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망명자 (8)
엘리시아는 나를 안은 채 전선을 가로질렀다. 마그나크록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 뒤로 전황에 일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크록들의 눈에서 광기가 빠져나가고, 두려움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라!”
“도망쳐, 도망치자!”
크록들은 앞을 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장군도 예외란 없었다. 심지어 지성이 없어 뵈는 악어들조차 통제를 벗어나 숲으로 달음질쳤다.
황군은 무자비한 추살작전을 펼쳤다. 특히 비익족의 활약이 대단했다. 비익족의 추격대는 등을 돌리고 뛰는 크록들을 빗자루처럼 쓸어 담았다.
크록 군대는 시신이 들판을 뒤덮을 정도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나, 마그나크록만큼은 끝내 살아서 돌아갔다. 울토르는 상처 입은 에사인을 쫓아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위험을 감수하진 않았다.
엘리시아는 나를 황군의 본영에 데려다놓았다. 숲 중앙을 넓게 벌채하고 천막과 취사장 등을 만들어놓은 장소였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상황이 정리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얼마나 걸리는데?”
“글쎄다.......최대한 빠르게 자리를 마련해보도록 하마. 이것도 내 권한으로 되는 건 아니라서.”
“네 권한으로 되는 게 없는 것 같은데.”
엘리시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모르긴 몰라도 부단장 끗발이 생각만큼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치 이제 막 공무원 물을 들이키고 있는 나를 보는 듯했다.
“그리고 미리 일러두지만, 오데르의 신도나 혼돈의 하수인에 대한 시각이 매우 좋지 않다. 네가 큰 공을 세운 건 사실이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려면 가급적 울토르님이 오실 때까지는 조용히 있는 걸 추천하마.”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 형제들이 유별나게 악독한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설마 몇 만의 목숨을 구한 사람을 푸대접할까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우려는 곧 현실이 되고 말았다.
“어이, 엘리시아. 이 새끼는 뭐냐.”
늑대 머리에 사람 몸을 한 수인이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다가왔다. 그는 나만큼이나 몸을 피로 물들인 모습이었다.
“이텐님 소관이 아닙니다. 울토르님께서 직접 대화를 나누실 겁니다.”
“가만, 이 새낀 마족 아니냐? 난 마족 나부랭이완 싸운 기억이 없는데.”
“이 분은 마그나크록에게 상처를 입힌 영웅이십니다.”
“뭐?”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제가 똑똑히 본 사실입니다.”
“크크크크, 엘리시아. 네년이 이젠 이렇게까지 추해지는구나. 이런 덜떨어진 마족놈이 마그나크록에게 상처를 냈다고? 차라리 네 허전한 아랫도리 때문에 데려왔다고 그러지 그러냐.”
“모욕적이로군요.”
엘리시아는 얼굴을 붉힐 정도로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그 이상의 액션을 취하진 못했다. 이텐이란 자의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사람의 전투력 차이는 상당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 덕에 다리품을 적게 팔기도 했고, 마침 내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도 하니 끼어들어보기로 했다.
“못 믿겠으면 시험해 봐.”
나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이텐을 도발했다.
여긴 에신이다. 대한민국에선 겸손이 미덕이었을지 몰라도 이곳에선 아니었다.
“뭣이? 지금 날더러 네 하찮은 목숨을 끊어달라고 애원하는 것이냐?”
이텐이 두 손에서 젓가락만큼이나 기다란 손톱을 끄집어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비웃어주었다.
“물지 못하는 놈이 짖는 법이지.”
“무릎 꿇고 빌어라, 지금이라도!”
“그만, 두 분 다 그만두세요! 대장군님께서 영내에서 결투를 금지하신 걸 모르십니까?”
“미안하지만 난 당신네 대장군의 부하가 아니야.”
“들었지, 엘리시아? 이 새끼는 마족이다. 네가 불러들였다!”
엘리시아가 말리려 들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싸움이 벌어지는 걸 감지하고 병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보는 눈이 많아진 이상 이젠 자존심 싸움이었다.
