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망명자 (9)
자격을 갖춘 자.
그 단서는 문제가 될 소지가 높았다. 나는 대한민국의 선출직 공무원이나 임명직 공무원들이 에신의 신적 존재와 대등하게 대화를 나눌 역량이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외교부장관 박병철은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모든 걸 던졌다. 아약이 죽었을 때는 나를 적극적으로 감싸주기도 했었다.
그는 상당한 수완가이자 야심만만한 정치가이나, 울토르와 대면하는 일은 그가 헤쳐 온 역경들과는 차원을 달리할 것이다.
나는 본영에서 이틀을 묵은 뒤 길을 떠났다. 시신을 수습하고 염을 하는 등 최소한의 뒤처리에 필요한 시간이었다.
물론 그런 일들이 내 몫은 아니었으나, 황국은 내가 홀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다. 그들은 엘리시아를 포함한 수행원 몇 명과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말이 좋아 수행원이지, 감시역이나 조사관이라고 보는 게 옳았다. 그들은 내가 다르마알의 끄나풀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해두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정글이 싫다.”
엘리시아가 축축한 나뭇가지를 밟아 부러뜨리며 말했다.
“왜?”
“답답하고, 복잡하고, 마치 덫에 걸린 것처럼 느껴진다.”
덫이라고 하니 문득 비익족에 관한 일화가 하나 떠올랐다. 아름답고 희귀하여 본디 관상용으로 길러지던 종족이었으나, 여섯 번째 권능을 배출하게 된 후 널리 번성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다른 수행원들은 불평불만 없이 묵묵히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은 울토르가 직접 차출한 북풍의 전사들이었다. 그들은 울토르의 명령이라면 불구덩이를 지나간다한들 상관하지 않을 자들이었다.
본영에서 삼사 킬로미터 가량 벗어나자, 허리에 찬 무전기가 치직거리더니 황승연 중사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 악어 둘. 악어 둘. 악어 하나 있습니까?
- 여기는 악어 하나. 말씀하시죠.
- 둥지는 이상 없습니다. 악어 하나는 어떻습니까?
- 이상 없고, 거북이 넷을 데려갑니다.
거북이란 손님을 의미했다. 이틀 내내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았으니만큼 달리 더 해줄 말은 없었다. 나는 무전을 끝내자마자 네 쌍의 불안한 눈초리와 맞닥뜨렸다.
“마계의 물건이로군.......”
“좀 복잡한 기계장치일 뿐이야.”
“그런 복잡한 장치를 만들 수 있는 건 너희같이 마계에서 온 자들뿐이다.”
나는 엘리시아는 물론이거니와 강인한 북풍의 전사들에게서조차 희미한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쯤 되니 궁금해진다. 우리보다 앞서 진출한 마족이란 자들은 대체 무슨 일을 해왔던 건지.
“혹시 마족과 황국이 전쟁중인가?”
“어떤 포탈에서 왔느냐에 따라 다르다. 전쟁을 좋아하는 마족도 있고, 어딘가에는 너처럼 온건한 마족도 있다고 들었다.”
“싸워본 적은?”
“나는 없다.”
“우리는 있소.”
북풍의 전사 한 명이 쇠를 긁는 듯한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들은 에신에서 제일가는 전쟁광이었다. 겪어보지 못한 전장이 없을 터였다.
“마족들은 어떤 방식으로 싸웁니까? 어떤 기계를 사용하던가요?”
“기계인가 뭔가는 모르겠고, 우리가 지금껏 싸워봤던 적들 중 가장 기이하고 강력한 적이라는 것만큼은 말해두겠소. 놈들은 보이지도 않는 거리에서 우리의 마을과 성을 잿더미로 만들었소. 사람보다 훨씬 빨리 달리며 불을 뿜어대는 강철 덩어리들을 보기도 했소. 일개 병사로 보이는 자들조차 불을 뿜는 주술구를 가지고 다니더군.”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성을 잿더미로 만들었다라.
에신의 성은 기본적으로 마법이나 주술에 대한 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 초장거리에서 대마법 방어진을 상회하는 화력을 냈다면 박격포나 자주포일 확률이 높았다.
“강철 덩어리라는 게 얼마나 컸습니까?”
