
정기호는 수사자처럼 거침없이 벌판을 내달리며, 내게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 같았다.
나는 그런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복수를 위해 이날 이때까지 이를 갈아왔다. 그가 해야 할 건 이졸데가 떠나간 자리에 깃발을 꽂는 것뿐이었다. 그는 심지어 자기 손을 더럽힐 필요조차 없었다. 검을 빌려주겠다던 내 약속은 아직도 유효했다.
왜 그는 평생의 숙원을 내팽개친 채 빈 땅을 질주중인 건가.
모를 일이었다. 우리는 그저 달리고 또 달렸다.
약 두어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지평선 아스라한 지점에서 화광이 충천했다.
텅, 텅, 텅,
유탄발사기가 불을 뿜는 소리가 들렸다. 궤도차량이 움직이는 소리, 대구경 활강포가 작렬하는 소리도 들렸다.
쿵, 쿵....
지축이 잇따라 흔들렸다. 짐승과 사람이 뒤엉켜 지르는 비명이 예까지 들려왔다.
기엔은 탁 트인 평야에서 적이 짜놓은 화망 안으로 걸어 들어간 듯했다. 그가 기대했던 정정당당한 승부, 영웅적인 전투는 어디에도 없었다. 현대화된 군대를 상대로 전면전을 벌인다는 건 이졸데 말마따나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더욱 속도를 끌어올렸다. 백여 미터 앞에 바리케이트와 초소가 나타났다. 초소 꼭대기에는 이 거리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크기의 욱일기가 휘날렸다.
초병들이 일본어로 무어라 소리쳤다. 한 병사가 다짜고짜 소총을 조준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비켜.”
나는 정기호를 밀치며 등 뒤에 찬 대검을 꺼냈다. 동시에 소총구에서 불벼락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대검의 넓은 옆면으로 총알을 튕겨내며, 초소 아래까지 단숨에 접근했다. 나는 마력에 관성까지 더한 힘으로 초소를 밑동부터 베어버렸다.
마치 가운데 직구가 얻어걸린 것만 같았다. 검이 손아귀에 달라붙는 느낌이 장난이 아니었다. 장검 따위를 쓰던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손맛이 좋았다.
“크아악!”
초소에서 떨어진 병사들은 대부분 무력화되었다. 나는 잔당들 중 무전기를 꺼내 교신하는 놈을 일부러 내버려두었다. 한 명이라도 더 살려서 돌아가려면 적을 최대한 혼란스럽게 만들어야만했다.
“미안하다, 이런 일에 끌어들여서.”
정기호가 드디어 침묵을 깨뜨렸다.
“미안하면 밥이나 사.”
나는 잊었다는 듯이 덧붙였다.
“참고로 난 아무거나 잘 먹는다.”
곧 일본군들이 사방에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소총과 방탄복으로 중무장한 병력이었으나, 아무런 마력도 가지지 않은 자를 무력화하는 건 어린애 손목을 비트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우리는 잡병들을 제압하며 전장의 중심부로 이동했다. 슬슬 기엔이 끌고 나갔던 전사들의 시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 예상보다 훨씬 격렬하게 저항했던 듯했다. 박살난 중화기 진지나 뚜껑이 날아간 전차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별안간 새의 활개소리가 들려왔다.
순백의 괴조가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전장 깊숙한 곳에 내려앉았다. 금발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젊은 여성이 새의 고삐를 쥐고 있었다.
“먼저 가라.”
나는 정기호의 등을 떠밀었다.
죄업이 아득히 깊은 자가 다가와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인간들의 죄를 모조리 합쳐도 이 자 한 명이 미치지 못할 듯했다. 죄업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끝 모를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괜찮겠냐?”
“신경 쓰지 말고 가서 마무리를 지어.”
정기호가 못내 떨어지지 않은 걸음을 떼었다. 그 또한 지금 나타난 자가 얼마나 강자인지 직감한 듯했다.
이윽고 그늘 속에서 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창백한 낯빛에 지적인 인상을 가진 삼십대 남성이었다. 마치 평범한 회사원마냥 흰 와이셔츠를 입었는데, 손에 쥔 고풍스러운 일본식 도검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는 환생자임에 분명했다. 깊은 죄업만큼이나 대단한 마력을 지닌 자였다. 그는 침착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능숙한 에신어로 말을 걸었다.
“한국인인가.”
그는 내 국적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야마모토 료헤이라고 한다.”
“라힐이다.”
나는 일부러 이쪽 이름을 썼다.
