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29화 (29/205)

29화. 가장 짙은 그림자 (2)

“과장님께서 작성하신 보고서를 다 읽어봤습니다.”

우장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일단 과장님의 보고서가 백 퍼센트 사실이라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과장님께서 내민 모든 자료, 모든 사진들이 소설적 상상력으로 짜인 한 편의 연극이 아니라, 실재하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에신은 실재합니다.”

외교부장관이 딴지를 걸었다. 우장진은 들은 척 않으며 말을 이어갔다.

“자, 과장님께 질문을 하나 드리죠. 저 젖과 꿀이 흐르는 미지의 땅에서, 악어의 형상을 한 미지의 종족과 분쟁이 발생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우발적인 교전이 벌어졌고,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 한 명이 사망했다는 것도 사실입니까?”

“예, 사실입니다.”

“놀랍군요.”

표정은 전혀 놀라고 있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건 경멸이었다.

“그렇다면 그 분쟁이 확전이 될 가능성은 얼마나 됩니까? 우리는 안전한 겁니까, 아니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하는 겁니까?”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답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얼마나 위험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여러분은 지금 전쟁으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군사작전을 독단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한반도의 방위는 우리 혼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한미연합사령부의 몫이에요. 여러분에게 누가 이럴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까? 배지들 다시고 전작권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하시겠습니까?”

“전작권이 한미연합사에 있다고 해서 국군의 단독작전이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이번엔 국방부장관이 딴지를 걸었다. 우장진은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요점을 놓치셨네요, 제 말의 요지는 한반도에 문제가 생기면 누가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 주냐는 겁니다. 중국입니까? 러시아나 일본인가요? 아니죠. 오직 미국뿐입니다. 우린 미국 없이는 존립이 불가능한 나라에요. 그 은혜도 모르고, 우리만 잘 살아보겠다고 뒷구멍으로 호박씨나 까고 있는 게 부끄럽지 않느냔 말입니다!”

“......”

한미동맹을 끌고 올 줄이야.

어쩐지 외교부장관이 말빨로 질 위인이 아닐 텐데, 내 도움을 구하는 게 이상하다 싶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당신들의 주장대로 그렇게나 중요하다면, 행적이 의심스러운 민간 무속인들을 정부청사로 끌어들이는 걸 중지하세요. 동맹국에게 모든 진실을 떳떳하게 공개하고, 제대로 된 전문가들의 도움을 구하세요. 그게 역사에 죄를 짓지 않는 길입니다!”

우장진이 오른 주먹을 들며 부르짖었다.

‘민간 무속인’

고작 한 단어에 그들이 내게 가진 시각이 적나라하게 들여다보였다.

하긴 평생 책상머리에서 공부만 들입다 판 위인들이다. 온갖 주술적인 상징으로 가득한 내 보고서는 그들에겐 삼류 통속소설의 시놉시스나 마찬가지였겠지.

결국 우장진은 프로젝트 자체를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 그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다. 무속인들 데려다가 예산 슈킹하고 있는 거 걸렸으니 알아서 기라고.

“어떻게 생각합니까, 경호과장님.”

대통령이 내게 물었다. 그의 안색이 너무나 지쳐있어서 나는 그게 존댓말이라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동의하기 힘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에신에 진출한 게 우리나라만이 아니라는 현지인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최소 십여 개 이상의 국가가 진입해있고, 그들 중 일부는 공항을 짓고 기갑부대를 파견해 본격적인 침략을 도모하는 중이라는 정황도 존재합니다. 대통령께서 알아주셨으면 하는 점은 그들 중 누구도 우리에게 먼저 그러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들 국익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다는 말씀 같군요. 그렇게 이해하는 게 맞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진출이 늦은 편입니다. 에신의 최고위급 인사와 회담을 성사시켰으나, 회의를 하느라 한 달이나 시일이 지체되었죠. 그 사이 다른 나라들은 각자의 이익을 위한 최선의 행보를 해나가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좌시하기 어렵네요, 과장님.”

우장진이 끼어들었다.

“방금 회의가 시간낭비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 계신 분들은 각자가 국민을 대표하는 독립된 헌법기관입니다. 국민의 혈세를 한두 푼도 아니고 조단위로 쓰시겠다는 분이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저도 과장님께 예의를 차려드리기 힘듭니다.”

“차리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이보세요...”

“하나 더 동의하기 힘든 게 있습니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장진은 움찔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는 뒷발을 딛고 나서야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으나, 이미 늦은 마당이었다.

“그게 뭡니까?”

“우리는 더 이상 미국이 필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건 당신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에요, 경호과장님.”

우장진이 성난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그는 내게 기세가 눌렸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우장진 의원, 일단 들어는 봅시다.”

나는 지원사격을 해준 여당쪽 의원에게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그들도 나를 신뢰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좋으나 싫으나 정부와 한 배를 탄 마당이었다.

“포탈이 열린 이상 세상은 결코 그 전과 같아질 수 없습니다. 이젠 쏘지도 못하는 핵무기가 위협이 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대신 보이지 않는 새로운 위협이 대두됩니다.”

“어떤 종류의 위협이오?”

“주술입니다.”

“.......이 사람 완전히 미쳤구만.”

우장진이 실소했다. 다른 의원들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뿐이지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 말을 진지하게 듣는 건 외교부장관 정도가 유일했다.

나는 그들이 날 무시할수록 좋았다.