북풍의 전사는 등에 멘 양손검을 가리켰다.
“이 놈을 대여섯 개 이은 것보다 크더군.”
양손검 여섯 개를 이으면 약 십이 미터가 된다.
.......전장 십이 미터나 되는 강철덩어리라니.
다소간의 과장을 감안하면 탱크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포탈이 오라지게 좁은 탓에 탱크는커녕 이동용 승합차조차 반입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다른 나라가 탱크나 자주포를 들여온 게 사실이라면, 아무래도 포탈의 폭이 나라마다 다른 게 틀림없었다. 다르마알과 원만한 협조가 이루어졌다면 우리도 받았을지 모르는 서비스였다.
“내가 직접 본 건 그게 다요.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배를 봤다는 말도 있소.”
“하늘을 나는 배요? 그건 얼마나 컸다고 합니까?”
나는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
탱크나 자주포까지는 용인범주 내의 이야기였다. 포탈 크기가 충분하기만 하다면 시동 걸어서 몰고 오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비행기를 날린다는 건 간단치 않다. 일단 충분한 길이의 활주로가 확보되어야만했다. 관제탑도 지어둬야 할 테고, 정비공이나 조종사, 관제사 등 많은 고급인력을 투입해야했다. 이 모든 인프라를 내지에서 갖췄다면 그건 이미 침략이라고 봐야만한다.
그래서 비행체의 크기가 중요했다. 우리처럼 드론이나 날린 건지, 제대로 된 항공기를 띄운 건지.
“글쎄, 나도 들은 이야기라 확실하진 않지만....”
북풍의 전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먼 발치에 솟은 산을 가리켰다.
“저런 산을 몇 개 이어붙인 정도였다는군.”
“......”
산만한 비행기는 어디에도 없다. 수십년 전 가스로 날아다니던 비행선이라면 모를까.
그것도 꽤 크다는 정도이지, 산과 비견될 만큼은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소문이라는 게 사람 하나 건너뛸 때마다 불어나기 마련이라, 이것만큼은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굉장히 큼직한 비행체가 출몰했다는 것만큼은 염두에 둬야할 듯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 없으니.
우리는 하루거리를 걸어 기지로 복귀했다. 기지는 단 이틀 만에 엄청나게 변모해있었다. 작은 마을 하나에 버금갈 공터가 모래방둑과 목책으로 완전하게 둘러싸인 채였다. 진지 곳곳에는 기관총뿐만이 아니라 유탄발사기도 대거 비치되었다.
병력이 늘어난 것도 눈에 띄었다. 족히 대대병력은 주둔하고 있는 듯했다.
가장 놀라웠던 건 방책 옆에 주차된 4륜구동 차량의 모습이었다. 분명 4륜 차량은 들여올 길이 없었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정문엔 번듯한 위병소도 세워져있었다. 부사관 두 명이 위병근무를 서는 가운데 황승연 중사가 마중을 나온 참이었다.
“......돌아오셨습니까.”
“예, 다시 보니 반갑네요.”
나는 중사가 한눈을 판다고 해서 나무랄 생각이 없다. 엘리시아가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건 필연적이었다.
그녀는 우리의 미적기준으로도 미인인데다가, 흙투성이에 까치집을 한 나와 달리 너무나도 산뜻해보였다. 금빛 갑옷은 구름이 비치리만치 반들거렸고, 고이 접어둔 순백의 날개엔 낙엽 하나 붙어있지 않았다.
“저것이오. 내가 봤던 불을 뿜는 막대가.”
북풍의 전사가 특전사가 들고 있는 소총을 가리켰다. 그녀와 북풍의 전사들은 긴장하는 게 티가 날 정도로 몸이 뻣뻣했다. 그들은 산 채로 마족의 소굴에 끌려온 게 아닌가하고 번민하는 듯했다.
나는 황승연 중사의 인도를 받아 지휘통제실로 향했다. 진입로부터 통제실로 이어지는 길도 상당히 변했다. 건물들이 대대적인 개축이 된 탓에 어디가 어디인지 몰라볼 지경이었다.
박문식 대령과 장교들은 이미 소식을 듣고 나와 있었다. 뿐만이 아니라 온 사방에서 병사들이 몰려드는 중이었다.
“내가 뭘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오, 주여.......”
