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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38화 (38/205)

38화. 늪 (1)

우르술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번민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토록 흔들리는 모습이 생경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세계는 지난 천 년 동안 새로운 에사인을 배출하지 못했다. 그랬던 것을 코앞에서 에사인을 향한 여정으로 접어드는 존재를 목도했으니, 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는 그녀라도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나대로 간절했다. 나는 그녀를 원했다. 나는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우르술라.”

그녀가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벌렸다. 그러나 끝내 나오는 말은 없었다.

그녀는 대신 검을 회수했다. 흐트러졌던 망토도 정돈하고, 땀에 젖은 붉은 머리카락을 위로 틀어 올렸다. 그녀는 후드를 다시 덮어쓰며 듣기 힘들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생각할 시간을 다오.”

그녀는 내게 대답할 틈을 주지 않았다. 짙은 그림자가 올라오는가 싶더니, 그녀의 몸을 아래에서부터 완전히 삼켜버렸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엔 본래 빛깔을 되찾은 그림자만이 남아있었다.

“그 암컷과 아는 사이인가보군.”

카룩카이가 벽에 몸을 기댄 채 말을 걸었다. 그의 회복력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검에 꿰뚫렸던 목은 잠깐 사이 거의 회복이 되었고, 잘려나간 다리의 절단면에서는 새로운 세포조직이 눈에 띄게 자라나는 중이었다.

“악연이야. 보다시피.”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았다. 네가 그 암컷의 얼굴을 만졌던 동작은 비늘 없는 종족이 교미를 위해 나눈다는 정서적인 교감행위와 흡사했다.”

“.......이상한 책 좀 그만 읽어, 카룩카이.”

“무엇이 이상한 책이란 말인가?”

“아니, 됐다. 몸은 어때?”

“일주일 정도면 문제없이 회복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당해 보는 것도 오랜만이로군. 너희 비늘 없는 자들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종족인 듯하다.”

“안심해, 그 여자가 예외적인 거니까.”

우르술라와 일대일로 맞붙어서 이긴다고 장담할 존재가 몇이나 될지 의문이다. 나는 솔직히 카룩카이에게 감탄했다. 내가 알기로는 그녀와 겨뤘던 전사들 중 카룩카이만큼 오래 버틴 자도 없었다.

나는 카룩카이를 내버려두고 박병철에게로 향했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텅 빈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자신을 따르던 보좌관들이 모두 죽고 말았으니 충격을 받을 만도 했다.

“괜찮으십니까?”

“아, 자네인가.”

그가 눈을 끔뻑이며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정신적으로 강하다고 알려진 사람이 가까운 지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너지는 걸 숱하게 보아왔다. 나는 그가 아무리 망가진 모습을 보이더라도 이해해줄 수 있었다.

“박과장, 자네는 괜찮나? 많이 다친 것 같던데.”

그가 되물었다. 그는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는 중이었다.

“깊은 상처는 아닙니다. 며칠 쉬면 나을 겁니다.”

“다행이군. 자네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그 여자가 다시 돌아오진 않겠지?”

“돌아올지도 모릅니다만, 돌아오더라도 우리를 적대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잘 풀려간다는 느낌은 받았어. 그나저나 이곳은 정말 무서운 세상이로군. 내 평생 그렇게 무시무시한 여자는 처음 본다네.”

“동의합니다.”

“많이도 죽었어. 이걸 수습하려면 당분간 눈 코 뜰 새도 없겠는걸.”

그가 방 안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나는 그를 어떤 말로 위로해야할지 머리를 굴려보았다.

“제가 도와드릴 게 있겠습니까?”

“그럴 것 없네. 이런 뒤처리는 그냥 내게 맡기면 돼. 자네는 일전에 내가 부탁했던 건에만 주력해주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부적절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 일이 자네에겐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걸세.”

“예?”

“지난번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하나? 총독 자리까지 절반은 왔다고.”

“예.”

“방금 나머지 절반을 왔어. 이젠 자네 말고는 아무도 총독 자리를 원치 않을 거야.”

나는 그의 말이 질 나쁜 농담은 아닌가하고 잠시 고민해보았다. 그의 말마따나 심히 부적절한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는 전직 암살자인 나보다도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는 중이었다.

예전에도 그에게 한 차례 감탄한 적이 있었다. 정치인의 권력욕이라는 것에.

그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을 겪고도 여전히 자신의 야망을 잊지 않았다. 심지어는 우르술라에게 협박당할 때조차 할 말을 다했었다. 그가 내게 자신의 야망을 투사해 무얼 얻어내려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과소평가할 수 없는 인물임엔 틀림없었다.

나는 우르술라에게 얻어맞은 후유증으로 내리 닷새를 드러누웠다.

닷새 동안 누워있기만 한 건 아니었다. 나는 우선 새로 얻어낸 힘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오데르가 부여한 힘을 버린 후 내겐 상당한 양의 원초적인 마력이 깃들었다. 그러나 마력은 마법이나 술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신체를 강화하는 용도로밖에 사용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한 관념을 대표하는 에사인이 될 수 있는지.

에사인을 향한 여정중일 때는 어떻게 술법을 사용하는지.

쉽게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닷새를 끙끙 앓은 후 내가 내린 결론은 모르면 물어보자는 것이었다.

마침 주변에 답을 알 만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소미는 자신만의 힘을 가졌으면서도 카둔의 술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그녀라면 내게 길을 터주는 건 물론이거니와 에사인으로서 추종자를 모아 힘으로 환원하는 법도 가르쳐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넌 제정신이 아니다.”

퇴원하는 날, 정기호가 날 찾아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

“수십 년 동안 충성을 다해 얻어낸 술력을 한순간에 날려버리다니. 너 같은 바보는 들어본 적도 없다.”

