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37화 (37/205)

37화. 가장 짙은 그림자 (10)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하나.

이미 일은 저질러졌다. 그녀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특전사 대원, 민간 기술자, 수행비서들. 한 명 한 명이 내 책임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녀를 막아야만 했다. 그렇다면 내겐 그녀와의 인연이, 전생을 기억한다는 건 저주나 다름없었다.

“부정하지 않는구나.”

마치 우물이 차오르듯 우르술라의 검은 눈동자가 기쁨으로 물들었다.

“라힐.”

그녀가 눈을 감으며 노래하듯 내 이름을 발음했다.

“네 죽음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널 그곳으로 보냈던 나를 얼마나 탓했는지 모른다. 네 이름을 불러볼 날이 다시는 오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너는 끝내 운명을 거스르고야 말았구나. 오데르의 구덩이를 아득바득 기어 올라왔을 때처럼.”

그녀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돌아가자, 우리들의 집으로.”

그런 적이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던 시절.

그녀가 내미는 손을 잡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됐던 시절.

짙은 그림자와 한줌밖에 안 되는 형제자매만이 세상의 전부였던, 검에 피를 묻히는 데 이유가 필요하지 않던 시절.

가슴이 뛰는 게 느껴졌다.

남겨두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아직 그녀를 향한 감정이 남아있었다. 오직 이 순간만을 기다렸던 것처럼, 가슴 속에 묻혀있던 불씨가 수십 년 만에 온기를 발하기 시작했다.

“아는 사이인가?”

박병철이 쿨럭거리며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전생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악연이 틀림없겠군. 피도 눈물도 없는 여자야. 내 비서들을 웃으면서 죽이더군.”

“조용히.”

우르술라가 박병철을 발로 밀어 넘어뜨렸다. 그는 넘어지면서도 이판사판으로 말을 멈추지 않았다.

“잊지 말게, 자네가 없으면 프로젝트도 끝장이야...!”

“입 다물라고 했을 텐데.”

우르술라가 박병철을 향해 왼손을 뻗었다. 바닥에서 즉시 그림자가 일어나 그의 입을 틀어막아버렸다.

“라힐.”

그녀가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테일리시는 네가 죽은 후로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지. 그 계집애는 널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직 네 얘기를 해주진 못했다. 그랬다면 나와 같이 내려오겠다고 강짜를 부리지 않았겠냐.”

테일리시.

기억이 날 듯 말듯했다. 항상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여자였다. 외모는 귀여웠으나 살행에 나설 땐 귀신이 따로 없었다. 워낙 말수가 적어서 날 좋아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카단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살아있지. 여전히 재미없는 놈이다.”

그녀는 반어법을 쓰고 있었다. 카단은 암살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유머가 뭔지 아는 놈이었다. 진지하기 짝이 없는 암살자 사회에서 그의 유머센스는 이단처럼 받아들여졌다.

“우티르는요?”

“글쎄다. 얼마 전에 살행을 나갔으니, 살아있다면 곧 돌아오겠지.”

우티르는 유난히 가까웠던 친구였다. 헤아릴 수 없는 사선을 넘나들며 그와 나는 눈빛만으로도 통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나와 마지막 살행을 함께하기도 했다. 나는 죽어가면서도 그의 생사가 궁금했었다.

“로이는 괜찮습니까?”

“죽었다.”

우르술라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로이도 마지막 살행을 함께한 친구였다. 외팔로 위태위태하게 돌아다녀서 항상 신경이 쓰이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죽고 나서 그도 오래 버티지 못했던 듯했다.

“로이 말고도 많은 형제들이 죽었다. 그러나 라힐, 너만큼은 언제나 내 예상을 보기 좋게 깨뜨리곤 했지. 심지어 죽지 않을 거란 예상마저도. 그랬더니 이젠 아예 죽었다가 되돌아올 줄이야.”

그녀가 갑자기 성큼 다가왔다.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지 속눈썹 개수를 셀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내가 대응할 틈도 주지 않고 손을 뻗었다. 따스한 손가락이 슬며시 볼에 닿았다.