장교 한 명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유령 얘기가 나오자마자 성호를 그었던 자가 틀림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 장교만큼은 아니어도 날개 달린 인간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천사가 아닙니다.”
나는 확실하게 못을 박아두기로 했다.
“자자, 다들 위치로 돌아가! 지금 그렇게 한가하지 않을 텐데!”
엘리시아와 북풍의 전사들이 불편해하는 듯하자, 박문식 대령이 나서서 병사들을 쫓아버렸다.
“나는 이곳의 책임자인 박문식 대령이라고 전해주겠나.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환영한다고도 말해주게.”
“알겠습니다.”
“인사는 어떻게 나누지? 악수를 하면 되는 건가?”
그건 나도 의문이었다. 종족에 따라 다르고 소속에 따라 다른 게 여기 인사법이라.
대령의 말을 통역해주자 제각기 다른 답변이 돌아왔다.
“우린 방패와 무기를 부딪혀본다. 방어구의 단단한 정도로 카둔의 축복을 엿볼 수 있으니.”
“우린 인사를 따로 나누지 않소. 인연이란 전사에게 목숨만큼이나 부질없지.”
두 전사단의 방식이 달랐다. 그래서 로마법을 따르기로 했다. 엘리시아가 대표로 대령과 악수를 나눴다.
찰칵, 찰칵.
군무원 한 명이 역사적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악수를 나눈 뒤 우리는 지휘통제실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통역 겸 당사자를 겸해서 이틀 전 벌어졌던 전투와 전투가 불러들인 결과에 대해 소상히 말해주었다.
대령은 듣고 싶은 이야기가 무척 많은 듯했다. 그러나 우리를 오래 붙들어둘 순 없었다. 숲길을 하루거리나 걸어온 마당인데다가, 대령이나 엘리시아나 외교적인 임무를 띠고 온 게 아닌지라 이쯤에서 손님 접대로 넘어가야 할 때였다.
그러나 여기서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발생했다.
“식사는 사양하겠다. 어차피 내일이면 떠날 것이니.”
엘리시아가 별다른 이유도 없이 끼니를 거르겠다고 선언했다. 북풍의 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오늘 하루 소모한 칼로리를 고려해본다면 앉은자리에서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해치워도 모자를 지경이었다. 실제로 나는 황군 본영에 머물며 이들의 먹성을 확인했었다.
“왜? 우리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까 걱정되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너희의 음식도 충분히 훌륭하겠지만, 단지 우리가 시장하지 않을 뿐이다.”
“......”
엘리시아는 곱게 자란 티가 났다. 얼마나 곱게 자랐는가하면 자기가 거짓말을 한다는 걸 최소 다섯 가지는 넘는 바디랭귀지로 표현하는 중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 요구했다.
“솔직하게 말해줘. 억지로 먹일 생각은 없으니.”
“그, 그냥 신경이 쓰여서 그런다. 마계의 재료로 조리된 음식을 우리가 먹어도 괜찮을지. 축성을 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막사에 성물을 두고 오지 않았겠느냐.”
인간에게 약인 물질이 다른 생물에겐 독이 될 수도 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내가 황군 본영에서 이것저것 잘 얻어먹고 온 시점에서는 핑계에 가깝다.
게다가 우리가 준비한 메뉴는 삼겹살이었다. 육류를 불판에 올려 구워먹는 요리는 에신에도 흔해빠졌다.
“엘리시아, 일단 마계라는 명칭부터 어떻게...”
갑자기 지휘통제실 문이 활짝 열리더니, 소미가 하늘색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경호과장님.”
그녀가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했다.
“이범영 과장님이 상황이 무척 나쁘다고 하셔서 회사엔 하루 쉰다고 말하고 달려왔어요. 저라도 보탬이 되어야 할 것 같아서...”
소미는 뒤늦게 엘리시아를 발견하고는 말끝을 흐렸다. 반면 엘리시아는 소미를 보고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소미는 환생자이니. 두 사람 사이엔 카둔의 신도라는 점 말고는 아무런 접점이 없을 터였다.
그러나 소미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그녀는 비익족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마치 유니콘이나 요정을 목도한 사람처럼 충격으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녀는 그것도 모자라서 왔던 길을 말없이 되돌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