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가장 짙은 그림자 (1)
한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한 달 동안 크록은 정확히 서른두 마리로 늘어났다. 꼬리에서 분화한 크록은 일주일이 지나면 성체가 되었고, 그때 다시 꼬리를 잘라 증식했다. 매주마다 두 배로 늘어나니 속도가 감당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자연계였다면 서로 잡아먹거나 다른 부족에게 죽임을 당하는 등 갖은 이유로 증식이 억제됐겠으나, 차수진은 카룩카이와 약속한 대로 단 하나의 개체도 도태되지 않게끔 최선을 다했다.
그녀의 연구에 의해 새로운 사실도 밝혀졌다. 대체로 전사형 개체는 신체적인 능력이 뛰어난 대신 지능이 낮았고, 암살형 개체는 높은 지능을 지닌 대신 힘과 지구력이 낮았다.
드물게 힘과 지능, 민첩성과 지구력을 모두 갖춘 개체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들은 이른바 ‘1세대’, 즉 카룩카이의 꼬리로부터 태어난 축복받은 유전자를 가리켰다.
깡, 깡.
진지 귀퉁이에서 요란한 쇳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곧장 걸어 들어갔다. 곧 모루와 망치 등의 각종 철공용 장비가 그득한 작업장이 나타났다. 이곳은 50년째 대장장이 외길만을 걸어온 김송화씨의 공방이었다.
야장 김송화.
그는 장인이라는 칭호가 부끄럽지 않은 몇 남지 않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를 프로젝트에 포함시키는 건 에신1과의 중대한 과제였다. 나이가 있는 만큼 설득이 어렵지 않을까 싶었는데, 소미의 부탁 한 마디에 흔쾌히 승낙을 해줬다고 한다.
“안녕하십니까.”
“왔는가, 박과장.”
용광로에서 풍기는 후끈한 열기가 야장의 인사보다 더 빠르게 날 반겨주었다. 대장간엔 그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세 명의 전사형 크록들이 허드렛일을 돕는 중이었다.
“고생이 많으시군요.”
“고생은 무슨, 내 평생 지금처럼 신명나게 일을 해본 적이 없어.”
그가 벗겨진 머리를 타고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았다.
“부탁드렸던 건 어떻게 됐습니까?”
“물론 끝내두었다네.”
김송화가 벽에 걸어뒀던 가슴방어구를 한 벌 가져왔다. 통짜 철판을 두들겨 만든 단순하면서도 기능적인 갑옷이었다.
“한 번 시험해볼 텐가?”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그가 건넨 가슴방어구를 벽에 기대어 세웠다. 그리고 검을 뽑아 마력을 급속도로 끌어올렸다.
쉬이이이.......
응축된 마력이 검신 전체에서 연기의 형상으로 뿜어져 나왔다. 내 마력이 이전보다 진일보했음은 연기의 양만으로도 알 수가 있었다.
나는 마력이 모이자마자 기술을 전개했다. 검신이 허리춤에서 쾌속하게 뻗어나가 갑옷 정중앙을 단숨에 꿰뚫었다.
빠각.
뻑적지근한 소리와 함께 스파크가 요란하게 튀었다. 방어구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안쪽으로 깊게 우그러들었다.
“어떤가?”
김송화가 긴장된 어조로 물었다. 나는 검을 손에서 놓은 채 갑옷의 상태를 확인해보았다.
검극이 방어구를 손가락 하나 길이가량 꿰뚫었다. 치명적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충분히 중요한 장기를 건드릴 수 있을만한 깊이였다.
“지난번보다 훨씬 낫군요.”
“어디 보세.”
김송화가 갑옷을 넘겨받았다. 그는 갑옷을 요모조모 뒤집어보며 시시각각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결국 갑옷을 잔뜩 쌓인 철판더미 사이로 던져버렸다.
“또 쓰레기를 만들고 말았군.”
“충분히 쓸 만한 물건입니다.”
쓸 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재료의 성능을 물리적인 한계 이상으로 끌어낸 작품이었다. 평범한 갑옷 같았으면 머리통만한 구멍을 뚫어버릴 수도 있었다.
