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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39화 (39/205)

39화. 늪 (2)

“네에? 십만이나요?”

그녀가 벙 찐 표정을 지었다. 예상그대로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곧 전쟁을 치러야할지도 모른다. 다른 나라를 상대로 우리가 점할 수 있는 유일한 이점이 바로 크록이었다. 강하고, 민첩하고, 고기만 잘 먹이면 주마다 두 배씩 늘어나는, 모든 지도자가 탐낼만한 이상적인 군인.

“어렵겠습니까?”

“잠깐만요, 진심이신 거죠? 그러면 따져볼 것들이 있어요.”

그녀가 손가락을 주판 튕기듯 까딱이며 암산을 시작했다.

“일단 부동산 매입비는 안 들겠네요. 여긴 깃발만 꽂으면 우리 땅이니까요, 크록은 습기만 맞춰주면 아무데서나 잘 사니까 건축비도 절감될 테고요. 피복이나 무장도 예산 내에서 될 것 같은데, 문제는 역시 식비예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죠, 과장님 신도분들이 정말 많이 먹는다고. 십만 명이나 되는 크록을 먹여 살리려면 먼저 현지 동물들을 가축화하는 프로젝트를 성공시켜야 해요.”

“가축화 전엔 몇이나 부양이 가능합니까?”

“글쎄요, 지금 예산으로는 천.......무리하면 이천 정도일까요.”

“너무 적군요. 그 가축화 연구라는 걸 빨리 끝내야겠습니다.”

“그런데 어쩌죠? 하필 불이 나는 바람에 연구자료가 많이 날아갔거든요. 다들 서류는 뒷전이고 탄약이나 챙기러 가는 바람에......”

“지금부터라도 속도를 내주십시오. 예산이나 인력은 제가 윗선에 부탁을 드려보겠습니다.”

“과장님.”

“예?”

“사랑한다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불순한 사랑은 거절합니다.”

“불순하다뇨, 순수한 학구열인데.”

“그래서 불순하다는 겁니다.”

차수진이 혀를 내밀며 귀엽게 웃었다.

나는 병상을 나와 김송화의 공방부터 찾았다. 공방은 방재대책이 워낙 잘 되어있어 화마가 건드리지 못한 몇 안 되는 건물로 남았다.

“아, 자네로군.”

김송화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날 맞이해주었다.

“자네가 오면 놀라게 해줘야겠다고 벼르고 있었지.”

“좋은 소식이라도 있으십니까?”

“받게, 내 역작일세.”

김송화가 강철로 만들어진 가슴방어구를 건넸다. 손으로 들어올리기만 했을 뿐인데도 그가 지금까지 만들었던 물건과는 격이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좀 더 가벼웠고, 더 탄탄했다. 무엇보다도 갑옷 상판에 카둔의 상징이 떡하니 새겨져있었다. 이것은 그가 카둔에게 실력을 인정받아 본격적으로 무구를 축성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대단하군요.”

나는 진심을 담아서 감탄했다. 이것은 한국인이 에사인의 힘을 빌어 만든 최초의 마법무구였다.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고 보아야했다.

“한 번 시험해보게.”

그가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겠습니까? 방금 어르신의 역작이라고...”

“괜찮아, 부서지면 또 만들면 되니까. 무엇보다도 오늘은 내가 자신이 있어서 그러네.”

그는 자신의 작품에 정말로 자신감이 넘쳐보였다. 나는 방어구를 벽에 과녁처럼 걸어둔 뒤 장검을 빼들었다.

우우우웅.......

검날이 부르르 떨며 은은한 빛무리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흡사 광선검을 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력의 총량만을 따질 것 같으면 이전보다 훨씬 강력해진 게 명백했다.

“......”

나는 진동하는 검을 쥔 채 하염없이 갑옷만을 노려보았다.

오데르의 창.

손바닥 지문이 닳도록 단련했던 기술이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마력을 이동시켰는지, 근육과 마력이 어떤 상호작용을 일으켰는지, 한때 본능이었던 것들이 지금은 백일몽처럼 아련하기만 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마력은 차고 넘치건만 기술을 쓸 수가 없다니.