“그런 바보가 아니라면 에사인이 못 되는 모양이지.”

“바보들의 에사인이 되고 말겠군.”

나는 그의 진지한 얼굴을 쳐다보며 킥킥 웃었다. 웃을 때마다 옆구리가 쿡쿡 쑤셔왔다.

“네 원한은 갚아줄 테니 걱정하지 말어. 스트리아 가문이었지?”

“내 원한을 못 갚을까봐 걱정하는 게 아니다. 바보 같은 상사놈을 걱정하는 거지. 다음부터 그런 무모한 짓은 생각을 하고 해라. 너만 쳐다보는 직원들 생각도 좀 하고. 일이 잘 풀렸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냐.”

“미안하다.”

나는 그에게 두말 않고 사과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땐 정말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이었다.

“받아, 네가 부탁한 자료다.”

정기호가 큼직하게 인화된 사진 몇 장을 건넸다. 엘리시아가 기지를 처음 방문했을 때 군무원이 촬영한 사진이었다. 엘리시아와 박문식 대령과 악수하는 장면이 여러 앵글에서 잡혀있었다.

나는 정기호가 넘겨준 사진을 박병철 장관에게 받은 서류와 요모조모 대조해보았다.

“그놈이로군.”

정기호가 짤막하게 말했다.

범인을 추리해내는 데엔 대단찮은 분석기술이 필요하지 않았다. 기지 내에 카메라 반입이 허용된 건 정부소속의 촬영기사와 연구원이 전부였는데, 구도상 인터넷에 유출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자리에 연구원이라고는 김신우 박사가 유일했다. 그는 군인들의 틈바구니에서 무표정한 모습으로 작은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중이었다.

“언제고 손을 봐주고 싶었는데, 잘 됐네.”

정기호가 살기를 드러내며 웃었다.

“김신우 박사, 지금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냐? 아직도 차수진 박사님이랑 연구중인가?”

“아니, 아마 닷새쯤 전에 서울로 돌아갔을 거다.”

“뭐 사라지거나 유출된 건 없고?”

“글쎄다. 없진 않겠지만 불이 워낙 크게 났었다. 뭐가 없어졌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지.”

정기호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나는 김신우 박사가 찍힌 사진을 손에 쥔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는 의학박사 자격을 가진 석학이었다. 지켜야 할 사회적 지위를 가진 자이기도 했다. 아무리 속이 좁고 쪼잔한 사람이라고 한들, 인터넷에서 자폭이나 하려고 비밀유지서약을 깼을 것 같진 않았다.

두 가지 시나리오.

야당, 혹은 다른 국가.

돈을 걸라면 후자에 걸겠다. 야당 최고의원인 우장진은 박병철 못지않은 야심가였다. 그가 우리에게 개입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이보다는 더 섬세한 접근법을 썼을 것이다.

반면 다른 국가는 그럴만한 개연이 있었다. 그들은 다르마알의 의지를 받들어야하는 입장이었다. 혼돈을 널리 퍼뜨릴 불안정하고 탐욕스러운 인간을 찾는다면 김신우만큼 적격인 인물이 존재치 않았다.

“정기호, 너는 김신우 박사의 숙소로 가라. 가서 도움이 될 만한 단서를 찾아봐.”

“넌?”

“나는 소미부터 만나러 가야겠다. 일인분은 해야겠으니. 뭐든 단서를 찾거든 메일로 보내다오.”

“알았다.”

나는 몸을 뒤집으며 침대를 벗어났다. 그간 계속 누워있던 탓에 머리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어떻게든 수습하려 애쓰고 있는 와중에, 흰 가운을 입은 여성이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안녕하십니까.”

차수진이 차트를 품에 안은 채 싱글거리고 있었다. 마침 소미에게 가는 길에 그녀를 들르려던 참이었다. 양반은 못 될 여자인 건 분명했다.

“오늘도 보여주실 연구결과가 있나봅니다.”

“아니요. 제가 과장님처럼 술법을 쓰는 것도 아닌데, 고작 며칠 만에 신통한 게 나올 리가 없잖아요.”

“그러면 무슨 일이십니까?”

“몸 상태가 걱정되어서 왔다고 하면 믿어주실까요?”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하시네요, 정말.”

그녀가 입을 삐죽 내밀며 불평했다.

“그래요, 다른 용무가 있기는 해요. 과장님 걱정 반, 다른 용무 반인 거죠.”

“마음 잘 받았습니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과장님도 소식은 들으셨죠. 에신에 총독령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소문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지금 저희 팀으로 엄청난 예산이 내려오고 있거든요. 액수가 진짜, 말도 마세요. 연구만 하라고 내려 보내는 예산이 아닌 건 틀림없어요. 연구 목적으로만 크록을 배양할 것 같으면 일주일에 다섯 명씩만 늘려도 되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여 추임새를 넣었다.

“문제는 어떤 용도로 얼마나 많은 크록을 배양할지 아무도 제게 적절한 가이드라인을 말해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걸 책임질 사람이 총독일 텐데, 누가 총독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이유로요. 하도 답답해서 장관님께 가봤더니 과장님께 물어보래요. 과장님이 유력한 차기 총독 내정자라나요.”

“맞습니다.”

나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장관의 말대로다. 이젠 어차피 나 말고는 하려는 사람도 없을 터였다.

“와, 그게 농담이 아니었네요.”

“농담을 할 분이 아니시죠.”

“좋아요. 그럼 차기 총독 내정자님께 질문 드릴게요. 크록을 얼마나 배양하는 게 좋을까요? 불러주신 숫자를 참고해서 증산계획을 짜볼 테니까, 신중하게 대답해주셔야 해요.”

“십만.”

나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십만 명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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