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늪 (3)
글피아.
장르문학의 성지라는 거창한 슬로건을 내건 곳이었다. 나는 사이트 앱을 다운받아 구동해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케케묵은 인터페이스였다. 수많은 광고들이 시선을 강탈하는 와중에 화면 오른쪽 위에 조그맣게 검색창이 보였다. 검색창에 아약이라고 써넣자 소설 하나가 표시되었다.
- 환생 권하는 사회
작가가 사망한 후 연재가 끊긴 소설이었다. 어차피 소미 스케줄이 끝나려면 시간이 남았는지라, 나는 1편을 클릭해 처음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어느 틈에 바깥이 어둑어둑해졌다. 집중하는 사이 몇 시간이 훌쩍 흘러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의 소설이었다.
작가는 우리 모두에게 전생이 있다고 가정했다. 영혼은 수레바퀴처럼 돌고 돈다, 다만 기억하지만 못할 뿐이라고.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생을 떠올려내기만 한다면 과거의 지식과 능력을 활용해 남들 위에 우뚝 설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전생을 떠올리기 위한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제시했다.
임사체험을 하거나, 최면요법을 쓰거나, 혹은 신에게 제물을 바치던가.
주인공이 쓴 건 세 번째 방법이었다.
소설에 따르자면 세상은 질서와 혼돈이라는 두 신에 의해 균형이 유지된다. 질서는 우리들이 전생을 떠올려내는 걸 원치 않았다. 혼돈은 그 반대였다. 전생의 기억을 되찾으려면 혼돈을 기쁘게 해야만 했다. 세상에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어야만했다.
백수였던 주인공은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 전생의 기억을 한 조각씩 되찾아갔다. 그는 소설 후반부에 이르러 마침내 모든 기억을 떠올려낼 수 있었다. 그는 전생에서 이차원을 지배하던 위대한 존재였다고 한다.
혼돈의 에사인, 다르마알.
나는 이 대목에서 책을 내려놓았다.
설마하니 다르마알은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엮어냈다는 건가?
모르겠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가려낼 수가 없었다. 환생자 입장에서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으나, 독자 입장에서 이 글은 잘 쓰인 장르소설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주인공 사패임. 시원시원해서 보는 맛은 있음.
- 다 때려죽이는 거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
- 제목이 안티임.
댓글들을 살펴봤으나 누구도 소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확실한 건 아약이 프로젝트와 연관된 모든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소설을 권하고 다녔다는 점. 술법의 힘을 탐내던 김신우 박사는 이걸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고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었다.
띠리리리.
소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글을 읽느라 약속했던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 여보세요.
- 아이, 오빠.
- 미안, 늦어버렸네.
- 저 오빠 주려고 빵도 준비했었는데. 병문안 가려고 사뒀던 거.
- 잘 보관해둬. 나중에 먹을 거니까.
- 싫어요. 유통기한 지날 거 같으니까 내가 다 먹어버릴 거야.
소미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 너 내가 오데르하고 결별한 후로 빈털터리가 됐다는 얘긴 들었지.
- 그럼 소문이 사실이었어요? 오빠 진짜...
- 제정신이냐고는 묻지 마. 정기호가 충분히 물어봤으니까.
- ...용감하세요. 전 무서워서 절대 그러지 못했을 거예요.
진심이 느껴졌다. 나는 머쓱한 목소리로 물었다.
- 그래서 나도 너처럼 자신만의 술법을 개발해야 할 것 같은데, 방법을 가르쳐줄 수 있을까.
- 음, 카둔께서 가르쳐주신 길이 하나 있긴 해요.
- 카둔이?
- 제가 에사인이 되는 걸 응원해주고 계시거든요. 오빠만큼이나.
- ...놀라운걸.
카둔은 자기 성도가 에사인을 향한 여정에 올랐는데도 내치기는커녕 지원을 해주는 모양이었다. 오데르와는 차원이 다른 배포였다.
- 카둔께서 그러시길 술법을 만드려면 먼저 유죄 여부를 판단하래요.