결국 기술을 쓸 수 없다면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온 힘을 담아 최단거리를 최단시간으로 관통하는 것.

나는 오른발을 뒤로 빼어 찌르기 자세를 취한 뒤, 검의 극점으로 카둔의 심벌 정중앙을 강타했다.

뻐어억.

굉음과 함께 건물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이 들썩거렸다. 연장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쏟아져 내렸고, 용광로는 벌건 쇳물과 함께 춤을 추었다.

갑옷은 더 이상 갑옷이 아니었다. 갑옷 상판은 찢겨나가 형체조차 남지 않았다. 나머지 부위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한 장의 철편처럼 접혀버렸다.

“......어째 불길하더라니, 이렇게 되고 마는구만.”

김송화가 탄식을 흘렸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나는 일단 사과부터 했다. 검압이 일으킨 후폭풍 때문에 대장간 꼴이 말이 아니었다.

“아닐세, 죄송하긴 무슨. 아직 자만할 때가 아니라고 일깨워주지 않았나. 좋은 가르침이 되었다네.”

김송화는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었다. 나는 고의로 이 사달을 벌인 게 아니었다. 놀란 건 내가 더했다. 설마하니 평범한 찌르기가 오데르의 창보다 강할 줄이야.

쉽사리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마력이 용천수처럼 넘쳐나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어떤 에사인의 소유도 아닌, 내 색으로 물들일 수 있는 무색무취의 마력.

이 정도 힘이라면 우르술라와 호각, 어쩌면 그 이상의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럴 줄 알고 한 벌 더 만들어놓길 잘했지. 받게나.”

김송화가 내게 짓뭉개진 갑옷과 동일한 디자인의 갑옷 한 벌을 건네주었다.

“그나저나 다음 테스트는 야외에서 해야 할 것 같군. 방금 그 일격을 버틸만한 놈을 만들면 그때 또 알려주겠네.”

“기대하겠습니다.”

“혹시 다른 필요한 건 없나?”

나는 손에 쥔 장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우르술라와 치고받았던 탓에 검신 여기저기 이가 빠져있었다.

“크고 무거운 무기는 어떨까 싶군요. 잘 망가지지 않는.”

나는 대장간에 걸린 무구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크고 무거운 거야 많지. 크록들이 중병기를 선호하니 말일세.”

“저런 것도 괜찮아 보입니다.”

나는 벽에 비스듬히 세워진 양손대검을 가리켰다. 어차피 검법을 모조리 잊어버린 마당이다. 주무기를 바꾼다고 해서 큰 패널티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앞으로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탱크나 전투기 등 현대문명의 정수와 맞붙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는 타격범위가 넓은 무기가 유리할 것임에 자명했다.

“양손검이 확실한가?”

“예.”

“자네를 위해 제대로 된 놈을 뽑아주지. 닷새 후에 찾아오게.”

“감사합니다.”

나는 번잡한 수속을 마치고 포탈을 벗어났다. 배신자가 있다는 게 알려진 이후로 포탈을 드나드는 절차가 훨씬 까다로워져있었다.

“박과장님.”

출입처를 빠져나오자마자 이범영 과장이 내게 손짓했다. 그는 나를 다짜고짜 구석진 사무실로 데려갔다.

“받으시죠.”

그가 건넨 건 구형 스마트폰이었다.

“앞으로는 이 번호로 전화하시면 됩니다. 장관님이 기다리십니다.”

“폰은요?”

“가지세요.”

그는 그 말만을 남기고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마치 누군가에게 감시라도 받는 듯한 태도였다.

에신을 나서자마자 대포폰이라니.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일단 이범영 과장이 가르쳐준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몇 차례 신호가 울리기도 전에 박병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박과장인가.

- 예, 장관님.

- 간략하게 말하지. 돌아가는 상황이 많이 불리하네. 내 자리는 물론이거니와 자네까지 위험해.

- 사람이 죽은 것 때문입니까?

