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가장 짙은 그림자 (3)
“앉게나.”
박병철이 사무실에 놓인 소파를 가리켰다. 사무실 안에는 오직 나와 그 단 둘뿐이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그의 책상 위에 놓인 명패를 쳐다보았다.
외교통상부장관 박병철.
독일, 미국, 인도 등 주요 선진국의 대사를 역임했고, 테러리스트에게 피랍된 국민들을 무사히 돌려받아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다. 차기 대통령 선호도 조사에서 6~7등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고 있기도 했다. 유의미한 등수라곤 할 수 없으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오피니언 리더중 한 명임엔 틀림없었다.
“오늘 정말 통쾌하더군. 그 재수 없는 면상이 찌그러지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사진으로 찍어서 남기지 못한 게 유일한 한이야. 아, 품위 없는 표현은 용서하게. 그간 쌓인 게 많다네.”
“이해합니다.”
박병철은 프로젝트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다. 그가 국회의원들을 설득하려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건 싸늘한 냉소뿐이었을 것이다.
“한 잔 하겠나?”
그가 책장에서 위스키 한 병을 꺼내왔다. 흘끗 보기에도 값이 상당히 나갈 듯한 물건이었다.
“한 잔만 하겠습니다.”
“한 잔만일세. 우린 할 일이 많지 않나, 하하.”
나는 그와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포탈이 열린 후 나는 잃어버렸던 마력을 대부분 되찾았다. 체내의 마력이 알콜 독소를 가만히 두지 않았기에 음주란 물로 배만 불리는 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리가 주는 분위기는 즐기는 편이었다.
박병철은 단숨에 술잔을 털어버렸다. 그는 굉장히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는 빈 잔을 아쉬운 듯이 만지작거리다가, 툭 던지듯 가볍게 말을 걸었다.
“자치총독부 얘긴 천재적이었어.”
“감사합니다.”
“아까 자네가 한 방 먹인 놈. 우장진이. 그 놈이 우리더러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라고 했지? 그 말 자체는 새겨들을 구석이 있어. 우린 지금 개항기의 조선과 비슷한 상황이야. 나라를 이끌어야 할 자들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기는커녕 발목이나 잡는 중이지. 우물쭈물하다가 또다시 식민지배나 받게 되는 게 아닐까 걱정일세.”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 일은 벌어지게 되어있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내가 여러 나라를 떠돌면서 느낀 게 뭔 줄 아나? 인간은 아직 짐승이야. 잔인하고 이기적이기 이를 데 없지. 선진국 사는 짐승이 후진국 짐승보다 딱히 나을 것도 없더군. 계기만 주어진다면 인간은 얼마든지 다시 동족의 목에 사슬을 채울 걸세.”
“동의합니다.”
“울적한 얘기는 이쯤하지. 자네 인사기록을 보니 아직 홀몸이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없습니다.”
물론 있다. 나는 환생한 후 박봉팔로 살아가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분노조절장애를 유발하는 뉴스를 보며 살인충동을 참거나, 막돼먹은 상사에게 정강이를 차이는 게 그런 마음수양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마음먹은대로 되지 않는 일이 존재했다. 사랑이다.
나는 그림자에 의해 저주받았다. 전생의 업은 현생으로까지 이어졌다. 침대에 몸을 누이고 있노라면 음험한 충동이 어둠속에서 스물스물 기어 나왔다. 이런 나를 이해해줄 여자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보게나.”
장관이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의 앨범은 한 젊은 여성을 찍은 사진으로 가득했다. 안경과 단발머리가 무척 어울리는, 꾸밈없는 미소를 가진 아가씨였다.
“내 독녀일세.”
그의 얼굴에 자랑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아비 뒤를 잇겠다고 졸업하자마자 외무고시를 쳤지. 작년에 최종합격을 했고, 지금은 연수를 받고 있다네. 눈이 높아서 아직 남자를 데려온 적이 없어. 하지만 자네라면 오히려 내 딸에게 과분하다고 해야겠지. 유력한 차기 총독님이 아니겠는가, 하하.”
감탄스러운 사람이었다.
권력을 향한 욕망이란 언제나 나를 놀라게 했다. 그것들 중 하나가 혼인으로 맺어지는 가문간의 유대였다.