- 유죄라니?
- 왜, 살다보면 누구나 거슬리는 것들이 생길 수 있잖아요. 그런 것들 중에서 도저히 이것만큼은 못 참겠다, 다른 사람에겐 몰라도 나한텐 정말로 아니다 싶은 거.......그걸 알아야만 술법이 만들어져요.
- 잘 감이 안 오는데.
- 저 같은 경우는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이유 없이 괴롭히는 게 유죄에요. 다른 일은 내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이것만큼은 저에게 있어서 그냥 넘길 수 없는 죄죠.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녀는 귀족들에게 모진 고문을 받고 죽었다. 그녀는 누군가가 힘이 약하다는 이유로 고통받는 상황을 남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술법이 어떤 형태로 만들어질지는 아무도 몰라요. 각자 생각하는 게 다르고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니까요. 그래서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를 아는 게 중요해요. 뭘 싫어하는지도요. 저 같은 애도 해냈으니 오빠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을 거예요.
- 고맙다.
- 빵 진짜 남겨둬요?
- 당연하지. 난 상한 것도 잘 먹으니까.
- 어련하겠어요.
통화가 끝났다. 그녀는 내가 쉽게 해낼 거라고 장담했지만, 나는 만만찮은 일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나는 평생을 암살자로 살아왔다. 나는 세상 대부분의 일에 무감각해지는 법을 연마했다.
나는 살아갈 날이 창창한 사람을, 군주의 사생아를, 부도덕한 자의 의뢰를 받아 정의로운 자를 죽였다.
나는 악덕이 미덕의 탈을 쓰고, 불의가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약자의 눈물이 강물을 이루는 세상을 그러려니 하고 살아왔다.
이런 내게 대체 어떤 일이 유죄일 수 있을까?
나는 간만에 서울 소재의 자취방에 들렀다. 두어 달 방치된 우편함엔 공과금 청구서가 빼곡하게 꽂혀있었다.
수상한 기미를 느낀 건 문 앞에 도착하고서부터였다. 분명 문단속을 했을 텐데, 문짝이 휑하니 열려 덜컹거리고 있었다.
방 안은 더 엉망진창이었다. 태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듯 멀쩡히 붙어있는 집기가 없었다.
그리고 난장판이 된 방 한가운데 한 남자가 서있었다. 해골처럼 깡마른, 값비싼 회색 정장을 입은 사내였다.
김신우 박사.
얄팍한 입술에 숨길 수 없는 기쁨이 가득했다. 그는 나를 보더니 상체를 깊게 숙이며 연극을 하는 듯한 톤으로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신지, 박과장.”
“집으로 초대를 드린 기억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꼭 초대를 받아야만 올 수 있는 것도 아니잖나.”
그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당황스럽지? 당신이 느끼는 그 당혹감이 바로 얼마 전에 내가 느꼈던 당혹감이야. 술법을 쓸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특권층 행세를 하려는 당신을 보고 내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한 번 생각해보라고.”
“많이 엇나가셨군요. 열등감 때문인가요?”
“열등감이라니, 천만에.”
김신우가 강하게 부정했다.
“그보다는 위기의식이지. 기억할 거야, 당신이 술법은 맹목이라고 했을 때 정신이 번쩍 들더군. 아, 운 좋게 전생의 기억을 거머쥐고 태어난 놈들이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으려 하는구나. 내가 죽기 살기로 노력해서 성취한 건 휴지조각이 되고, 당신 발가락이나 핥는 놈들이 득세하겠구나 싶었어.”
“휴지조각이 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누가 뭐라고 해도 저명한 의학박사일 텐데요.”
“그러는 국회의원들은? 그 사람들은 나보다 덜 배워서 당신 앞에서 쭈구리가 되었나? 입에 발린 말은 집어치우라고. 당신이 아무리 부정해도 세상은 이제 술법만이 전부니까.”
“그래서 고른 게 다르마알이로군요.”
