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늪 (6)
“그렇군, 납득했네.”
“박과장님.”
가만히 지켜만 보던 작전장교가 손을 들었다.
“한데 이 사람들이 전쟁중이라면 우리 입장이 애매해지는 게 아닙니까? 황국과 체결한 조약은 불가침협정일 뿐입니다. 괜히 길을 냈다가 우리까지 전쟁에 휘말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무역협정도 맺었다는 걸 잊지 말아야지. 우리가 하달 받은 명령은 무역루트를 만들라는 거야.”
대령이 반박했다. 작전장교는 물러서지 않았다.
“도시가 전선에서 멀지 않다면 민간 무역상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민간인 사상자가 나오면 그때는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대령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작전장교를 쳐다보더니, 내게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장교들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군인은 기본적으로 명령을 따를 뿐이다. 그들은 민감한 정치적 사안을 자의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
도로를 내기 시작한지 어언 한 달 째였다. 무려 한 달 동안이나 판단을 대신해줄 관료를 내려 보내지 않았다는 건, 정부가 나를 중심으로 한 자치권을 암묵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나는 판단을 내리기 전에, 혹시 놓친 게 없는지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 사람.”
나는 말뚝을 근접해서 찍은 세 번째 사진을 가리켰다.
“동양인같지 않습니까?”
“어디 보게.”
대령과 장교들이 사진을 돌려가며 살피기 시작했다. 시체는 발가벗겨진 채였고, 부패가 상당히 진행되어 용모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굳이 인종을 유추해보자면 체형이나 체격 등 동양인이라 볼 수 있는 소지가 다분했다.
“...애매하구만.”
“신성한 묘를 더럽힌 죄.”
정기호가 말뚝에 걸린 팻말을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황국인이라면 결코 범하지 않을 죄다. 에사인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지.”
“일본, 중국, 베트남중 하나겠네.”
세 나라 모두 우리나라의 주요무역국이었다. 언젠가 에신 황국으로 라인을 갈아탈 수 있을지 몰라도, 아직은 그들을 적으로 돌릴 때가 아니었다.
“이렇게 하죠. 특전사 여러분들은 후방으로 돌아가서 베이스캠프를 지킵니다. 교섭과 전투에 나서는 건 경호과 소속으로 한정하겠습니다. 무역은 전선을 뒤로 밀어낸 다음에 개시해도 늦지 않다고 봅니다.”
“자네들끼리만 간다면 운전은 누가 하나?”
“도보로 갑니다. 혹시 모르니 총기도 두고 가겠습니다.”
“황국을 거들 셈인가?”
“상황부터 봐야겠죠.”
“알겠네.”
대령이 별말 않고 수긍했다. 베이스캠프에는 연구시설과 배양시설이 밀집해있다. 정글을 개간하고 영토를 넓히는 일도 산적해있었다. 그곳을 관리감독하는 것도 누군가가 해야만 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날따라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머지않은 거리에 황국 도시가 위치했다는 것 때문인 듯했다. 이제 내겐 그런 감성이 남아있지 않을 줄 알았다.
나는 자꾸만 자리를 뒤척이다가 잠에 드는 걸 포기했다. 나는 막사 문을 열고 나와 별빛이 내리쬐는 숲길을 걷기 시작했다.
찌릭찌릭찌릭.....
이름 모를 벌레들, 야생동물들이 여기저기서 부산을 떨었다. 바람은 어찌나 쌀쌀한지 한낮의 더위가 거짓말 같았다.
나는 어쩐지 낯선 기분이 들어 그만 걸음을 멈추었다. 에신이 낯선 게 아니었다. 그림자를 떠난 내가 낯설었다.
오데르의 흙구덩이를 올라왔을 때부터 죽고 다시 태어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림자는 내게 손이나 발과도 같았다. 나는 자의로 손발을 잘라낸 셈이었다. 물론 그 자리에 더 크고 강한 팔다리가 돋아나긴 했으나, 아직은 내 사지 같지가 않았다.