“강요하는 건 아닐세. 남녀관계가 강요해서 될 것 같았으면 세상 많은 일들이 단순해졌겠지. 다만 워낙 자네 근무환경이 삭막하지 않나. 또래 친구들끼리 교분을 다져둬서 나쁠 건 없을 거야.”
“말씀 감사합니다. 교분을 나눌만한 여유가 생기면 부탁을 드려보겠습니다.”
나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장관도 더는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그는 내가 총독이 될 거라는 데에 베팅한 모양이었다. 나도 그게 궁금했다. 과연 이 나라가 그 정도의 유연함을 보일 수 있을지.
“후우우...”
박병철은 포탈을 넘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는 이세계의 정취를 느낄 수도 없을 만큼 긴장하고 있었다.
“몇 번을 와도 익숙해지지 않는군.”
그의 보좌관과 수행비서들은 도시구경을 처음 온 얼뜨기들처럼 눈을 크게 뜨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기지는 정글 한가운데에 알을 박고 요새로 거듭나는 중이었다. 방책은 요 며칠 사이 확장을 거듭해 성벽과도 견줄 수 있을 만큼 늠름해졌다.
“단결!”
포탈 앞에 도열한 특전사들이 우렁차게 경례를 올렸다. 박병철은 박문식 대령을 발견하자 성큼 다가가 양손으로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고생이 많습니다, 대령님.”
“아닙니다. 장관님께서 고생이 더 많으십니다.”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이번엔 이 친구가 다 했습니다.”
박병철이 넉살좋게 웃으며 나를 가리켰다. 그는 그날 이후로 틈만 나면 날 비행기 태우는 중이었다. 딸의 중매를 서겠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저희도 박 과장에게 신세를 많이 집니다.”
“곧 이 나라가 신세를 지게 되겠지요.”
그건 너무 나갔습니다, 장관 아저씨.
포탈 앞에는 지프 다섯 대가 대기중이었다. 어떻게 4륜 구동차량을 안으로 들였는지 궁금했었는데, 대답이 가관이었다. 분해한 걸 가져와서 재조립했다고.
“회담장은 여기서 오분 거리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대로 차를 타고 쭉 들어가시면 됩니다.”
장관과 대령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정기호를 찾아 나섰다. 이젠 내 본연의 임무인 경호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정기호는 비싸 보이는 양복 위에 방어구를 걸친 채 내게로 걸어오는 중이었다. 그의 뒤를 유탄발사기와 대검, 언월도로 중무장한 크록 전사들이 따랐다. 이들을 현재 대한민국이 보유한 최고전력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소문 들었다.”
“무슨 소문?”
“대통령 앞에서 야당대표 따귀를 날려버렸다던데.”
“당대표가 아니라 최고위원이야.”
“이래서 널더러 가보라고 한 거다. 너는 가리는 게 없거든. 완전히 뵈는 게 없지.”
“.......그거 칭찬이냐.”
“당연히 칭찬이지. 너 벌써 전과 2범이잖아.”
“.......”
나는 잠시 스스로의 행동을 돌이켜보았다. 포탈을 여는 날 수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살행에 나섰던 것부터, 박문식 대령을 윽박질렀던 것 하며 우장진을 설득하는 과정까지, 다소 급진적인 경향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건 그들이 꽉 막힌 게 잘못이지, 내 탓은 아닐 것이다. 민주적인 절차로 갈등을 조율하기엔 주어진 삶이 너무나 짧았다.
“계획이나 말해봐.”
“장관님은 세 번째 차에 탄다. 나머지 네 대는 디코이야. 특전사 요원 열 명하고 내가 디코이에 나눠 타고, 너는 장관님하고 동승한다. 작전은 간단해.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가 시간을 버는 사이 장관님만 도망치면 돼.”
울토르는 명예를 아는 전사였다. 그들이 약속을 깨고 적대적으로 나올 확률은 없다고 판단했다.
우리가 고려하는 건 마그나크록의 잔당이었다. 마그나크록이 깊은 상처를 입고 도망친 후 크록은 완전히 사분오열되었다. 패망한 크록 부족들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에 무모한 도발을 감행할 수도 있었다.
