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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45화 (45/205)

45화. 늪 (8)

나는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내 얼굴을 확인하고픈 열망을 숨기지 않았다.

장장 천 년이었다.

살아있는 자가 마지막으로 에사인을 향한 여정에 오른 지가.

말이 천 년이지 역사가 의미있게 기록된 후로는 최초라고 봐도 좋았다. 누구나 막연하게 알고만 있을 뿐,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모든 살아있는 자의 이루어질 수 없는 꿈.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고야만 것이다.

“성문을 열어라!”

우렁찬 고함과 함께 거대한 성문이 활짝 열어젖혀지기 시작했다.

전사들이 두 줄로 도열해 나를 위한 길을 만들어주었다. 뿔나팔이 울리고, 종탑은 길한 소식을 알리기 위해 열렬하게 타종했다. 모든 것이 마치 처음부터 계획되었던 의전인 듯했다.

곧 바깥에서 대기하던 크록 부대가 도시 안으로 진입했다. 어마어마한 중장갑을 갖춘 크록 전사들은 사람들의 기를 죽여 놓기에 충분했다.

모여든 군중들의 사이사이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록은 어린아이들을 겁주는 부기맨 같은 존재였다. 황군을 남김없이 먹어치운 무시무시한 악어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어릴 때 들어보지 않은 자가 없을 것이다.

“대영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괜찮으시다면 길을 안내해드리겠사옵니다.”

니피가 내게 공손히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대영주는 우리로 치면 도지사급은 되는 인물이었다. 이런 변방도시에 있을 인물이 아니었으나, 전황이 전황이니만큼 소방수격으로 전선을 돌아다니는 모양이었다.

나는 카룩카이와 정기호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도시는 바깥에서 보던 것보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곳곳에 잿더미가 된 집들이 널려있었다. 폐허가 된 처마 아래에서 아낙네들이 꾀죄죄한 아이들을 안은 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황국의 모든 도시는 마법과 술법에 대한 대응체계를 갖췄다. 포사격만으로 도시를 이 꼬락서니로 만든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밤낮으로 쏘아댔거나, 다른 수단을 병행했거나.

“미사일이려나?”

정기호가 물었다.

“글쎄다. 나는 알보병이었어서.”

나는 그의 병과를 물어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놈 면제였었지, 메달리스트였다던가.

이중에 달하는 내벽을 지나자 드디어 영주가 기거하는 성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에신은 모든 게 필요이상으로 컸다. 특히 성은 거인족이 수비에 임한다는 가정하에 설계되었기 때문에 문, 벽, 계단, 모든 구조물이 초현실적으로 거대했다.

“드시지요.”

우리는 소형종족 전용 통로를 통해 안으로 입장했다.

성 내부는 한 마디로 표현이 가능했다. 황제를 예찬하기 위한 만신전이라고.

에사인들이 황제의 권위 아래 복종한다는 걸 갖은 수단으로 표현하는 게 에신에서 예술이 다해야할 책무였다.

긴 복도의 끄트머리에는 일곱 권능의 흉상이 자리했다. 길레악, 아바르, 로켄, 울토르, 오림, 그니르, 그리고 이케이드.

말석인 이케이드는 이제 동상으로밖에 접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래서 대체 어쩌자는 겁니까?”

알현실에 들어서기 전이었다. 쩌렁쩌렁한 노성이 바깥으로 새어나왔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죽자는 겁니까? 듣도 보도 못한 나라가 우리를 도와줄 거라고 믿고요?”

“기엔, 울토르님의 판단에 토를 달지 마라.”

“죄송합니다만 여긴 제 도시입니다, 제가 책임져야 할 백성들입니다! 저는 앉아서 당하기만 하지 않겠습니다. 전사단을 이끌고 출진하겠습니다!”

“만약 그리한다면 다음으로 말뚝에 매달리는 건 네가 될 것이다.”

쾅.

알현실 문이 떨어져나갈 듯이 거세게 열렸다. 머리를 짧게 깎은 노년의 전사가 숨을 씩씩 몰아쉬며, 분노에 휩싸인 채 복도를 가로질러갔다.

기엔이란 자는 이곳의 영주인 듯했다. 그는 적을 요격하는 문제로 대영주와 극심한 의견충돌을 겪는 듯했다.

우리는 니피를 따라 알현실로 들어섰다.

알현실은 암살자 노릇을 하면서 봐왔던 여느 궁성들과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랐다. 아리따운 시녀들은 온데간데없고, 피투성이가 된 홀과 사지가 달아난 채 널브러진 시신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 니피. 무슨 일인가?”

“이졸데님, 대한민국에서 오신 라힐님과 그 수하분들이십니다. 라힐님께서는 현재 에사인을 향한 여정중에 계십니다.”

대영주 이졸데.

그녀는 삼백안을 가진, 젊고 자신만만한 여성이었다. 윤기가 흐르는 금발 머리카락을 허리 아래까지 늘어뜨렸고, 가죽 갑옷과 붉은 망토를 착용하고 있었다.

빛바랜 기억이 희미하게 되살아났다. 그녀는 무척 고귀한 가문의 여식이었다. 내가 이졸데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는 그녀에게 대영주 타이틀이 없었던 듯했다.

“수고했다, 니피.”

이졸데가 턱짓으로 니피를 물렸다.

그녀는 피로 흥건한 바닥을 천천히 가로질러 내게 다가왔다.

“울토르님께서 여러분에 대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곧 우방국 군대가 당도할 거라고 하셨는데, 에사인의 조력을 받게 될 줄은 몰랐군요.”

그녀는 나에 대해 듣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대영주쯤 되면 에사인과 마주치는 게 일상이라지만, 그녀는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배포가 큰 인물인 듯했다.

“전황이 좋지 않습니까?”