“왜, 좆 같은 힘, 좋은 힘이 따로 있어? 좆 같이 쓰면 좆 같은 힘이고, 좋게 쓰면 좋은 힘 아니야?”
“다르마알은 혼돈의 흉신입니다. 당신은 그에게 이용당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봐, 당신 말만이 진리인줄 아는 멍청이들과 같은 취급하진 말자고. 이젠 이 바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보다 지금 심정이나 좀 말을 해보지 그래. 어때? 난생 처음으로 생득권을 내려놓은 기분은. 다시는 날 깔보고 싶어도 깔볼 수 없게 됐는데, 허전하고 그러진 않나?”
그는 술법을 가르쳐달라는 요청을 퇴짜 놓았던 게 못내 한이 맺혔던 모양이다.
그 같이 불안정한 인간을 포섭하는 건 손바닥 뒤집듯 간단했을 것이다. 한 줌의 마력만 쥐어줘도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 들었겠지.
“그래서 어쩌겠다는 겁니까?”
“어쩌기는. 당신을 죽여야지, 그래서 내가 차기 총독자리에 더 적합하다는 걸 널리 알려야지 않겠어. 너무 억울해하진 말라고. 술법으로 얻어낸 자리니까 술법으로 뺏겨도 할 말 없는 거잖아?”
김신우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날 죽여서 자신의 적합성을 알리겠다니,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혼돈의 힘에 사로잡힌 광인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걱정 말라고. 사고사로는 만들어줄 테니. 나한테도 그 정도 양심은 있어. 그리고 차수진 그 건방진 계집년. 그 년에게는 본때를 보여줘야겠지. 그 년은 순순히 죽이지 않을 거야. 먼저 그 년을 데려와서...”
“좀 조용히 하시죠.”
나는 불쑥 그의 말을 끊었다.
“...방금 뭐라고?”
그가 사납게 반문했다. 그의 표정이 급격히 일그러지더니, 혼돈의 마력이 손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건 분명히 사람을 죽일 순 있는 힘이었다. 아주 집요하게, 반복적으로 투사한다면.
“아직 네 위치에 적응하지 못했나본데, 나는 널 죽이겠다고 분명히 경고했다.”
“뭡니까, 아까는 힘을 좋게 쓴다더니.”
“닥쳐!”
그가 사납게 외치며 내게 다섯 손가락을 쭉 뻗었다. 어떤 술법이 발동되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다.
“.......뭐지?”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반대로 나는 점점 심기가 불편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다르마알의 유혹에 넘어간 잔챙이에 불과했다.
나를 죽이려고 드는 거?
그랬던 놈은 여태 셀 수조차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난히 그가 거슬렸다.
대체 무엇일까, 이 추물이 유독 살기를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죽어!”
그가 다시 손가락을 뻗었다. 아마 장기에 영향을 미치는 종류의 술법인 듯했다. 상대의 신체에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려면 우선 상대에게 내재된 마력의 벽을 뚫어내야만 했다. 그러나 그와 나의 마력 격차는 절망적이었다. 비유를 하자면 망망대해에 돌멩이 하나를 투척한 격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그분께서 내게 약속한 건 이게 아니었는데.......”
그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자신감이 넘치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다르마알에게 속았다는 걸.”
“하, 하지만.......”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심지어 눈물마저 글썽이는 중이었다.
나는 오른손바닥을 서서히 위로 들어올렸다. 곧 오른손을 중심으로 막대한 양의 마력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널브러졌던 집기들이 마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 거대한 띠를 이루었다. 벽지가 쫙쫙 뜯겨져 나가고, 지붕이 무너질 듯이 들썩거렸다.
“이, 이건 대체...”
그가 입을 쩍 벌리며 뒤로 넘어졌다.
나는 그의 겁먹은 눈동자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머리는 차가웠지만, 가슴은 뜨거웠다. 뜨거운 가슴을 따라 마력이 스스로 나아가야할 방향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술법에 대한 나만의 정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젠 알겠다.
힘에 도취되어 인간임을 망각한 죄,
그게 내게 유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