“자, 출발합시다!”
박병철이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우리는 각자 배정된 차량으로 이동했다.
크록 전사들만은 예외였다. 그들은 차수진이 너무 몸집을 불려놓은 탓에 차에 탈 수가 없었다. 별 수 없이 뛰어서 따라오기로 했는데, 그들은 오히려 그걸 더 좋아하는 듯했다. 덩치만 크다뿐이지 나이는 한 달도 안 된 개체들이라 밖으로 나간다는 것만으로도 마냥 신이 나있었다.
“긴장이 되는걸.”
시동을 걸자마자 박병철이 고해를 하듯 실토했다.
“자네 말에 따르자면 이 울토르라는 자는 살아있는 신이나 다를 바가 없어. 직업 특성상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게 내 일이지만, 사람이 아닌 존재는 어떻게 대해야할지 겪어보질 못했다네. 이제 와서는 교회라도 다녔더라면 나았겠다는 생각마저 드는구만.”
“그랬으면 적응하기 더 힘드실 겁니다. 신앙심이 시험에 드는 순간을 맞이하실 테니까요.”
“그런가.”
박병철이 피식 웃었다.
기지를 벗어나자 차량이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포장도로는 기지 정문까지였다. 회담장까지 길을 낸 것도 보통 작업이 아니었다고 들었다. 기본적으로 모든 게 지구보다 몇 배씩 큰 세상이라, 중장비 없이는 나무 하나 베어내는 것조차 도전이었다.
“VIP께서 그러시더군. 이번 일이 잘 풀리기만 하면 자네가 건의한 자치총독부를 적극적으로 고려해보시겠다고. 다만 아직도 그쪽은 현장과 거리감이 있어. 입법, 사법, 행정 삼권을 통솔하는 자리다보니 이게 국가의 명운이 걸린 일이 아니라 정쟁거리로 보이는 모양이야. 간밤엔 면식도 없는 학교 선배한테서 연락이 오더라고. 총독 자리에 자기가 미는 사람을 지지해달라며.”
“놀랍지도 않네요.”
“반면 자네는 이런 말하기 뭣하지만 대학도 변변찮고, 정치권에 연줄도 없지. 자네를 총독으로 만들려면 보통 힘든 일이 아니겠어.”
그는 진심으로 나를 밀어볼 작정인 듯했다. 나는 그게 가능한 일 같지가 않았다.
“저는 자리에는 욕심이 없습니다. 괜히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이 나이 먹으면서 다른 건 몰라도 사람 쓰는 재주는 있다고 자부하네. 사람 쓸 때 내 원칙은 딱 하나야. 하기 싫다는 사람을 올리는 거지.”
“보통 그 반대 아닙니까?”
“하기 싫다는 사람은 그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지 잘 알고 있거든. 반면 하고 싶다는 사람은 그 일이 얼마나 자신에게 이득이 될지를 잘 알고 있지. 내 경험으로는 전자가 훨씬 믿을만했다네.”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게 내가 적임자라는 결론으로 귀결될 수는 없었다.
“납득이 안 된다는 얼굴이로군.”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이렇게도 생각해보게. 자치령을 세운다고 한들 당장 대한민국 국민들을 이주시킬 순 없어. 자치령의 인구는 당분간 크록들이 메우게 될 텐데, 그 친구들은 이미 자네에게 충성을 맹세했지 않았나. 그들이 자네 위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걸 납득하겠나?”
“어려울 것 같긴 합니다.”
충성 정도가 아니었다. 크록들이 내게 바치고 있는 건 종교적인 열정이었다.
“서울로 돌아가면 자네를 위한 캠페인을 시작해보겠네. 나는 그게 국가를 위한 길이라고 굳게 믿는다네. 내가 자네에게 바라는 건 작은 호의가 전부일세.”
박병철이 나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여기서부터 본론일 터였다. 이래서 정치인의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 그러나 그는 일반적인 정치인들과는 문법이 다른 사람이었다. 그가 뭘 원하는지 나는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었다.
“어떤 호의입니까?”
“황국에 대사관이 들어서거든, 내 딸애를 거기로 불러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