“어째 더 야윈 것 같구나.”

“......저는 만족합니다.”

그녀는 내게 대꾸하지 않으며 손가락을 명치로 늘어뜨렸다. 잠시 후엔 배꼽까지 손길이 내려왔다.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그녀의 손을 떼어놓았다. 그녀는 깔깔 웃으며 내게 손끝을 까딱였다.

“가자, 지금 출발하면 닷새 후에는 그림자요새에 도착할 수 있을 거다.”

“저는 갈 수 없습니다.”

“뭐라고?”

그녀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반문했다. 내가 한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는 듯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한 차례 숨을 들이켰다. 말 한 마디를 하기가 이렇게 힘들었다.

“저는 갈 수 없습니다.”

“갈 수 없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제가 속한 곳은 그림자요새가 아니라 이곳입니다.”

우르술라의 미소가 서서히 일그러졌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게 사실입니다. 저는 쭉 이들과 함께 활동해왔습니다.”

“그렇다고 한들 그게 네 형제자매를 버리겠다는 뜻은 아닐 테지.”

“가시죠. 저는 남겠습니다.”

피 묻은 검이 장관의 머리를 겨누었다. 장관은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숨을 들이켰다.

“설마 이런 버러지들 때문에 형제자매를 버리겠다는 걸까? 마력이라고는 티끌조차 찾아볼 수 없는 이 약해빠진 것들 때문에? 내가 아는 라힐은 그렇게 사리분별이 안 될 만큼 멍청하지 않았었는데.”

“당신이 아는 라힐은 죽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너는 대체...”

그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제 보호하에 있습니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그를 다치게 한다면 참지 않겠습니다.”

나는 말로만 위협을 하지 않았다. 검극을 앞으로 내밀고 마력을 있는 대로 끌어올렸다. 팽배한 마력이 칼날을 휘감아 위협적으로 소용돌이쳤다.

우르술라는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가 홧김에 장관의 목을 그어버리는 걸 막기 위해 나는 몸에 긴장을 풀지 않았다.

드디어 그녀의 검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관의 목에서 가슴으로, 마지막으로는 바닥을 향해.

“허억, 허억......”

장관이 살았다는 듯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장관을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강한 분노가 그녀의 내면에서 휘몰아쳤다.

“이 버러지들이 형제자매보다 중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나 들어보자. 널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나? 널 사랑한다고 말했나? 칼에 찔려 죽어가던 널 데려와서 먹이고 돌봤나? 조금의 시간이라도 벌기 위해 네 대신 남겨져 죽어갔나? 대체 이유가 무엇이기에 이 하찮은 놈들을 감싸고도는 거냐?”

“자유입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형제자매의 품으로 돌아간다면 저는 당신의 그늘 아래에 머무는 한 명의 암살자가 되고 말 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저는 무엇이건 될 수 있습니다.”

“자유라고?”

우르술라가 장관의 어깨를 발로 밀어 넘어뜨렸다.

“재미있는 주장인걸. 이 버러지들에게 자유라는 게 있었다니.”

“마지막으로 경고합니다. 그 사람을 건드리지 마시죠.”

“내게 명령하려면 걸맞은 힘을 갖춰야지. 말로만 떠드는 자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가 스산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이까짓 허접쓰레기들의 공동체 따위는 잠깐이면 폐허로 만들 수 있다. 그런데도 너는 이곳에 자유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막는 게 제 임무입니다. 저는 현재 이들의 수호자이며, 미래의 지도자가 되고자합니다.”

“네가 이것들의.......지도자가 된다고?”

우르술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렇게 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넌 멍청한 놈이다. 이 세계엔 네가 감히 상상도 못할 힘들이 개입하고 있다. 머지않아 네가 알고 있던 모든 질서가 이그러지고, 혼돈의 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때 한 줌 밖에 되지 않는 버러지들 가지고 네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저는 발버둥치겠습니다. 저의 의지로서.”

“나는 너를 가르쳤다. 너를 만들었다. 네가 말하고 들었던 모든 것이 내게서 기인했다. 그런데도 너는 나를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냐?”

