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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31화 (31/205)

31화. 가장 짙은 그림자 (4)

“......”

나는 장관의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가 회의에 앞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기도 사람만 죽지 않는다 뿐이지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라며.

내 전쟁은 회의실을 나선 순간 끝이 났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그는 아직도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다.

그는 새로운 시대의 왕으로 나를 옹위하기 위해 정치생명을 걸었고, 생명을 거는 대가로 자식을 이끌어주길 원했다. 기성 정치인이자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그것이 얼마나 큰 노림수인가는 해석을 할 필요조차 없었다.

“......”

나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은 채 장고를 거듭했다. 그가 보인 결단에 응하려면 나도 그만큼의 결의가 필요했다. 딸의 뒤를 봐주겠다는 건 총독 자리를 목표로 하겠다는 걸 공언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돌이켜보면 묘한 일이었다. 내 형제들이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고 주체적으로 운명을 선택했듯이, 내게도 그런 선택의 기로가 오고야말았다. 이 모든 게 다르마알이 불러일으킨 나비효과라면 그는 진정으로 혼돈의 에사인이 틀림없었다.

“......알겠습니다.”

마침내 나는 결정을 내렸다.

그의 길을 내 길로 삼기로.

이 땅에 태극기를 꽂아 번영으로 이끄는 미래를 꿈꿔보기로 했다.

“고맙네.”

박병철이 내 손을 맞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곧 도착합니다.”

운전병이 뒤를 돌아보며 보고했다. 멀찍이 에신1과 직원들이 설치해둔 천막들이 보였다. 결국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영적인 리더십을 잃은 크록은 에신 산야에 널리고 널린 야생동물중 하나로 전락하려는 듯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무선 이어폰을 꺼냈다. 슬슬 버프를 걸어야할 타이밍이었다.

“받으시죠.”

“이게 뭔가?”

“소미님의 솔로곡 ‘올포유’입니다. 리믹스 버전이죠.”

박병철이 뚱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중요한 회담을 앞두고 생뚱맞게 웬 아이돌 음악이냐는 듯했다.

“들어보시면 아시게 됩니다.”

“알겠네. 자네가 그리 말하니 이유가 있겠지.”

소미는 회담이 성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내 메일로 특별한 노래를 보내왔다. 술법을 통달한 나조차도 에사인 앞에 서면 정신이 마모되는 느낌을 받는데, 일반인인 장관이 그 압박을 견뎌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때문에 이번 리믹스 버전은 신체강화가 목적이 아닌, 오직 정신만을 고양하려는 목적으로 녹음되었다. 누구든 이 노래를 듣는다면 마치 자신이 신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틀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경고한 뒤 재생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그의 눈이 번쩍 떠졌다.

“바, 박과장...!”

그는 머리를 감싸려는 듯 두 손을 어깨 위로 올리더니, 별안간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긴장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무엇이건 부숴버릴 듯한 전사의 기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괜찮으십니까, 장관님?”

운전병이 걱정스레 물었다. 나는 그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엄지를 들어보였다.

“이것도.......주술의 일종인가?”

장관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왜 들어보라는 건지 알겠군. 대단해...! 지금이라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네.”

“이제 준비가 되신 것 같군요.”

어디까지나 정신만 그렇다는 것이다. 느낌을 곧이곧대로 따른다면 지구인 최초로 에사인에게 모가지가 날아가는 영예를 누리겠지.

드디어 약속된 장소에 도착했다. 우리가 차량 다섯 대에 수십 명의 경호원을 대동한 것에 비해 저쪽은 달랑 셋이 전부였다. 울토르와 이텐, 엘리시아.

적은 숫자가 자신감을 말해주었다. 우리가 일개 군단을 끌고 온다 한들 울토르에겐 많은 인원이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가시죠.”

우리는 보무도 당당히 울토르에게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 박병철이라고 합니다.”

“대장군 울토르라 한다.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

박병철은 습관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울토르는 그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텐은 갈기털을 바짝 세우며 나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러나 저번처럼 다짜고짜 시비를 걸진 못했다. 아무래도 회담을 망치지 말라고 단단히 언질을 받아둔 듯했다.

“내 말이 직설적으로 들리더라도 양해해다오, 대사. 나는 군인의 화법밖에 알지 못한다.”