물론 나는 자존심 때문이 이러는 게 아니었다.
앞으로도 나는 프로젝트의 얼굴마담으로서 두 세력의 가교역할을 맡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이 참에 눈도장을 확실히 찍어둬야만 했다.
대한민국이 만만하지 않다는 걸, 교섭을 할 자격을 갖춘 국가라는 걸, 외교적 수사로 구구절절 떠드는 것보다 이렇듯 무력시위 한 번 해주는 게 훨씬 낫다고 장담했다.
이텐이란 자는 내 노림수에 안성맞춤인 제물이었다. 적당히 멍청했고, 멍청한 지능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강력한 전사였다.
“덤벼, 멍멍아.”
멍멍이가 뭔지는 모를 테지만, 뉘앙스만큼은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이텐은 주둥이를 쳐들며 하울링을 하더니, 두 다리로 힘껏 자리를 박찼다.
확실히 대단한 실력이었다.
그림자를 밟혔는데도 이 정도 속도로 움직이는 게 가능하다니.
뻐억.
나는 놈의 손톱을 간발의 차로 피하며 복부에 무릎을 꽂아 넣었다. 놈은 깨갱거리는 소리와 함께 붕 날아가 막사 틈바구니에 처박히고 말았다.
정기호가 옆에 있었더라면 잔소리를 했을 것 같다. 그림자를 밟고 시작하는 결투는 인정할 수 없다고.
암살자더러 뻔히 보이는 허점을 이용하지 말라니, 안 될 말이지.
“이럴 수가, 이텐님이 졌어...!”
“이텐님이 마족에게......”
병사들은 충격을 받은 듯 저마다 한 마디씩 남겼다. 원했던 그대로의 반응이었다.
“아직 안 졌다!”
이텐이 상체를 튕기며 몸을 일으켰다. 놈은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내게 삿대질을 날렸다.
“너! 이 비겁한 새끼! 결투에서 무슨 장난질이냐?”
“장난이라고?”
나는 눈을 치켜뜨며 반문했다.
“그래, 인마! 방금 나한테 술법을 썼잖아!”
멍청하기만 한 줄 알았으나 눈치는 빨랐다. 하긴 저 자리를 노름해서 따낸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순순히 인정해줄 생각이 없었다.
“꼭 실력이 없는 것들이 말은 많아요. 이러면 이래서 졌다, 저러면 저래서 졌다, 인정을 할 줄 모르니 발전도 없지.”
나는 늑대도 얼굴색이 변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이텐은 지금 머리뚜껑이 폭발해 날아가기 일보직전이었다.
이 점은 대단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놈을 주저앉힐 생각으로 인정사정없이 힘을 썼다. 내장이 파열되고도 남았을 만큼 강력한 니킥이었다. 그런데 놈은 흥분해서 길길이 날뛸 뿐, 전혀 데미지를 입은 것 같지 않았다.
“무기 뽑아, 새끼야. 사생결단을 내자!”
“그만하세요! 아무리 이텐님이라도 이건 선을 넘으셨습니다. 방볼팔님은 황군의 은인이십니다! 대장군께서 앞에 계셨더라도 지금처럼 행동하실 겁니까?”
엘리시아가 나와 이텐 사이를 몸으로 막았다. 그녀는 충실히 내가 바란 배역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입을 열 때마다 이름을 다르게 말하는 것만 빼고는.
“비켜라, 엘리시아. 너도 죽여 버리기 전에.”
“싫습니다.”
엘리시아는 고집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이텐보다 약할지는 몰라도, 의지력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듯했다.
그때, 진영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마지막까지 추적에 나섰던 부대가 귀환중이었다. 비익족 추격대와 괴수를 탄 정예부대, 그리고 대장군 울토르였다.
울토르.
그는 무성한 턱수염과 조각상 같은 외모를 가진 사내였다. 이 미터가 넘는 거구엔 근육이 알곡처럼 들어차있었다.
그의 상징인 양손검은 무기라기보다 떡메에 더 가까웠다. 오늘 크록들을 수도 없이 다진 편육으로 만들었을 쇳덩이였다.