“괜한 말 말게, 찌르기 한 번도 막지 못하는 갑옷이 무슨 쓸모가 있겠나? 이런 실력으로 명인을 자처했다니, 웃기는 노릇이지.”
“아무도 어르신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나도 날 의심하지 않았다네. 검으로 철판을 꿰는 사람을 보기 전까지는.”
김송화가 다시 망치를 쥐었다. 그는 좌절하기는커녕 더욱 뜨거운 열정으로 타오르는 중이었다.
“힘이 되는 건 소미님의 말씀이 옳다는 게 증명되고 있다는 사실일세. 이 땅에는 초월적인 존재의 축복이 깃들어있어. 하루하루 나 자신을 비워내며 그분을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다네. 이 나이가 되어서 실력이 느는 재미를 느끼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김송화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가 말하는 초월적인 존재란 소미가 섬기는 에사인, 강철의 카둔이었다.
카둔은 모든 대장장이의 우상이었다. 모든 제련 가능한 금속의 지배자이기도 했다. 전설로 회자되는 최고의 무구는 대부분 그의 추종자의 손에서 제작되었다.
“그런데 자네도 참 어지간하구만. 솔직히 오늘 만든 놈에겐 기대를 걸었었어.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자네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걸 결코 믿지 못했을 걸세.”
그는 크록들을 돌아다보며 한 마디 덧붙였다.
“물론 이런 기운찬 젊은이들이 있다는 사실도 믿지 못했겠지. 자네의 일격을 견디는 놈을 만드는 게 당면한 내 목표라네. 머지않았을 테니 두고 보게나.”
정말로 머지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기술적으로는 완성되어 있었다. 그에게 부족한 건 오직 카둔을 향한 신심뿐이었다.
“기대하겠습니다, 어르신.”
“이걸 받아가게.”
그가 망가진 방어구와 같은 디자인의 방어구를 하나 내밀었다.
“내 역작이 나올 때까지 임시로 쓰게나.”
“감사합니다.”
나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대장간을 떠났다.
“어이.”
골목을 돌자, 기다렸다는 듯이 정기호가 나타났다. 그는 하와이안 셔츠에 짧은 반바지를 입은 채 멋들어진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거기다가 김송화 장인이 만든 갑옷과 양손검까지 걸치니 굉장히 유니크한 패션이 완성되었다. 차원을 넘나드는 21세기형 검사라고 해야 하나.
“네가 여기 와있을 줄 알았지.”
“무슨 일이냐?”
“장관님 호출이다.”
“또?”
“한 번도 나온 적 없잖아, 너.”
나는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모른다기보다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외교부에서도 가장 실세가 된 이세계협력국, 그 중에서도 장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경호과를 이끄는 입장에선 더 이상 정치를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이젠 나도 정치의 일부가 됐다고 봐야 옳았다.
지난 한 달간 박병철 외교부장관은 울토르와의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발바닥이 닳도록 뛰어다녔다.
이 일은 그의 직권을 한참 벗어난 일이었다. 대통령의 재가만으로도 불가능했다. 프로젝트가 계속되려면 여당과 야당을 아우르는 초당적 협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 경호과장, 여기 꼰대들을 설득하려면 자네가 나서야해.
외교부장관은 내게 당정청 회의에 출석해줄 것을 요구했다. 거기서 왜 프로젝트가 시대적 사명인지 역설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냥 네가 나 대신 가주면 안 되겠냐?”
정기호는 천생 귀족이었다. 선글라스 하나만 걸쳐도 때깔이 달랐다. 이런 일은 나보다 그가 훨씬 잘 해낼 것이다.
“과장은 너야.”
“귀족은 너고. 정치는 귀족 나리들의 몫이지.”
“내가 정치를 잘했으면 암살됐겠냐.”
“.......”
반박할 말이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여동생에게 암살을 당했으니.
“언제냐? 그 회의.”
“내일.”