“저도 전생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뇌를 거듭했다.

나는 긴 침묵 끝에 검을 들어 그녀의 심장을 향해 겨누었다.

“하지만 제가 살아가는 건 현생입니다, 우르술라.”

“...아무래도 말로 될 일이 아닌가보구나.”

우르술라가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그녀와 싸워봤던 게 언제였지?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결말만큼은 눈에 선연했다. 나는 그녀의 옷자락도 베어보지 못하고 졌었다. 다른 형제 두 명과 협공을 펼치고도.

그녀는 우리에게 검법과 술법을 가르친 장본인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도 그녀에겐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꼴에 지나지 않았다.

덜그럭, 덜그럭.......

방 안의 집기들이 덜컥이더니, 별안간 총알같은 속도로 내게 날아왔다.

그림자병사 소환술.

내가 그림자를 수납했기 때문에, 그녀는 주변 사물에서 그림자를 끌어냈다. 나는 그녀에 맞서는 술법을 펼치지 않았다. 그녀는 가장 짙은 그림자였다. 내 실력으로는 그녀의 그림자를 덮어씌울 수가 없었다.

카앙.

나는 짓쳐오는 티포트를 반으로 쪼개버렸다. 볼펜, 휴대폰, 스피커가 잇달아 쇄도했다. 나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으며 모든 물체를 검신으로 받아쳤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건 마력을 머금은 장검의 극점이었다.

막을 수 있다.

나는 눈을 부릅뜨며 장검을 장검으로 맞받아냈다. 강철이 일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빨간 불꽃이 폭죽처럼 튀었다.

그녀는 쉴 틈도 주지 않고 찌르기를 뻗었다. 나는 손목이 뒤틀리는 걸 느끼며 찌르기를 몇 번이고 걷어냈다.

그녀의 검로가 보였다. 어디로 검을 거두며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 예전에는 그 정도도 불가능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합이 교환되었다. 그녀는 자세를 낮추며 마력을 한 점에 급속도로 집중했다. 오데르의 창이었다.

나도 즉시 같은 기술을 준비했다. 기술은 기술로 맞서는 수밖에 없었다.

쉬이이익.

낭창한 검신이 커브를 그리며 섬광처럼 번뜩였다. 나도 지지 않고 팔을 뻗었다. 오데르의 두 창이 가운데에서 통렬히 맞부딪혔다.

아니,

맞부딪힌다고 생각한 순간 그녀의 창이 둘로 갈라졌다. 마치 뱀의 혓바닥처럼.

“큭...!”

혓바닥 한 갈래가 무방비한 가슴에 도달했다. 그녀의 검은 김송화 장인이 만든 방어구를 두부처럼 뭉개버렸다. 나는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날아가 벽에 사납게 처박혔다.

“커어억.......”

나는 복부를 움켜쥐며 숨을 몰아쉬었다. 옆구리가 송곳으로 찌르는 듯이 고통스러웠다. 어디 한 군데가 부러진 건 확실했다.

그녀가 쓴 검술은 오데르의 창의 발전형이었다. 내겐 가르쳐주지 않았던 기술이었다. 장인의 방어구를 입었기에 망정이지, 그걸 맨몸으로 받았더라면 몸뚱이가 육편이 되어 흩날리고 말았을 것이다.

“제법 늘긴 했다만, 아직 멀었다.”

우르술라가 흡족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넌 여전히 배워야할 게 많아. 얌전히 따라오너라. 재능은 너만한 놈이 없으니 저번처럼 죽지만 않는다면 분명 내 뒤를 이을 재목이 될 수 있을 거다.”

“싫습니다.”

우르술라가 핏발이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좋다, 이 버러지들을 도저히 못 떠나겠다면 내가 도와주도록 하마. 너와 관련된 놈들을 모조리 죽이겠다. 여기 있는 것들뿐만이 아니라 포탈 너머에 숨은 것들까지 전부 죽여주마. 처음에는 좀 슬프겠지만, 안심하려무나. 형제자매를 잊었던 너라면 네 친구들도 얼마든지 잊을 수 있겠지.”

“...그만두시죠.”