나는 황국을 개인자격으로 돕는 중이다. 그가 뭐라고 주장하건 나는 내 선에서 책임을 져야만했다.
“소문을 들었다. 동아시아에 우리 말고도 다르마알에 넘어가지 않은 나라가 있다고. 너희가 아니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그런가.”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일단 무기를 내려놓고 건설적인 대화를 나눠보자. 비록 우리가 이렇게 만났지만, 현지인과 빚은 사소한 분쟁은 우리 사이에 아무런 외교적인 의미도 없다고 본다.”
“너희와 나누는 대화에도 아무런 외교적인 의미가 없어.”
“이해한다, 아시아인이 우리를 좋게 볼 이유가 많지 않지. 다이토아쿄에이켄. 대동아공영의 꿈은 허망하게 좌초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웃나라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모두 신의 일을 인간이 행하려했기에 벌어진 비극이다. 허나 이제는 과거의 실수가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너희 왕을 에사인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너희는 과거의 실수를 또다시 반복하고 있을 뿐이야.”
“천황폐하께서 에사인으로 등극하시는 건 막을 수 없는 흐름이다. 세계는 이후 우리 일본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서구 열강이 이룬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나라들이 부상하게 된다. 너희가 그 중 하나가 아니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나?”
료헤이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에사인은 향후 세계의 질서를 재편할 것이다. 에사인을 배출할 나라가 보인다면 그 나라에 가능한 한 빨리 빌붙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미안하게 됐다.”
나는 대검을 그를 향해 겨누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나는 그의 썩어가는 표정을 보며 씩 웃었다.
“혹여 살아남거든 가서 전해라. 여긴 에사인이 둘이라고.”
“무슨 헛소리를...”
료헤이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나는 오른발을 앞으로 밟으며 응징의 일격을 시전했다. 그의 죄업에 부응하는 거대한, 가늠할 수 없는 물리력이 대검의 궤적에 실렸다.
그는 일본의 환생자들 중에서 고르고 고른 인재가 틀림없었다.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응징의 일격을 정면에서 막아내는 걸 시도했다.
쩌어엉.
검풍이 료헤이의 뒤편에 자리한 병영 지붕을 날려버렸다. 땅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지표가 한 꺼풀 벗겨졌다.
료헤이는 놀랍게도 응징의 일격을 정면에서 받아냈다. 내 회심의 일격이 얇은 장검 한 자루를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강한 공격을 받더라도 균형을 이뤄내는 검술이 존재한다고 들었다. 아주 특별한 에사인을 따르는 자에게만 허락된.
그러나 그의 몸은 충격을 완전히 상쇄해내지 못했다. 손과 발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동자는 핏줄이 터져나가 붉게 물들었다.
나는 두 번째 응징의 일격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기습이 아니니만큼 훨씬 거대한 힘이 실렸다.
우우우웅.......
마력으로 팽배한 검날이 손아귀 안에서 미친 듯이 날뛰었다. 모두 그의 죄업에서 기인한 힘이었다.
두 번째 응징의 일격이 쇄도하자, 그가 핏발 선 눈을 부릅뜨며 큰 소리로 외쳤다.
“덴노 헤이카 반자이!”
귀청이 찢어질 듯한 폭음과 함께 흙과 자갈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충격파에 휘말린 트럭이 몇십 바퀴나 굴러가 늪 가장자리에 처박혔다. 차량이 그 정도인데 사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멀찍이서 구경하던 병사들은 때 아닌 폭풍을 맞아 가랑잎처럼 바닥을 굴러다녔다.
“허억, 허억.......”
료헤이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옷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몸 여기저기가 피투성이였으나, 그는 그 지경이 되고도 두 발로 서있었다. 오히려 그는 부상으로 인해 더욱 고양된 듯했다. 그는 검에 묻은 먼지를 떨쳐내며 용기백배하여 내게 소리쳤다.
“얼마든지 공격해봐라, 나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물론 그는 쓰러진다.
그러나 쉽게 쓰러뜨릴 수는 없는 상대임에 분명했다. 근성과 실력이 대단한 자였다.
전사로서 존경스럽기는 하나, 나는 그와 드잡이나 할 시간이 없었다. 이러는 순간에도 정기호나 이졸데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희가 주장하기를 천황이 신의 자손이라던데, 사실인가?”
그가 별 같잖은 질문이 다 있다는 듯이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당연하다.”
퍼억.
별안간 그의 오른다리가 역방향으로 꺾였다. 그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쓰러진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미처 말을 못한 게 있는데, 그 에사인 앞에서는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