“전황도 전황입니다만 연일 멍청이나 겁쟁이들과 싸워야하는 게 절 지치게 만드는군요.”

이졸데가 나뒹구는 시신에 꽂힌 검을 뽑아들었다. 근위전사 한 명이 깨끗한 천을 가져와 그녀가 검을 닦는 걸 도와주었다.

“따라오시죠, 용사님들.”

그녀는 검을 검집으로 되돌리며, 사무적인 미소와 함께 나를 안쪽으로 이끌었다.

알현실 안쪽 방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회의실이었다. 너른 테이블에 주변 지형을 입체적으로 구현한 지도가 놓여있었다.

지도 곳곳엔 깃발이 꽂혀있었는데, 느낌상 도시나 군대의 위치를 표기해둔 것 같았다.

“대한민국은 황국을 도와야할 군사적인 의무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포탈 너머의 상황도 여기만큼이나 복잡한 탓일 테지요. 하지만 개인적인 자격으로 원조를 하는 길은 여전히 열려있다고 봅니다. 황국은 은의를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습니다. 어려울 때 돕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도움이 아니겠습니까.”

그녀는 도움을 구하는 걸 돌려 말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황국은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들은 오만했었다, 세상을 다 가졌기에.

“어떻게 도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배짱 있는 전사를 충당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제가 유일하게 가지지 못한 것이죠.”

그녀가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

“밤이면 밤마다 전사들이 도망을 칩니다. 말뚝을 박아서 경고를 하는데도 그렇습니다. 발만 달린 것들도 그러니 날개가 돋은 것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녀는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꽂힌 깃발들을 순서대로 가리켰다.

“아반, 탈라로른, 다이나르라고 합니다.”

“도시입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덕이 부족하여 아바르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울토르님이 이 긴박한 와중에도 군대를 남부 밀림으로 이동해야만했던 이유가 필시 있을 겁니다. 어쨌거나, 울토르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사이 서부전선이 크게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제 영토 끝자락에 있는 도시 세 개가 함락되었죠.”

울토르는 아바르의 예언을 듣고 우리에게로 왔다.

그 탓에 세 개나 되는 도시가 함락되었다면, 나와도 무관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물론 이졸데도 그걸 알고 하는 말일 터였다. 나를 압박하려고.

“어떤 나라와 전쟁중이십니까?”

“일본입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정기호를 쳐다보았다.

역시 그 시체들은 동양인이 맞았다.

“하지만 그 왜소한 종자들은 자신들을 대일본제국이라고 부르더군요.”

이졸데의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경멸이 묻어나왔다.

“하늘 아래 황제는 오직 에신 템 폐하뿐입니다. 한줌도 되지 않는 소국이 황제를 참칭한 죄가 크다고 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황국은 그저 황국이었다.

달리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었다.

유일한 황제가 다스리는 국가였기에.

일본이 천황을 앞장세워서 에신으로 진출했다면, 다르마알과 붙어먹지 않았더라도 반목은 필연적이었다.

“설마하니 다르마알이 천황을 끌어들였을 줄이야...”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이졸데가 의아하다는 투로 반박했다.

“잘못 알고 계시는군요. 일본은 다르마알의 편이 아닙니다.”

“...일본이 다르마알의 편이 아니라고요?”

“그렇습니다.”

이졸데가 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정말로 모르고 묻느냐는 듯한 눈이었다.

“우리는 이제 막 포탈을 건너온 참입니다. 이곳의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들은 바가 없습니다.”

“좋습니다. 무엇부터 설명을 드려볼까요.”

“일본에 대해서 부탁드립니다.”

나는 에신을 침략중인 모든 나라들이 당연히 다르마알과 손을 잡았을 것이라 여겼었다. 우리의 모든 전략이 그런 상황을 가정하여 세워졌다.

이졸데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불경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겠군요. 아쉬운 건 우리들이니.”

그녀가 속이 쓰리다는 듯이 말했다.

“어디까지나 포로를 고문해서 알아낸 사실입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황제, 천황이라는 자가 신적 존재라고 믿는 듯합니다. 허나 가짜 황제에게 권능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때문에 그들은 그 보잘것없는 인간을 에사인으로 만들기 위해 발버둥치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허황된 신앙을 실재하는 힘으로 바꿀 수 있을 테니까요.”

“.......놀라운 이야기로군요.”

나는 일본 역사에 대해 남들 아는 것만큼만 알고 있다.

천황은 본디 신의 자손 정도로 여겨졌으나, 일본이라는 나라가 제국주의 국가로 탈바꿈하며 살아있는 신으로 의미가 바뀌었다고.

살아있는 신.

에사인을 달리 표현한 말이 아닐까.

“그들은 처음에는 우호적으로 접근해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가짜 황제를 섬기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들이 요구했던 건 농사를 지을 땅 약간이 전부였습니다. 땅을 대가로 그들은 마족들의 문물을 전수해주었죠. 그때만 해도 우리는 그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이졸데의 눈에 노기가 서렸다.

“그러나 그들은 농사를 짓지 않았습니다. 대신 강에 물을 버리거나 구덩이를 파서 쓰레기를 묻는 등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곧 영지민들이 원인 모를 괴질로 쓰러지는 사태가 속출했습니다. 영지민들이 마족의 저주를 탓하며 정착지를 습격하자, 그들은 그것을 빌미로 삼아 기다렸다는 듯이 전쟁을 일으켰죠.”

데자뷰가 느껴졌다.

물을 버리거나 쓰레기를 묻는다는 소리,

문득 일본이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헤드라인이 떠올랐다. 기술력과 비용의 한계로 바다에 방류해버리는 걸 고려중이라는 뉴스였다.

그러나 그들에겐 더 간단한 해결책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방사성물질을 이차원에 내다버린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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