이 감각도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타인의 죄과를 감지하는 감각.
누군가가 나무 사이를 미끄러지듯 스치며 다가왔다. 나는 그의 정체를 파악하기는 고사하고 육안에 넣지도 못했다. 그는 완벽에 가까운 은밀기동능력을 지녔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가 지닌 죄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업이 깊은 자였다.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쉬이익.
매서운 찌르기가 뒷덜미를 향해 뻗어왔다. 그는 필살의 일격을 날리면서도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돌려 그의 공격을 피해냈다. 그는 까만 옷으로 전신을 두른 채 두 눈만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스쳐간 건 아주 잠깐이었다.
그는 내가 비무장이라는 걸 공략하기 위해 거리를 벌리며 위력적인 찌르기를 잇달아 시도했다. 그는 오데르의 검이었다. 찌르기를 이토록 사랑하는 전사단은 달리 없었다.
그의 검극은 내 심장에서 한 뼘을 벗어나지 않았다. 집요하다 못해 진저리가 쳐질 정도였다.
“하!”
찌르기가 통하지 않는 듯하자, 그가 기합을 넣으며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림자병사 소환술.
우르술라가 그리했듯이, 그림자는 더 짙은 그림자로 덮어씌우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나는 오데르를 내다버렸기 때문에 그 방법을 쓸 수 없었다.
잠깐 주춤한 사이 소환술이 발동하고 말았다. 그림자가 내 의지를 거스르며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하는 입장이 되어보니 그림자술법이 얼마나 상대하기 까다로운지 절감되었다.
그가 움직임이 봉쇄된 내 가슴을 노렸다. 이번에는 나도 별 수가 없을 듯했다. 나는 술법을 힘으로 뜯어내며 그의 옆구리에 강력한 훅을 먹여주었다.
빠드득.
로브 아래에 덧입은 가슴방어구가 박살나는 소리였다. 그는 끈 떨어진 연처럼 날아가 나무둥치에 몸을 부딪치며 나동그라졌다.
마치 얼마 전의 나를 보는 듯했다. 마그나크록의 장군에게 한 대 맞고 뻗어버렸던.
장군과 나의 차이점이라면, 나는 임팩트의 순간 힘을 빼줬다는 거.
응징의 일격.
상대의 죄업이 무거울수록 위력이 강해지는 공격형 술법이다. 상대가 한없이 선한 자라면 내가 소유한 마력만큼만 피해를 가하고, 상대가 한없이 악한 자라면 기술의 위력도 가늠하기 힘들어진다.
여기서 말하는 죄업이란 나를 기준으로 삼았다.
그는 내 기준으로 죄업이 무척 깊은 자였다. 힘을 빼지 않았다면 방어구와 함께 흉곽까지 작살내놓을 수도 있었다.
“젠장, 쿨럭, 쿨럭...!”
그가 요란하게 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그는 입가에 묻은 피를 훔치며 두건을 벗었다.
아는 사람이었다.
“우티르.”
나와 마지막 살행을 함께했던 전우. 그는 심지어 헤어스타일조차 바뀌지 않았다. 하얀 머리카락이 아직도 귀를 덮지 못했다. 그는 변한 게 없건만 나는 너무나도 많은 게 바뀌었다. 몸부터 해서 이름이며 기억까지.......마치 기나긴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는 너는 라힐이겠지.”
그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오데르를 버렸다는 게 사실이었군.”
그가 차갑게 조소했다.
“더러운 배신자 같으니.”
그가 검을 들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가만히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내 코앞까지 다가와 검을 내던졌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죽은 줄 알았잖아, 새끼야.”
“진짜 죽었었어.”
“닥쳐, 안 죽었으니까.”
그가 몸을 떼놓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한 차례 더 뜨겁게 얼싸안았다.