“이해합니다.”

“그대들의 나라, 대한민국이 우리에게 바라는 게 뭐지?”

“친선입니다. 대한민국은 에신 황국과 발전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수립하고자 합니다.”

“그대들의 선의를 믿어야할 이유는?”

“우선 약소한 선물을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박병철이 신호하자 특전사 대원들과 크록 전사들이 트렁크에 적재된 상자를 가져와 바닥에 늘어놓았다. 상자 안에는 K-2소총과 5.56밀리 탄약, 세열 수류탄이 가득했다.

황국은 풍요로움의 극치를 달리는 국가였다. 물질로는 그들을 회유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우리가 준비한 게 무기였다. 군인인 울토르는 무기에는 반드시 관심을 보일 거라며.

“......마족의 주술구로군.”

울토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마족’이라는 단어를 번역할만한 마땅한 어휘가 없어서 통역에 애를 먹는 중이었다.

“예, 마족의 침공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우선 우호의 증표로 천 명의 군인이 무장할 수 있을 만큼의 무기를 증정해드리겠습니다. 마족들이 쓰는 것과 동등한 성능의 장비입니다. 대단한 위력은 아니나, 주술이나 마법에 대한 숙련이 전무한 자도 사용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특전사 한 명이 언덕 너머를 향해 시범사격을 실시했다. 조종간을 단발로 놓고 한 탄창, 연발로 놓고 한 탄창.

감흥 없는 표정으로 지켜보던 울토르는 수류탄이 투척되자 그제야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류탄은 정기호의 필살기인 대번격에 버금가는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엘리시아가 사각방패를 땅에 꽂으며 방어자세를 취할 때, 이텐은 피가 끓는지 두 팔을 벌리며 흩날리는 모래먼지를 받아들였다.

“쓸 만하겠군.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보도록 하지. 그대들이 원하는 걸 구체적으로 듣겠다.”

“먼저 불가침조약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군사적인 도발이 불가능하다는 명문화된 약조가 필요합니다.”

“알겠다. 다음은?”

“대한민국은 포탈을 중심으로 하여 에신에 속령을 세우고자합니다. 속령에 속할 영토와 자원의 점유권을 인정해주셨으면 합니다.”

“안 될 것 없지. 다음은?”

“통상조약을 맺고 싶습니다. 양국의 국익에 부합할만한 품목을 선정하여 무역을 개시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쁠 것 없겠군. 다음은?”

“......이상입니다.”

박병철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보좌진과 함께 이틀 밤을 꼬박 새웠다. 그에겐 이런 식으로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이뤄지는 외교가 처음일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두 나라의 체제차이 때문이었다.

에신은 신정국가였다. 일찍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신정국가들은 제사장이 통치권을 대행하는 게 고작이었으나, 에신은 신이 직접 나서서 공직을 맡고 공무를 집행했다. 신은 인간보다 분별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의사결정을 미적댈 이유가 없었다.

“정말 더 바라는 게 없나?”

“우선은 그렇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조건을 말해주지. 우리도 그대들에게 세 가지를 요구하겠다. 첫째, 우리 영토에 들어온 자는 우리 법을 따라야한다. 재판도, 처벌도 우리가 한다.”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의 법을 따라야한다는, 속지주의라는 개념이다.

“박과장, 어떻게 생각하나?”

박병철이 자문을 구했다. 위임장을 받고 온 전권대사이건만 이쪽은 쉽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나는 에신의 법체계를 돌이켜보았다. 에신의 법이란 한 마디로 요약되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피는 피로 갚는다는 원칙을 근간으로 하여 계급에 따른 차등을 두는, 함무라비 법전과 다를 게 없는 원시적인 사법체계였다. 처벌은 신체의 일부를 훼손하거나 잘라내는 야만적인 방식이 대부분이었고, 감옥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나는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엄격한 사법제도에도 불구하고 에신 사람들은 만족도가 높았다. 여섯 번째 권능인 ‘심판자’의 존재 덕에 에신의 재판정에서는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으려면 입국하려는 사람들에게 법 교육을 철저히 시키셔야 할 겁니다. 특히 황제나 에사인을 모욕하는 일이 없어야겠죠.”