나는 다시 검을 들었다.

내겐 그녀를 대적할 기술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무너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며 오데르의 창을 준비했다.

그녀는 이번엔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저 서있기만 할 뿐인데도 나는 올가미가 씌워진 듯 몸을 옴짝도 할 수가 없었다.

“배워야할 게 많다고 했을 텐데.”

그녀가 내 그림자를 밟고 있었다.

나는 이미 그림자를 수납했었다. 암살자끼리 싸울 땐 그림자부터 숨기는 게 철칙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밟은 그림자는 내가 아니라 그녀의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그림자를 덮어씌워서 그림자밟기를 발동시킨 것이다. 그런 수법이 어떻게 가능한지 의문이었다.

퍼억.

그녀가 주먹으로 내 복부를 후려쳤다.

내장을 역류한 피가 입 밖으로 왈칵 쏟아졌다.

“허억......헉.......”

나는 무릎을 접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흐릿한 시야 속에 입이 틀어 막힌 채 꿈틀거리는 장관이 들어왔다.

“잠시만 쉬고 있어라.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우르술라가 장관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 내겐 그녀를 막을 수단이 남아있지 않았다.

쿵, 쿵, 쿵.

갑자기 육중한 덩치를 가진 생물이 육박해오는 게 느껴졌다. 크록, 그것도 최소한 전사급은 되는 개체였다.

잠시 후 새카만 비늘을 가진 크록이 벽을 쥐어뜯으며 난입했다. 들고 있는 창은 촉이 유난히 하얬다.

카룩카이.

마그나크록의 장군이었으며, 종의 미래를 위해 망명한 자.

그는 피막에 덮힌 눈을 몇 차례 끔뻑이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크르르르......

삐죽삐죽한 송곳니 사이에서 위협적인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강력한 투기가 공기를 떨쳐 울렸다. 우르술라는 뒤로 물러나며 새로이 나타난 강자를 경계했다.

“비늘 없는 자들의 암컷이여.”

카룩카이가 갈고리 같은 손톱으로 우르술라를 가리켰다.

“너는 건드리면 안 될 자를 건드렸다.”

“뭐라고?”

“대가를 치르도록 하라.”

카룩카이가 창을 꼬나쥐고 우르술라에게 덤벼들었다. 곧 목숨을 도외시한 무시무시한 육박전이 벌어졌다.

나는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의 승부를 지켜보았다. 체술로는 우르술라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카룩카이의 완력은 그야말로 초월적이었다. 창과 검이 부딪힐 때마다 그녀의 몸뚱이가 날아갈 듯이 휘청거렸다.

그러나 우르술라는 대인전의 스페셜리스트였다. 오데르의 술법도 일대일 전투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설령 둘의 실력이 비슷하다 하더라도 상성상 카룩카이가 불리한 전투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카룩카이의 몸에 상처가 덧대어졌다. 음험한 그림자술법이 그를 잠식해가는 가운데, 독사 같은 검이 술법이 빚어낸 빈틈을 파고들었다. 그들의 대결은 카룩카이의 다리 한 쪽이 날아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하.”

우르술라가 땀에 젖은 고개를 젖히며 만족스러운 숨을 토해냈다.

“별 것도 아닌 놈이.”

그녀는 아직도 움직이는 카룩카이의 목에 망설임 없이 검을 꽂아 넣었다. 카룩카이는 무거운 신음을 토해냈지만, 목이 꿰였는데도 기운만은 여전히 팔팔했다.

“이건 뭐냐? 불사신인가?”

“크륵...... 크르륵........”

“귀찮게스리.”

그녀가 성가시다는 듯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카룩카이를 죽이려면 마그나크록의 신체로 만든 무기를 써야만했다. 죽이지 않고 토막을 내는 방법도 있겠으나, 비늘과 뼈가 워낙 두텁고 단단해서 여간 힘이 드는 일이 아니었다.

“라힐, 너무 늦었으니 오늘은 너만 데리고 가도록 하겠다. 이런 버러지들 따위 죽이든 살리든 무슨 상관일까.”

“........”

