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늪 (7)
일곱 권능의 빈자리를 채우라니.
그것은 그저 하나의 에사인이 되라는 것 이상의 의미였다. 에사인 중의 에사인, 세상을 정의하는 질서가 되라는 요구였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나는 바늘구멍보다 좁은 길을 걷는 중이었다. 우르술라가 나를 버렸다고 해서 나는 그녀를 비난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형제들의 운명을 걸고 위험한 도박을 하는 중이었다. 신중한 스탠스를 취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위한 문을 열어놓은 건 물론이거니와, 나아가야할 방향까지 제시해주었다.
가능성과 불확실성으로 충만한, 새로운 질서를 잉태하는 길을.
그 길은 내가 추구하는 바와 정확히 일치했다.
“알았다. 그렇게 하겠다고 전해줘.”
“역시 너답다.”
우티르가 씩 웃으며 내 가슴팍을 쳤다. 그의 손에는 작은 주머니가 들려있었다.
“이건 뭐냐?”
“뭐긴, 네 유품이지.”
“유품?”
“그림자요새에 남기고 간 물건이다. 뭔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일이십년 전의 일이 아닌지라.
“난 이만 가보겠다. 다시 만날 때까지 죽지 마라.”
“너도 죽지 마라.”
우티르는 내게 주먹을 들어 보인 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오백 명에 달하는 크록 전사들이 공터에 도열해있었다. 오와 열이 잘 맞다고 하긴 힘들었으나, 훈련기간을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로 군기가 잡힌 모습이었다.
무엇보다도 패기가 넘쳐흘렀다. 안 그래도 사납게 생긴 놈들이 뿔 달린 투구를 눌러쓴 채 도리깨나 대검, 곤봉, 대형도끼 등을 쥔 모습이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그들은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겠는지 발을 구르거나 콧김을 내뿜으며 기운을 발산했다.
나는 정기호와 함께 도열한 크록 전사들의 앞으로 나섰다. 크록들은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기며 내게 경의를 표하기 시작했다.
“방봉팔! 방봉팔! 방봉팔!”
크록들의 눈에 광기가 깃들었다. 그들은 단지 내 이름을 부르짖는 것만으로도 주체할 수 없는 영적인 도취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일순간 공터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동시에 압도적인 체구를 가진 크록 한 명이 앞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크록 전사들은 그를 위해 좌우로 갈라져 길을 만들어주었다.
카룩카이.
그는 눈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꺼운 갑옷으로 전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완전히 무장한 그는 살아 움직이는 언덕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크록들은 그의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가 내게로 와서 고개를 숙였다. 원래라면 무릎을 꿇어야했으나, 다리가 짧은 크록의 신체구조상 그런 무리한 동작을 강요할 순 없었다.
“카룩카이.”
나는 그의 콧등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나는 너를 내 전사단을 이끌 대장군이자 내 위명을 만방에 알릴 대사제로 임명하겠다. 이 시간부로 네 영혼은 내게 종속된다. 하지만, 원치 않는다면 물릴 기회를 주도록 하지.”
“나는 너를 따른다.”
카룩카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에게 올려둔 손이 광채를 발하는가 싶더니, 팔을 타고 엄청난 양의 마력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무예의 극치에 도달한 전사였다. 그 정도 되는 그릇을 채운다는 건 지금의 나로서는 상당한 부담이 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종단을 만들려면 튼튼한 들보부터 구해야한다. 그를 종속시키지 못한다면 새로운 질서가 되겠다는 내 목표도 요원했다.
끝나지 않는 듯한 시간이 계속되었다. 나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용천수처럼 넘쳐난다던 마력은 이제 연못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이윽고 빛이 잦아들었다.
카룩카이가 고개를 떨치며 일어났다. 그가 뒤를 돌아보며 포효하자, 전사들은 카룩카이의 이름을 목청껏 연호했다.
“카룩카이! 카룩카이! 카룩카이!”
그는 내가 부여한 마력과 융합하여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났다. 한 차원 더 강하고, 더욱 억세졌으며, 무엇보다도 내 술법체계를 따르는 존재가 되었다.
나는 뿌듯한 마음 반, 허탈한 마음 반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빠져나간 마력으로 인한 탈력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신성한 계약이론에 따라 그에게 나눠준 마력은 그 이상의 힘으로 돌아오겠으나, 완전히 회복하려면 다소간 시일이 걸릴 듯했다.
