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늪 (9)
그럴 수도 있겠다 싶겠다.
오직 국익만을 따져봤을 때는 합리적인 결정이라고도 여겨졌다.
물론 황국의 입장에서는 그래서는 안 될 일이겠으나, 일본이 굳이 황국의 입장을 감안해줄 이유가 없었다.
만약 이 새로운 세기가 정말로 이세계로 향하는 대항해시대라면, 나는 미국이나 영국 등이 에신에 노예농장을 차렸다고 한들 놀라지 않을 것 같다.
러시아나 중국은 더한 짓도 저지를 수 있겠지.
그들은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으나, 내게는 아니었다.
힘에 도취되어 인간임을 망각한 죄.
나는 인간이 아닌 자를 단죄하는 자였다. 그런 행위가 버젓이 자행되는 한 에사인으로서 내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권위가 떨어지면 신도가 떠나가고, 신도가 떠나가면 힘을 잃는다. 힘을 잃어버린 에사인의 말로가 그리 아름답지 못하리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물론 일본과 다르마알이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진 않습니다. 우리가 불리한 전쟁을 벌이는 중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도발을 걸어왔다고 봅니다.”
“상대를 알지 못하면 싸울 수 없죠.”
나는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에게 무리한 도발을 감행했던 일본을 떠올렸다.
설마 그들이 두 번이나 같은 실수를 범할 것 같진 않았다.
“대안은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이졸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본래대로라면 제 직속 전사단만으로도 대응이 가능해야겠지만, 최근 가문내에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전사단의 인력 누수가 심각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울토르님께서 서부전선을 평정하고 회군하시는 걸 기다리는 게 최선입니다. 충분한 병력 없이 마족의 군대와 야전을 벌이는 건 자살행위니까요.”
나는 불미스러운 일이 무슨 일인가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귀족 가문들이 바람 잘 날 없는 거야 하루 이틀이 아니니.
“울토르님은 어떤가요?”
“이곳이 서부전선입니다.”
그녀가 지도의 서쪽, 유난히 깃발이 많이 꽂힌 지점을 가리켰다.
“...쉽지 않아 보이는군요.”
군사적인 지식이 전무한 내 눈으로도 서부전선은 가망이 없어보였다. 황군을 가리키는 깃발들이 그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깃발들에게 포위되어 쌈 싸 먹힐 위기에 처해있었다.
“북부전선의 상황은 나쁘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쪽에서 지원군을 내려 보낸다면 버틸 수는 있다고 봅니다.”
“상황을 조기에 정리하고 우리가 지원을 갈 수도 있겠죠.”
“그럴지도.......아니, 그래야만 합니다.”
이졸데가 자신없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기적이 일어나야 할 겁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시가전을 불사해서라도 승부를 내야겠지요. 우리는 마족의 평균적인 무력이 우리보다 아래라고 보고 있습니다. 도시로 끌어들여 병력의 질로 승부한다면 승산이 있다고 봅니다.”
이졸데는 잊지 않고 냉소를 덧붙였다.
“어디까지나 제 ‘전사’들에게 그럴 배짱이 남아있다는 가정하에 말입니다.”
그녀는 목이 타는지 시녀에게 병과 잔을 건네받았다. 그녀는 잔에 손수 음료를 채워 우리에게 넘겨주었다.
시큼한 과일향이 코끝을 어릿하게 만들었다. 암살자일 때는 엄두도 못 냈을 만큼 값진 음료였다.
“혹시 대한민국에도 전사라는 족속들이 있습니까?”
“아니오.”
“다행입니다. 이 나라는 그 한심한 족속들 때문에 곪아가는 중입니다. 전쟁통에도 정정당당한 승부 운운하며, 장거리 공격이 날아올 때마다 화를 벌컥벌컥 내는 미치광이들입니다. 그 영주라는 머저리가 미치광이들의 두목이죠. 그런 자인 줄 알았더라면 진작 멱을 따놨을 텐데요.”
이졸데는 진심으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전사는 직업이 아니라 일종의 이념에 가까웠다. 그들은 명예를 목숨보다도 더 소중히 했다.
암살자 입장에서는 하품 나오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유구한 세월 동안 황국이 평화롭게 번영했기 때문이었다.
“전시상황에 어울리는 리더라고 하긴 힘들 것 같긴 합니다.”
“제가 정말로 화가 나는 건 감히 그 머저리가 제 앞에서 백성을 들먹인다는 겁니다. 진정으로 백성을 생각한다면 이길 궁리부터 해야지 않겠습니까? 자기 손을 더럽힐 용기도 없는 놈이 도덕적인 우위는 놓고 싶지 않다는 거죠.”
나는 이쯤에서 정기호의 표정을 살펴보고 싶었다. 정기호도 드문드문 전사였던 티를 내곤 했다.
“대영주님!”
그때였다. 광장에서 보았던 귀족 전사가 미끄러지듯 회의실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이졸데는 그를 매섭게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무슨 일이냐?”
“대, 대영주님.......큰일 났습니다...!”
그는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몸도 가누지 못했다.
“기엔님이 출진하셨습니다!”
“뭐라?”
이졸데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귀족 전사의 멱살을 콱 틀어쥐며 윽박질렀다.
“그리고 넌 그걸 보고만 있었다는 말이냐?”
“저, 저는 기엔님을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려보려고 했지만, 제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번만 더 지껄이면 제 목을 베고 가시겠다고...”
“한심한 놈 같으니.”
이졸데가 그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군령장을 쓰겠다. 멀리 가진 못했을 테니, 당장 따라가서 전달해라!”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길들인 탈것들을 전부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비익족은 뒀다 뭣하냐?”
