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망명자 (10)
“소미님, 잠시만 기다리시죠.”
나는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엘리시아가 여기까지 온 이유에는 그녀를 만나려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인사 정도는 시켜둬야 할 것 같았다.
소미가 고개를 돌려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녀의 낯이 유달리 창백했다. 뿐만이 아니라 이 기운.
살기가 틀림없었다.
그녀는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투명한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았다.
소미는 당황하거나 수줍어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발산하는 기운은 훨씬 잔인하고 야만적인 것이었다.
- 죽기보다 포탈이 열리는 걸 더 싫어하는 이유가 뭐겠나요?
문득 아약이 던졌던 질문이 떠올랐다.
환생자들은 전생의 이야기를 나누길 꺼려했다. 인연이, 상황이 꼬일대로 꼬여서 피치 못할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과정은 일종의 트라우마와 같았다.
그녀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음이 분명했다. 적지 않은 일을 함께 겪었음에도 그녀에 대해 알려진 것이라고는 카둔의 사제였다는 게 전부였다.
“그냥 가주세요.”
그녀가 내게 조용히 말했다.
마치 주변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던 입가엔 송곳같은 냉기만이 깃들어있었다.
이것이 그녀의 진짜 모습이라 확신했다. 강철의 자매단원으로서 그녀가 손에 묻혀야만했던 피는 결코 나보다 적지 않을 터였다.
“알겠습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뒤로 물러났다.
어차피 사정은 차차 알아 가리라 본다.
최소한 그녀는 가면을 한 꺼풀 내려놓았다. 그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다음 날 나는 꼭두새벽부터 차수진 박사의 방문을 받았다. 그녀는 카룩카이의 어깨위에 목말을 탄 채 나타났다. 둘은 말도 통하지 않으면서 벌써부터 손발이 착착 맞는 듯했다.
“과장님, 좋은 소식과 더 좋은 소식이 있는데 뭐부터 듣고 싶으세요?”
“좋은 소식요.”
“따라오세요.”
박사가 손짓으로 카룩카이에게 한 건물을 가리켰다.
“편의상 여길 배양실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아직 적당한 용어를 지어내지 못했거든요.”
건물 안은 습하고 서늘했다. 바닥엔 흙이 깔려있었고, 인공적으로 조성된 연못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몰라볼 정도로 성장한 카룩카이의 새끼가 보였다. 이젠 저걸 새끼라고 불러야할지조차 의문이었다.
놈은 바닥의 흙을 까뒤집으며 놀다가, 차수진을 발견하자 오리처럼 뒤뚱거리며 다가왔다. 놈은 심지어 간단한 한국어를 구사하기까지 했다.
“차수진, 밥.”
“놀랍죠?”
“예.”
“전혀 놀라는 표정이 아니신 걸요.”
“마음속으로는 깊이 놀라고 있습니다.”
“더 놀라게 해드릴게요. 이 애가 먹어치우는 고기 양이 하루에 얼마나 될 것 같으세요?”
“제가 알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맞혀보세요.”
“글쎄요, 닭 세 마리?”
“틀렸어요. 무려 0.1톤이 넘어요. 거의 아프리카 사자의 세 배에 가까운 양이죠!”
차수진이 카룩카이의 어깨 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녀는 장갑을 끼고 바구니에 손을 넣어 고기를 한 움큼 끄집어냈다.
“차수진, 밥.”
새끼가 아가리를 쩌억 벌렸다. 누가 보면 고기가 아니라 사람을 잡아먹으려 덤벼드는 줄로만 알 것 같았다.
“많이 먹으렴. 또 있으니까.”
십여 근의 고기가 게 눈 감추듯 사라지고 말았다. 과연 먹성이 장난이 아니었다.
“크록은 영양 상태에 따라 종이 나뉜다고 해요. 육류를 많이 먹이면 이렇게 빛깔이 검어지면서 체격이 커지구요, 생선을 많이 먹이면 비늘이 푸르스름하게 변하면서 날렵해진다고 하네요. 왜 그런지는 묻지 마세요. 저도 그것 때문에 지금 머리가 터질 지경이거든요!”
영양 상태에 따라 계급이 나뉜다는 말은 카룩카이에게도 들었었다. 검고 큰 놈은 전사, 푸르스름하고 작은 놈은 암살자로 분류하면 될 것 같다.
“지금 모든 연구원이 이 아이에게만 매달리는 중이에요. 만능 재생세포의 비밀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여기 넘어온 보람이 있을 테니까요. 우선은 신체생장을 극대화하는 걸 목표로 잡았어요.”
“괜찮은 목표인 것 같습니다.”
크록 장갑보병과 악어기수들이 황군을 애먹이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전력이 한두 마리라도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그리고 현지에서만 구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재료를 먹이면 과장님처럼 술법을 쓸 줄 알게 된다는데요. 혹시 시간 남으시면 재료를 구해다주실 수 있을까요?”
“뭐가 필요합니까?”
차수진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음.......마그나.......크록의 피?”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아이, 어떻게 좀 해주세요.”
“절더러 죽으라는 말씀이십니다만.”
차수진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나는 마그나크록의 피를 뒤집어썼을 때가 떠올랐다. 알고 보니 그 피가 상당히 영험한 피였다는 듯했다. 이미 씻어낸 다음이지만, 몇 모금은 피치 못하게 마시고 말았던 것 같은데 마력에 변동이 있을지 궁금했다.
“도와주실 일이 또 있어요. 저희는 과학자도 더 부르고 시설도 증설해서 연구를 본격적으로 진행해볼 계획이에요. 그러면 크록의 숫자가 빠르게 늘어나게 될 텐데, 그 많은 크록들을 어떻게 관리해야할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관리가 안 된다고 해서 포탈 안으로 데려갈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조리 경호과 소속으로 만들어버리면 됩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인사권자니까요.”