카룩카이가 물러나자 이번엔 다섯 명의 전사가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카룩카이보다 옅은 비늘을 지녔고 덩치도 조금 더 작았다. 그러나 다른 전사들에 비해서는 충분히 월등하다고 할 만했다.
그들은 ‘1세대’, 즉 카룩카이의 꼬리에서 태어난 축복받은 개체였다.
그들은 기대에 잔뜩 부푼 눈을 하고 내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들에게도 차례로 축복을 내려주었다.
그들에겐 장군, 혹은 부대장의 역할이 주어졌다. 총병력이 고작해야 오백 남짓한 지금엔 백인장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지만, 훗날에는 당당히 일군을 이끌 자들이었다.
다섯 전사에게 축복을 마무리하자 나는 완전히 탈진하고 말았다. 안간힘을 다하는데도 도저히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 이름만을 미친 듯이 부르짖는 신도들 앞에서 쓰러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수고했다.”
갑자기 누가 내 등을 받쳐주었다. 정기호였다. 그는 내 상태가 어떤지 알고 있다는 눈치였다. 그는 대검을 뽑으며 나를 대신해 큰 소리로 외쳤다.
“전진하라!”
드디어 행군이 시작되었다. 크록들은 기세등등하게 나아가며, 거치적거리는 나무는 무기로 후려쳐서 꺾어버렸다.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길이 생겨나는 중이었다.
나는 정기호의 부축을 받아 후열에 합류했다. 머지않아 나는 혼자서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고맙다.”
“고마우면 밥이나 사.”
그가 선글라스를 쓰며 말했다.
“뭐 좋아하냐?”
“뭐든 싼 거는 안 먹는다.”
...여전히 재수 없는 놈이었다.
우리는 사흘 낮 동안 행군한 끝에 마침내 정글을 벗어날 수 있었다. 정글의 막바지에 다다를수록 채광이 좋아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거짓말처럼 탁 트인 평원이 나타났다.
“휘유.”
정기호가 옆에서 휘파람을 불었다.
마치 이곳이야말로 새로운 세계와 통하는 포탈인가 싶었다. 난생 처음으로 평야를 보는 크록들은 대열을 흩뜨리며 해수욕장에 놀러온 꼬맹이들처럼 요란을 피웠다.
도시는 지평선 끝점에 위치해있었다. 부지런히 걸으면 서너 시간 정도 걸릴 듯했다.
머지않아 정찰병이 보고한 말뚝지대가 나타났다. 수많은 시체들이 말뚝에 매달린 채 날짐승에게 끼니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크르륵?”
크록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뚝 위를 쳐다보았다. 먹거리를 왜 벌판에 매달아두는지 모르겠다는 거겠지.
도시가 점점 가까워져갔다. 사통으로 길이 뚫린 도시인데도 통행량이 전무했다. 길 위를 걷는 건 오직 우리들뿐이었다.
조금 더 다가가자 도시가 얼마나 엄중한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는지가 눈에 들어왔다. 망루 위엔 비익족 비행전단이 출격 대기중이었고, 투석기나 발리스타 등이 우리를 조준하는 것도 보였다.
사진으로 현판이 식별되지 않았던 이유도 드러났다. 최근에 보강했는지, 나무와 흙으로 올린 외벽이 성벽을 한 겹 더 두르고 있었다.
정문이 백 걸음 남짓했을 때였다. 비익족 전사 다섯 명이 푸드덕거리며 머지않은 곳에 착지했다.
그들의 리더격인 듯한 인물이 내게 외쳤다.
“멈추시오, 여기서부터는 허락 없이는 접근할 수 없소!”
나는 크록들에게 수신호로 정지 명령을 내렸다. 비익족들은 우리를 엄청나게 경계하는 중이었다.
평범한 크록조차 신화속의 존재일 터인데, 그들 중에서도 강력하다는 전사형 개체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
“나는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왔다. 이곳의 영주와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
“대한민국? 당신들이 대한민국의 군대란 말이오?”
“그렇다.”
그다지 놀라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우리에 대한 언질을 받았던 것 같았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오?”
“라힐이다.”
“미안하지만 그런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소. 우리가 아는 거라고는...”
“방봉팔이겠지.”
“그렇소만.”
“그게 나야.”
“좋소. 돌아가서 당신의 방문에 대해 알리겠소. 그러나 당신 군대는 바깥에 두시오. 군주께서 허락하기 전까지는 당신 혼자만 우리 도시에 들어올 수 있소.”
“안될 것 없지.”