“비익족들도...”
귀족 전사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이졸데는 마치 폭발하기 직전의 화약과도 같았다. 눈처럼 희던 목덜미가 익은 듯이 붉게 변해있었다.
상황이 대충 짐작이 갔다. 이곳은 기엔 영주의 도시였다. 주둔한 군대는 영주에게 충성하는 지역 토박이들일 테고.
이졸데는 최소한의 경호인력만 데리고 내방한 듯했다.
그러나 영주와 대영주는 급이 달랐다. 의견이 갈리는 걸 넘어서서 항명을 한다는 건 초유의 사태였다.
기엔은 이졸데가 대영주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중인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전황을 판단하는 눈은 이졸데 쪽이 훨씬 더 정확했다. 그녀는 전시상황으로 국한하자면 대영주직에 걸맞은 역량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이 사태는 이졸데가 언급했던, 가문내 불미스러운 일과 무관하지 않을 듯했다.
“탈것 소환이 가능한 마법사를 찾아라. 가서 그 머저리에게 직접 내 명령을 전달해라. 지금 돌아오지 않으면 항명을 군령으로 다스리겠다고.”
“알겠습니다.”
“스트리아령의 운명이 걸린 일이다. 이번에도 빈 손으로 돌아올 생각은 말아라. 내게 죽던지 그놈에게 죽던지 선택은 자유겠다만, 나는 편히 죽이진 않으마.”
귀족 전사는 경색된 표정으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추태를 보여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졸데가 내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이쯤에서 입장을 정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총기를 전부 전초기지에 두고 왔다. 전쟁에 참여한다고 해서 본국에 누가 될 일은 없을 듯했다.
게다가 황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일곱 번째 권능이 되고자한다면 이보다 더한 호기가 없을 것이다.
“일단 연합전선에 관해 논의를 해봅시다.”
이졸데가 놀란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홍조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마치 카멜레온 같았다. 최소한 남 앞에서 감정을 숨기지는 못할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 도움에 대해서는 반쯤 포기했던 듯했다. 그녀가 들려준 모든 말이 망해가는 집구석의 전형이었기에.
나는 지도에서 일본군의 본진으로 추정되는 지점을 가리켰다.
“기엔 영주가 향한 곳이 여기가 맞습니까?”
“예.”
“늪지대로군요.”
일본군은 밀림과의 경계선에 진을 쳤다. 숲의 경계를 따라 서쪽 방면으로 광대한 영역에 걸쳐 늪지대가 형성되어있었다.
늪이 어떤 전술적인 의미를 가지는지는 모르겠으나, 공격해 들어가는 입장에서는 공략하기 까다로운 지형임에 분명했다.
“집을 지키는 게 옳겠습니다.”
“동의합니다. 영주라는 머저리가 수비병력을 다 끌고 나가버리지만 않았더라면.”
“달리 도움을 요청할 곳은 없습니까?”
“근처 도시에 병력이 있기는 합니다만, 제 말을 듣지 않을 겁니다.”
“대영주이시지 않습니까.”
“.......”
이졸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듯이 회의실을 서성이더니,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직접 가봐야겠습니다. 그런 모자란 놈에게 영지의 운명이 달린 일을 맡겨둘 수가 없군요.”
그녀는 망토를 펄럭이며 나갈 채비를 갖췄다. 시녀들이 우르르 들러붙어 그녀에게 중갑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염치없지만 부탁을 드립니다. 라힐님께서는 영지민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주십시오. 그들은 울토르님이 우리를 저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엔에 이어서 저까지 도시를 떠난다면 더욱 불안해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광장에서 열망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 눈은 단지 새로운 에사인의 탄생만을 기대하는 눈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푸라기라도 움켜쥐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는 것이다.
“라크릭!”
이졸데가 큰 목소리로 누군가를 호명했다.
온 몸에 흰 털이 돋아난 수인족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정제된 걸음걸이로 유추컨대 상당한 실력을 가진 무인이었다. 이졸데를 근접경호하는 전사인 듯했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 너는 라힐님을 나인 것처럼 받들어 모셔라. 울토르님과 아바르님이 우리를 위해 안배하신 분이시다.”
“알겠습니다.”
이졸데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가자 방에는 나와 라크릭, 시녀들, 그리고 정기호와 카룩카이가 남았다.
나는 정기호를 돌아보았다.
그는 선글라스를 벗은 채 어울리지 않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문득 여태껏 나와 이졸데 둘이서만 대화를 나눴다는 걸 깨달았다. 정기호가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한 마디씩 끼어들지 않는 놈도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그가 끼어들 구석이 얼마든지 많았다.
장교 출신으로서 전술적인 조언을 주는 것도 가능했고, 전사들의 신념을 대변해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는 대신 내내 망부석마냥 입을 다무는 걸 택했다.
“어이, 정기호.”
“.......라힐.”
나는 그가 나를 이쪽 이름으로 불렀다는 걸 뒤늦게야 알았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답지 않게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나도 따라가야겠다.”
“누구를, 대영주?”
“그래.”
“굳이 너까지 갈 필요는...”
“내 여동생이다.”
그가 내 말을 잘랐다.
나는 그가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황국 남부, 스트리아령.
두 키워드가 하나가 되며 잊었던 기억을 되살려냈다.
- 날 죽인 게 여동생이다. 완벽하게 허를 찔렸지.
나는 눈을 크게 뜨며 정기호를 쳐다보았다. 정기호는 나만큼이나 복잡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