나는 소매를 들어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았다.

전생을 기억한다는 건 저주가 맞았다.

설령 내가 여기서 죽는다한들, 다음 생에 태어나는 것도 오데르의 찌꺼기나 얻어먹는 암살자 나부랭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는 한 지금 같은 비극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우르술라.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듣고 있다.”

“당신이 데려가려는 게 오데르의 검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형제인 라힐입니까?”

“라힐,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

그녀가 별 걸 다 묻는다는 듯이 대답했다.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그렇다면 저를 막지 않으시겠군요.”

나는 남은 마력을 남김없이 끌어 모아 오른손에 집중했다. 그녀는 뒤늦게야 내 의도를 눈치 챘다.

“라힐! 미친 것이냐?”

그녀가 사색이 되어 외쳤다. 그녀가 이렇게나 놀라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저 때문에 왔다고 해놓고는.”

“그러지 마라, 라힐. 넌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고 있다.”

그녀는 안절부절 못하며 핏기가 사라질 정도로 강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돌아가시죠. 그러면 당신의 위선을 한 번은 눈감아 드리겠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좋다. 그 손은 내려놓고 얘기하자.”

“돌아가세요.”

그녀의 그림자가 슬금슬금 뻗어왔다. 그러나 나는 이번엔 먼저 눈치를 챘다. 나는 마력이 충만한 손으로 가슴께를 움켜쥐며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오데르를 따르지 않겠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심장이 눈앞이 노래질 정도로 거세게 뛰었다. 그림자는 이미 뻗을 대로 뻗어와 내 몸을 휘감고 있었다.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이제 그만 놔달라고, 오데르 이 개새끼야!”

빠드득.

실체를 가진 존재가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고막을 한 차례 울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내 영혼을 옭아매던 사슬이 부서졌다.

오데르와의 신성한 계약이 해지된 것이다.

즉시 오데르를 통해 부여됐던 모든 마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무력화된 몸에서 힘이 더 사라지고, 고통은 더욱 끔찍해졌다. 우르술라가 내 멱살을 쥐고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그녀는 흥분으로 얼굴을 붉힌 채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라힐, 이 멍청한 놈아!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이러지 않으면 절 안 놓아줄 거잖습니까.”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널 위해 어떤 계획을 세웠었는지...!”

“저는 원치 않는 계획입니다.”

“누구나 원치 않는 삶을 산다! 너라고 뭐가 다른 줄 아느냐? 나라고 이런 삶을 원했겠느냐! 우리는 죽으나 사나 오데르의 자식인 것이야...!”

그녀가 열변을 토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불신의 빛이 서렸다.

마력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오데르의 것이 아닌, 누구의 소유도 아닌, 지고지순한 태초의 힘이.

“마, 말도 안 돼.......”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산산이 흩어졌던 마력이 범람하는 계곡처럼, 바람을 업은 노도처럼 내게로 들이닥쳤다.

“......”

나는 그녀의 손을 떼어내고 스스로 두 다리로 섰다. 아직 몸 여기저기가 쑤시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기분만큼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 순간 내가 느끼는 자유로움이란 필설로 형용이 불가능했다. 단지 마력이 되돌아와서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나는 자그마치 두 생애동안 그림자의 노예였다. 그러나 더 이상 그림자는 내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대신 카룩카이가 열망했듯이, 크록의 미래가, 종족의 잠재력이, 하나의 염원이 되어 내 혼에 깃들었다.

이로서 에사인을 향한 여정에 한 가지 비밀이 풀렸다.

새로운 걸 얻으려면 우선 가진 걸 비워내야 했다는 것을.

“우르술라.”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흔들며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이게 현실일 리가 없다고.

나는 그녀의 뺨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그녀가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라힐, 너는 도대체.......”

“언제나 예상을 깬다고요. 맞습니까?”

나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우르술라, 형제들을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다르마알의 꼭두각시 노릇은 그만두시죠. 나는 누구보다 더 당신들을 이해하는 에사인이 될 겁니다. 혼돈을 몰아내고 이 땅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올 겁니다. 그때 내 그림자는 당신이어야 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