비익족들은 다시 성벽 위로 날아갔다. 머지않아 거대한 성문이 득득 바닥 긁는 소리와 함께 좌우로 열어젖혀지기 시작했다.
성문을 여는 건 키가 30미터도 넘을 듯한 평지거인이었다. 옷에 아무런 표식도 없는 것으로 보아 고용된 용병임에 분명했다.
성문 안쪽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엿보였다. 전사가 대부분인 와중에 마법사나 주술사로 보이는 자들도 제법 되었다.
“별거 없는 것 같은데.”
정기호가 팔짱을 끼고는 태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녀오마. 애들 잘 단속하고 있어라.”
나는 홀로 보무도 당당히 나아갔다. 성문은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열릴 때보다 한층 빠른 속도로 좁혀졌다.
쿵.
바깥과 나를 완벽히 격리하는 소리였다.
나는 수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였다. 그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고는 경계심이나 적대감 등 부정적인 것들뿐이었다.
“그대가 방봉팔인가?”
그들의 선두에 선 전사가 큰 소리로 물었다. 그는 최소한 한 전사단을 이끄는 인물로 보였다. 장비 상태가 뛰어난 건 당연했고, 갑옷 아래 덧입은 옷도 호사스럽기 그지없었다.
“라힐.”
나는 그들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라힐이라 불러다오.”
표정으로 짐작컨대 그는 내 말투를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듯했다. 그는 연장자이고, 지위도 높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지위가 아무리 높다한들 차기 에사인보다 높을 순 없었다. 나는 일곱 번째 권능이 되기 위해 이곳에서부터 명망을 쌓아나가야만 했다.
“좋다, 라힐. 우리에겐 네가 다르마알의 권속이 아니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그걸 증명해줄 수 있겠나?”
“물론 나는 다르마알의 하수인이 아니다.”
“그러면 네 마력은 누구에게 받은 것이냐?”
“아무에게도.”
그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특히 마법사와 주술사들이.
나는 그들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마력은 내게서 기인했다.”
“거짓이다!”
늙은 마법사가 수염을 바르르 떨며 내게 손가락질했다.
“저자의 마력은 왜곡되어있다! 저자는 거짓을 고했다!”
마법사는 내가 술법사용자라는 걸 한 눈에 꿰뚫어보았다. 마법사는 주술사와 마력의 성질이 판이하게 달랐다. 그들은 대자연의 기운을 외부에서 끌어오기 때문에, 훨씬 정순하고 경향성이 없는 마력을 다뤘다.
즉시 전사가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 백여 명에 달하는 전사들이 동시에 임전태세를 갖췄다. 하나하나가 강해보이진 않았으나, 훈련의 정도만큼은 감탄이 나오는 수준이었다.
“라힐.”
귀족 전사가 긴장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네 마력은 누구에게서 받은 것이냐?”
나는 그들을 어떤 방식으로 설득할까 잠시 고민해보았다. 단순히 무력시위를 벌일 수도 있겠으나, 아직 빠져나갔던 힘이 다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주술사들과 한바탕 난상토론이라도 벌여야할 판국이었다.
“미련한 놈 같으니.......”
누군가가 혀를 차며 군중의 앞으로 나섰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여사제였다. 법복에는 두 번째 권능을 상징하는 눈 모양의 심벌이 수놓아져 있었다.
사람들은 분분히 뒤로 물러서며 노파를 위한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노파는 손에 든 지팡이로 귀족 전사의 머리통을 다짜고짜 후려쳤다.
“이 미련한 놈아!”
“왜, 왜 그러십니까, 아무리 니피님이라도 제게 이럴 권리는 없습니다!”
귀족 전사가 얼굴을 붉히며 항변했다. 사제는 아랑곳 않으며 그를 나무랐다.
“네놈은 그 쓸모없는 눈깔을 뽑아버리는 게 낫겠다. 어찌 에사인의 진신을 접하고도 몰라볼 수가 있다는 말이냐?”
“예에?”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맹한 소리를 내었다.
노파는 그를 무시하며 내게 무릎을 꿇었다.
“아바르님의 미천한 종복인 니피라 하옵니다. 아바르님께서는 라힐님께서 에사인으로 향하는 여정에 접어드신 걸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전하셨습니다.”
아바르,
두 번째 권능.
운명의 주관자인 그녀가 여기까지 내다봤을 줄이야.
“고맙다고 전해주시죠.”
니피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 전사가 떨떠름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갈등은 오래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무릎을 꿇자,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