나는 조금 어색한 기분도 들었다. 그에게는 내 죽음이 생생하겠지만, 나는 그를 상실한 게 어언 수십 년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나쁜 기분은 결단코 아니었다. 우르술라에 이어 우티르까지. 나를 기억하는 사람을 만날수록 잃어버렸던 자아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래, 나는 이랬던 사람이었지.
“누님이 널 만나거든 싸워보라고 하더라. 절대로 못 이길 거라고. 웬일로 안 하던 농담을 다 하시나 싶었다.”
우르술라의 얘기를 듣자 심장이 또다시 두근거렸다.
다시 만난 그녀는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다른 말은 없었고?”
“많았지. 이 얘길 먼저 해야겠다. 누님이 날 보자마자 멱살을 딱 쥐더니 그러셨다. 임무는 때려치우고 당장 스트리아 남부 밀림으로 내려가라고. 네가 죽은 후로 누님이 웃는 걸 그날 처음 봤다.”
“그럴 리가.”
“사실이다.”
우르술라의 웃음은 두 가지를 의미했다. 정말로 기쁘거나, 아니면 살의가 충만해졌거나.
전자의 경우는 쌍무지개가 뜨는 날만큼이나 드물었다.
“그리고 네게 답을 듣고 오라던데. 네가 바란다는 질서가 무엇인지. 왜 누님이 네 그림자가 되어야만 하는지.”
- 나는 혼돈을 몰아내고 이 땅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올 겁니다. 그때 내 그림자는 당신이어야 합니다.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낯부끄럽기 그지없는, 듣기에 따라서는 고백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들려줄 답을 찬찬히 정리해보았다. 그녀를 만난 후 시간을 두고 다듬어온 생각이었다.
“오데르는 내 형제를 품을 자격이 없어.”
“.......”
우티르가 놀라움으로 눈을 크게 떴다.
“그놈은 우리더러 자기 자식이라는데, 우린 흙구덩이에서 기어 올라온 어둠의 사생아일 뿐이야. 구덩이를 판 게 그놈이라면 우리를 이렇게 만든 원죄가 있다고 봐야 돼. 우리에겐 우리만의 에사인이 필요해. 우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우리 중 하나가.”
“.......알았다.”
우티르가 진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님의 전언이다. 네 대답이 마음에 들면 전해주라고 하셨지. 누님은 형제들의 미래에 대해 밤낮으로 고민하고 계신다. 누님은 너와 함께하는 길이 우리의 대안이 될 수도 있다고도 하셨다.”
“진짜냐.”
“벌써부터 좋아하진 마라. 누님은 아직 오데르를 버릴 생각이 없으시다. 그러기에는 네가 너무 약해. 너는 네가 어떤 존재들을 적으로 돌렸다고 생각하고 있냐? 지금 당장 이 자리에 오데르가 나타난다면 일 초나 버틸 수 있겠냐?”
“아직은 무리겠지.”
“우리를 그림자로 삼으려면, 먼저 걸맞은 자격을 보여 봐.”
우티르가 다시 두건을 뒤집어썼다. 그는 떠날 차비를 하며 내게 말을 이어갔다.
“현재 일곱 번째 권능이 공석이라는 걸 알고 있을 거다.”
“들었지. 울토르가 직접 경고하더라. 형제들이 암살했다던데.”
들으면서도 쉽게 믿기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일곱 권능이란 세상을 떠받치는 질서였다. 울토르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면 악의가 담긴 거짓말이라고 여겼을 것 같다.
울토르는 아직 그 사실을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고도 말했다. 만약 권능 중 한 자리가 공석이라는 게 널리 알려진다면, 다르마알이 바라는 혼돈이 들불처럼 퍼져나갈 것이다.
“대륙의 역사에 길이 남을 살행이었다고만 말해주마. 네가 그 자리에 없어서 정말로 아쉬웠다, 라힐.”
우티르가 그때를 추억하듯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그 빈자리에 들어가라.”
“뭐?”
“네가 일곱 번째 권능이 돼라. 그날 우리가 네 그림자가 되겠다는 게 누님의 전언이다.”
그가 나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