나는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크록 전사라니, 이보다 더 든든한 전투원이 어디 있을쏘냐.
장거리에서는 대구경 화기를 운용하고, 근접전이 되면 검술로 대응한다. 새카만 비늘은 소구경 총탄이나 창칼을 튕겨낼 테고, 강한 완력은 진지공사나 각종 작업에도 제격이다.
그야말로 꿈의 부대였다.
식비가 어마어마하게 많이 든다는 것만 빼고는.
“물론 카룩카이와 협의를 해봐야겠죠.”
카룩카이는 후손들이 문명화되기를 원했다. 동시에 전사가 필요하다고도 했는데, 어느 쪽이 진심인지 알아볼 차례였다.
“카룩카이.”
나는 거구의 악어에게 에신어로 말을 걸었다.
“왜 부르느냐, 비늘 없는 자의 전사여.”
나는 그에게 내가 구상한 계획을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크록의 숫자를 늘려서 전사단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그가 진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구상한 계획과 너희 비늘 없는 자들의 계획이 일치하는구나. 나는 오랜 기간 마그나크록에게 쫓기며 숲을 홀로 떠돌았다. 힘이 없이는 지식도 멀다는 게 내가 얻은 결론이다. 다만 이들이 내 꼬리에서 기인할 것이니만큼, 몇 가지 조건을 달아보겠다.”
“뭐든지.”
“우선 배불리 먹여라. 도태되는 자손이 없도록.”
“밥 굶는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해.”
하루에도 수천수만 톤의 음식물 쓰레기가 버려지는 나라다. 너무 많이 먹여서 비만이 됐으면 됐지, 못 먹여서 문제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둘째, 너희의 지식과 언어를 가르쳐라.”
“학교라도 지어야겠네. 장관님께 건의를 드리지.”
교육은 작전수행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왜, 미국은 실질적 문맹률이 너무 높아서 군인을 뽑는 게 어렵다고까지 하잖아.
다행인 건 크록의 지식습득속도가 성장속도만큼이나 빨라서 우리처럼 십여 년을 붙들어두며 교육을 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점이다.
“마지막이다. 이 조건이 가장 까다로울 것이다. 우리는 위대한 존재를 떠받들도록 설계된 종족이다. 우리는 육신의 허기만이 아니라 영혼의 갈증 또한 채워야만 한다. 우리에겐 마그나크록을 대신할 무언가가 필요하다.”
마그나크록을 대신할 무언가라.......
그는 내게 섬길 에사인을 요구하고 있었다.
영혼의 갈증이 크록을 얼마나 극적으로 바꿔놓는가는 겪어봤었다. 오합지졸 같던 놈들이 마그나크록의 진신을 영접하자 완전히 미쳐 날뛰었었지.
에사인이라면 몇 알고 있긴 했다.
그러나 나와 계약을 맺은 오데르는 남에게 소개를 해줄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소미가 섬기는 카둔은 황제와 지나치게 가까워서 우리의 손을 빠져나갈 위험이 있었다.
“......확실히 까다로운걸.”
적임자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대한민국의 편이라고 할 만한 에사인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카룩카이는 고민하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왠지 그는 답을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천할만한 에사인이 있나?”
“있다, 에사인은 아니지만.”
“누구?”
“너다, 비늘 없는 자들의 전사.”
카룩카이가 손가락 끝으로 나를 가리켰다. 나는 순간 진심으로 당황했다. 나 따위가 마그나크록을 대신할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너는 갈 곳 없던 나를 받아주고, 내 자손이 머물 자리를 기꺼이 만들어주려 한다. 너는 마그나크록의 품을 떠난 내가 유일하게 믿고 따를 수 있는 자다.”
“하지만 난 위대한 존재가 아니야.”
“에사인도 한때는 너와 같았지. 위대함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
물질은 나누면 작아지지만, 신성성은 나누면 나눌수록 커진다.
존재는 추종자의 숫자에 따라 강해진다는, 이른바 신성한 계약이론.
누구나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으나 실천할 엄두는 내지 못하는 법칙이다. 대체 어디서 뭘 해야 목숨을 내놓을 만큼 자신을 따르는 사람을 모을 수 있을까? 뭘 해야 필멸자의 몸으로 태어나 궁극의 존재에 닿을 수 있을까?
그 답이 눈앞에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제안이 가져다줄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쭈뼛쭈뼛 돋았다. 좋은 쪽으로나, 좋지 않은 쪽으로나.
일단 마그나크록이 분개할 것이다. 그는 크록의 유일신이어야만 했으니.
어쩌면 오데르도 화를 낼지도 모른다. 어떤 에사인도 추종자가 자신과 동등한 신격으로 거듭나기를 원치 않았다.
“나는 마그나크록을 저버린 후 영혼의 갈증에 시달리고 있다. 방랑은 답이 아니었다. 너희의 문물과 지식에 탐닉해보았으나 그것도 답이 아니었다. 내게는, 우리에게는 네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에신으로 돌아와서 내 야심에 다시 불이 지펴진 건 맞지만, 에사인을 노린다는 건 전생에서도 감히 꿈꿔보지 못했던 목표였다.
“흐음.......”
카룩카이가 별안간 주둥이를 킁킁거리더니, 갈고리 같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 송곳니에 마그나크록의 피가 묻어있군.”
“........”
“그건 답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어떤가?”
“.......그러네.”
실소가 나왔다.
나는 끝까지 확답은 하지 않았다. 내가 그럴 자격을 가진 인간인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마그나크록과 척을 졌고, 오데르에게도 내다버린 자식이 되어가는 것만큼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