내일이면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하지만 회담 얘기가 나온 게 벌써 한 달 전이었다. 한 달 동안 정부는 회의만 주구장창 하면서 어떤 결론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울토르가 천년만년 기다려줄 것도 아니니 이쯤에서 결심을 내려야할 듯했다.
“내가 알아둬야 할 게 있냐?”
“글쎄다.......주워듣기로 야당 반대가 심하다던데.”
“왜?”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거지. 예산도 너무 많이 먹고, 어떤 이득이 있는지는 모르겠고.”
야당이 반대를 하는 건 당연하다고 봤다. 그들의 목적은 정권을 가져오는 것일 테니, 지금 정부가 성과를 내서 좋을 게 하등 없었다.
문제는 이성이나 논리가 아닌, 정치적인 유불리만으로 움직이는 족속들을 내가 무슨 수로 설득하느냐는 것이다.
“......오늘 훈련은 너 혼자 해라.”
“복귀하게?”
“그래.”
정치적인 유불리만으로 움직이는 족속들.
정치인,
다른 말로 하면 귀족.
현생에선 나와 관련이 없는 부류인 게 맞다. 그러나 전생에선 신물이 나도록 겪어봤다. 나의 제일가는 고객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의 행동 동기는 몰라도, 그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는 알고 있다.
다음날 외교부청사 보안구역에서 초당적인 당정청 회의가 주재되었다.
제1야당과 여당의 당대표, 원내대표, 최고위원, 장관과 국무총리 등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실세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대통령은 언론을 떼어내기 위해 청와대에서 화상으로만 참석하기로 했다.
“드디어 자네 얼굴을 보게 되는군.”
박병철이 회의실 앞에서 내게 알은체를 했다.
“죄송합니다. 먼저 찾아뵀어야하는데...”
“이해하네. 자네가 바쁘라고 승진을 시켜준 거니.”
박병철이 사람 좋게 웃었다. 그는 의리를 아는, 흔치 않은 타입의 관료였다.
“가급적이면 자네 손을 빌리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여기도 사람만 죽지 않는다 뿐이지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야. 이곳에서의 전쟁에서 지면 자네가 참가중인 다른 곳의 전쟁도 저절로 지게 된다네.”
“지고 계십니까?”
“지금까지는. 하지만 자네가 참전했으니 달라지겠지.”
그는 내 어깨를 두들긴 후 회의실 안으로 향했다. 나는 그를 따라 들어가진 못했다. 증언이나 자문이 필요해질 때, 호출이 있어야만 입장이 가능하다고 했다.
- 그래서 당신들이...!
- 그런 언사는 용납할 수 없...
얼마 지나지 않아 안에서 고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과연 전쟁에 빗댈만했다. 욕을 빼놓고는 할 말 못할 말 다 하고 있는 듯했다.
약 한 시간여가 흐르자, 마침내 호출이 들어왔다.
“박봉팔 경호과장님. 들어오시면 됩니다.”
나는 비서관들이 열어주는 문을 지나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내로라하는 인간들이 타원형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나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대통령은 테이블의 꼭짓점에 놓인 커다란 모니터 안에서 나를 살펴보았다. 그는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 회의 탓인지, 아니면 격무 때문인지 며칠 잠을 설친 사람처럼 초췌해보였다.
“거기 앉게.”
“예.”
나는 빈 자리로 가서 앉았다.
“자기소개를 부탁하지.”
“저는 이세계협력국 경호과 과장 박봉팔입니다. 현지에서 경호업무를 총괄하고 있습니다.”
“박봉팔이라, 이름이 특이하시네요.”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대신 한 번 들으면 잊기는 쉽지 않겠습니다, 하하.”
내 또래로 보이는 남성이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그의 이름은 우장진.
삼십대의 나이에 제1야당의 최고위원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주된 장기는 말빨. 토론프로그램을 나가기만 하면 상대 패널을 뭉개버린다고 해서 별명이 우장군이라나.
그가 오늘 내 맞수가 될 자였다. 야당의 당대표나 원내대표는 나이와 선수만 많지, 토론이 되는 인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