나는 암살자일 때부터 그런 걸 보는 게 좋았다. 자기는 절대 죽지 않을 거라고, 오늘과 같은 나날이 계속될 거라고 굳건히 믿었던 사람들이 절망하는 모습을.

“존경하는 의원님들, 이제 피차간에 연극은 그만둡시다. 사정은 그만하면 알겠습니다. 어쩌다 보니 예산을 횡령하게 됐다는 거 아닙니까. 몇백억으로 시작한 놀음을 조단위까지 키워보고 싶으신 거고요. 예결위에서 눈감아주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될 거라는 게 여러분들의 입장이 맞습니까?”

“에신은 실존합니다. 바로 여기 지하층에서.”

“장관님, 사정을 안다지 않았습니까. 언제까지 이 광대들을...”

짜악.

날카로운 타격음이 회의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우장진이 자신의 뺨을 스스로 후려치며 낸 소리였다.

“.......”

인간은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사고하는 걸 멈추게 된다. 지금 상황이 딱 그랬다. 모든 사람들이 할 말을 잃은 채 우장진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가장 충격을 받은 건 우장진 본인이었다. 자기 몸이 자신의 의지를 벗어나는 거,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그림자병사 소환술.

그림자와 본체는 다르게 움직일 수 없다. 그림자를 지배하게 되면 본체까지도 조종하는 게 가능해진다.

오데르는 수천 개의 그림자를 춤추게 해 일개 군단을 쓸어버렸다고 전해지나, 내가 원하는 건 겁먹은 사내 하나를 통제하는 게 전부였다.

“어떤 나라를 지배하는 독재자가 있습니다.”

정적만이 가득한 회장에 내 목소리가 찬물을 끼얹듯 울려 퍼졌다.

“그 독재자는 자기 책상 밑에 달린 단추를 누르면 언제든지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죠. 독재자는 자신이 안전하다고 믿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독재자는 어느 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삶이 허망하다고 느낍니다. 의자에 앉아 권총을 꺼내죠.”

우장진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의 손이 움직여 눈앞에 둔 볼펜을 쥐었다. 모든 사람들이 경악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볼펜을 자기 관자놀이로 가져갔다.

뚝, 뚝.

굵은 땀방울이 턱을 타고 책상 위로 쉼 없이 떨어졌다. 위축된 동공은 빠른 속도로 수축과 확장을 거듭했다.

“.......탕.”

그의 상체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졌다. 국방부장관을 비롯한 몇몇 의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그 순간 술법을 해제했다.

“그렇게 결말이 납니다. 독재자는 죽었고, 남겨진 나라에는 혼란이 찾아옵니다.”

“허어억.......”

우장진이 신음하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는 몸 여기저기를 더듬어보더니, 떨리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바로 그 눈이었다. 포탈이 열린 세상을 바라봐야하는 눈은.

나는 그에게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의원님의 협조 감사드립니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하더라도, 의사결정을 하는 건 언제나 소수의 인간들뿐입니다. 술법은 그런 취약점을 건드립니다.”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우장진이 자발적으로 협조한 게 아니라는 걸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잘 알았습니다.”

가장 빨리 정신을 수습한 건 대통령이었다. 일국의 정점에 오른 인물이니만큼 정신력이 비범하기도 했고, 화상으로만 회의에 참석하고 있어서 내 투기에 영향을 덜 받은 점도 있었다.

“그러면 경호과장님. 우리가 해야 할 건 무엇입니까?”

“새로운 질서에 대비하셔야합니다.”

-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법이라는 이름의 힘으로 간신히 유지되고 있어요. 그 힘을 넘어서는 힘이 나타난다면 세상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 거예요.

소미의 경고가 떠올랐다. 다르마알은 세상을 일대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다. 어떤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는 나도 몰랐다. 다만 확실한 건, 우린 아직 준비가 덜 됐다는 점이었다.

“현장에서는 발 빠르게 변화에 대응하고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그 속도에 맞춰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건의를 하나 드리자면, 에신에 파견된 실무자들에게 최대한의 권한을 부여해 주셔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나는 외교부장관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는 정부의 결단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며 장관님의 권한만 가지고 될 일이 아니라는 걸 느꼈습니다.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전례가 없는 일에는 전례가 없는 방식으로 대응해야합니다.”

“복안이 있습니까?”

“자치총독부를 세워야합니다.”

“......”

이번엔 다른 의미의 충격이 찾아왔다.

소위 대항해시대라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15세기 초중반, 대양을 가로지를 만큼 항해술이 발달하자 제국들은 지구 곳곳에 깃발을 꼽고 식민령을 세웠다.

포탈만 없다뿐이지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황국은 식민지배를 당할 만큼 약한 나라가 아니었으나, 에신은 제국주의적인 야욕을 충분히 담아낼 만큼 거대한 세계였다. 주인 없는 땅이 넘쳐났다.

그 빈 땅 중 아무 곳이나 들어가 태극기를 꽂으면 그곳이 바로 자치령이 된다는 것이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우선 정부의 대응이 미온적이었다는 점을 반성하도록 해야겠군요. 일단 과장님께서 올리신 모든 보고서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자료를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는 의미였다.

외교부장관의 원맨쇼가 아니었더라면 진작 엎어졌을 프로젝트였겠지.

“그리고 외교부장관.”

“예.”

“위임장을 써드리겠습니다. 이틀 안에 출발하세요.”

“알겠습니다.”

박병철이 승리의 미소를 감추며 고개를 숙였다. 야당쪽 의원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일이 착착 진행되는 걸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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