- 아니야. 말했다시피 그런 것쯤은 내가 얼마든지 무마시킬 수 있어.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욕망이 아니라 보신일세. 프로젝트에 목숨 건 사람이 자네나 나만이 아닌 이상 그런 사소한 일로 우리 입지가 흔들리진 않을 걸세.

- 그러면 어떤 게 문제가 되고 있습니까?

- 자네가 술법의 힘을 자진해서 포기했다는 소문이 여의도에 파다하다네. 나는 개인적으로는 그 말을 믿지 않아. 아마 정기호 팀장의 진술이 와전이 되었겠지. 아무튼 많은 의원들이 자네가 더 이상 초자연적인 술수를 부리지 못할 거라고 여기고 있다네. 덕분에 자네를 총독으로 밀려던 내 모가지가 날아갈 위기일세.

술법의 힘을 포기했다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대가로 그 이상의 힘을 얻긴 했지만, 그걸 확인한 건 방금 전이었다. 충분히 잘못된 소문이 번질 수도 있었던 정황이었다.

- 게다가 이상하리만치 야당쪽 태도가 뻣뻣해. 자네에게 된통 망신을 당하고도 말일세. 어제는 국감장에 불려나가 온종일 곤욕을 치렀다네.

- 그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로군요.

나는 그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심어주었다. 그런 류의 공포는 권력욕보다 우선한다고 보았다.

- 어떤가, 자네는? 별일 없는 거겠지?

- 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잘 됐군, 정말로 잘 됐어.

- 하지만 그 사실은 장관님만 알고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 그게 무슨 소리인가?

- 그냥 계시진 말고 소문에 불을 지펴주시는 건 어떨까요. 제가 술법의 힘을 깡그리 잃었지만, 총독 자리를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말입니다.

- ...묘수로군, 알겠네.

그는 대번에 내 의도를 알아들었다. 그에겐 여러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게 보신이라면, 단지 소문만으로 라인을 갈아탈 만큼 멍청한 사람은 여의도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누군가가 정계에 새 바람을 불어넣은 게 틀림없었다. 술법사용자일 확률이 대단히 높은 누군가가.

- 맡긴 일은 어떻게 됐나? 진척이 좀 있었나?

- 누군지는 알아냈습니다. 김신우 박사입니다.

- 들어본 것 같군. 연구팀 의사였지?

- 예.

- 이름이 나왔으니 국정원을 압박해볼 수 있겠어. 쓸 만한 정보를 뽑아다가 보내주도록 하겠네.

- 감사합니다. 장관님께선 당분간은 몸을 사리셔야겠습니다. 주술사들은 사람 목숨을 그리 값어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술법으로 살인을 저지르면 법망에 걸리지도 않을 테니까요.

- 자네도 몸조심하게.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겠네.

통화가 끝났다. 나는 대포폰을 품 안에 갈무리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이제야 이해가 되는 듯했다. 바뀐 청사 분위기가.

곳곳에서 감시의 눈길이 느껴졌다. 내가 포탈을 통과했다는 소식은 지금쯤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가 모르는 이들이 없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태연하게 청사를 벗어났다. 커피숍에 들러 시간을 때우는 호기도 부렸다. 시대와 차원을 막론하고 음모란 성질 급한 놈이 지고 들어가는 게임이었다.

두 시간쯤 카페에 죽치고 있을 때였다. 품에 넣어둔 대포폰으로 장관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 동선, 카드결제 내역, 인터넷 접속기록 등 한 사람의 행적을 아주 상세하게 추적한 기록이었다. 이름은 명시되어 있지 않았으나 김신우 박사의 것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자료를 쭉 훑어 내리다가 수상쩍은 내역을 하나 발견했다.

웹소설?

김신우는 근래 어떤 소설 연재사이트에 지속적으로 방문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한 달 전, 마지막 접속기록은 일주일 전이었다.

- 저는 아약이란 필명으로 활동중인 웹소설 작가입니다.

불현듯 망각의 강 너머로 사라졌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외교부 첫 출근 날 아약이 캐시까지 쏘겠다며 알려주던 소설.

그 소설이 연재되던 사이트가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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