나는 전사가 아니지만, 그에 대한 끌림이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는 칼밥 먹고 사는 자들의 우상이었다. 평범한 인간이었으나 무예를 통달해 에사인이 되었다는 배경도 매력적이었다.
병사들은 나와 이텐이 잘 보이도록 길을 터주었다. 울토르는 나를 한 차례, 이텐을 한 차례 쳐다보았다.
이텐이 억울하다는 투로 울토르에게 항변했다.
“이, 이건 무횹니다. 저 진거 아닙니다! 이 새끼가 비겁한 술수를 썼다고요!”
울토르는 이텐을 일별하고 나선 다시 내게 시선을 주었다.
에사인과 눈을 마주치는 건 특별한 경험이었다. 비유를 하자면 바위가 파도에 깎여나가듯 정신이 마모되는 느낌이었다.
이 사람은 결코 속일 수 없을 것만 같다는 중압감.
이 사람과는 결코 싸워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
그가 이루어낸 경지에 대한 존경심.
짧은 순간 복합적인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나는 무어라 할 말을 잃은 채 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우리가.......”
우리가?
“신세를 졌다.”
울토르가 등 뒤에 찬 양손검을 훌쩍 빼들었다. 그는 양손검을 거꾸로 쥔 채 검극을 땅에 꽂으며, 목례를 하듯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네 용기에 경의를 표하마.”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병사들은 울토르의 말과 행동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듯했다. 이텐의 얼굴이 특히 볼만했다.
그러나 놀라기로 따질 것 같으면 나도 그들 못지않았다. 불패무적의 에사인이, 황제의 일곱 권능이라 불리는 자가, 내게 먼저 고개를 숙이다니.
“황국은 언제나 뛰어난 전사를 예우한다. 바라는 게 있다면 뭐든 말하라. 아직 소속이 없다면 내 직속 전사단에 자리를 내어줄 수도 있다.”
울토르를 둘러싼 호위병들.
사슬갑옷과 털가죽, 양손검으로 무장한 이들이 바로 그 유명한 북풍의 전사단이었다.
강철의 자매단이 중장갑과 찬트로 유명하다면, 울토르가 이끄는 북풍의 전사단은 순수한 실력으로 명성이 드높았다. 전사단의 말석에 이름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하급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정도였다.
“방봉팔님은 한 세력을 대표하는 자격으로 마그나크록을 무찌르는 데 도움을 주셨습니다. 방봉팔님께서 몸담고 계신 곳은 우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길 바라고 있습니다.”
엘리시아가 부연을 해주었다. 그녀는 자기 직이 걸린 일이니만큼 안 되는 발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세력이라?”
“예.”
주변의 시선이 불편해졌다. 마족이니 혼돈이니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나는 일단 엘리시아의 실수부터 정정해주었다.
“저는 한 세력을 대표하는 자격에 있지 않습니다. 일개 전사에 지나지 않죠.”
이텐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게 눈에 띄었다. 겉과 속이 참 한결 같은 친구였다.
전사단 하나는 이끌고 있을 자가 일개 전사한테 졌으니 얼마나 면목이 없겠나.
“저는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신하입니다. 우리도 여러분이 마족이라고 부르는 자들처럼 포탈에서 넘어오긴 했습니다만, 우린 다르마알과 손잡는 걸 거부했습니다.”
“거짓말이다, 넌 누가 봐도 마족이잖아. 어이, 설마 저 헛소리를 그냥 믿는 건 아니겠지? 다들 저놈이 나한테 사기를 치는 걸 봤을 텐데!”
이텐이 앞장서서 나를 매도했다. 인기가 없으리만치 집요한 남자였다. 반면 울토르는 주변에서 무어라 떠들건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네 나라 사람들과 한번 대화를 나눠보고 싶군.”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우리는 지역이 안정화될 때까지 이곳에 계속 머무를 것이다. 자격을 갖춘 자들과 함께 다시 찾아와라. 어떻게 우호를 도모해보겠다는 건지 들어보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