“알겠네, 받아들이겠다고 말해주게.”

“받아들이겠다고 합니다.”

“다음 조건이다. 양국의 친선을 반석처럼 굳히려면 고귀한 신분끼리의 혼약이 필요하다. 마침 이황자 우르 게네발이 미혼이다. 그대들의 왕이나 군주의 여식 중에서 결혼 적령기의 참한 여성을 물색해 보내다오.”

“죄송합니다만 대한민국에는 왕이나 군주가 없습니다.”

“왕이 없더라도 왕에 준하는 작위는 있을 게 아닌가.”

“있긴 합니다만 영구직이 아닙니다. 오 년마다 주인이 바뀌는 자리이기 때문에 혼약을 맺더라도 의미가 없습니다.”

“기이하군. 지도자를 그렇게 자주 바꾸고도 나라가 돌아가나?”

울토르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우리에겐 영원불사의 황제도, 불패무적의 전사도, 정의를 수호하는 심판자도 없다. 불완전한 인간이 이끄는 나라이기에 이런 체제가 되고 말았다는 말 말고는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혼약을 맺지 않고 중요한 협정을 체결하시면 안 됩니다.”

엘리시아가 울토르에게 조언했다. 나는 나대로 박병철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대통령께 따님이 있으십니까?”

“자네, 남녀관계가 강요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했던 말 벌써 잊었나.”

“우리의 임무에 국가의 명운이 달렸다고 하신 말씀도 기억합니다.”

“그건 그렇다만...”

“아니면 재벌가 여식이라면 어떨까요? 그쪽 사람들은 아직도 신분이나 이익을 따져서 결혼을 하잖습니까. 기왕에 정략결혼을 할 거라면 재벌보다 황족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물론 내가 아는 그 양반들이라면 신랑감이 황자라는 말에 만세를 부르며 뛰쳐나오긴 할 걸세. 그러나 내가 위임받은 권한엔 여염집 규수의 혼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리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네.”

“결론이 안 나는가보군.”

울토르가 말했다. 나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예, 아무리 생각해봐도 황자님의 눈에 맞을 신붓감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좋다, 혼약 건은 넘어가지. 관습이 다른 건 어쩔 수 없으니. 마지막 조건이다. 우리는 지금 많은 나라들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 우리와 친선을 맺길 원한다면 우리와 외교적으로도 같은 입장을 취해야한다. 우리의 적이 곧 그대들의 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박과장.”

“신중하셔야할 대목입니다.”

이 요구조건은 예상되었다. 황국에겐 정말로 많은 적들이 존재했다. 내가 살아있던 시절만 해도 황국은 다섯 개가 넘는 전선에서 다면전쟁을 수행했다. 그러고도 쇠락하기는커녕 그 어느 때보다 융성한 국운을 뽐냈었다.

다르마알에 의해 포탈이 열렸으니 황국은 더욱 거센 도전에 직면하고 있을 것이다. 탱크며 비행기며, 신문물을 앞세운 혼돈의 하수인들이 난장판을 벌이겠지.

어느 쪽에 올라타야 하는가를 판단해야 할 때였다. 황국이 약해지거나 무너지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으나, 만에 하나라도 그들이 가라앉는 배라면 조약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만 할 것이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뒤, 장관과 합의한 질문을 물어보았다.

“어느 나라와 전쟁중이십니까?”

울토르가 엘리시아에게 되물었다.

“엘리시아, 우리가 어디와 전쟁중이지?”

“에스테르 공국, 챠익스 제국, 유톤 연합체, 아이르 자치령, 고대의 탐식자, 이제니오스 신성 위원회......”

에스테르 공국만 빼고는 전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게다가 나라이름들이 어째 하나같이 개성이 있었다.

가장 의아한 건 챠익스 제국이란 이름이었다. 에신에서 황제란 유일신과 동의어였다. 아무리 내가 죽고 나서 세월이 흘렀다한들, 일곱 권능이 버젓이 두 눈 뜨고 살아있는데 그런 신성모독적인 존재가 자리를 잡는 게 가능한지 의문이었다.

내가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엘리시아는 계속 나라이름을 주워섬겼다.

“......뉴 텍사스, 일본, 중국, 영국, 멕시코, 러시아, 베트남,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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