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망명자 (4)
찰칵, 찰칵.
플래시가 연달아 터졌다. 차수진은 잘린 꼬리를 가능한 한 다양한 각도에서 촬영중이었다. 그녀는 셔터를 누르면서도 내게 요구를 잊지 않았다.
“배양조건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봐주세요, 육아는 어떻게 하는지도!”
나는 그녀의 요구를 적절히 순화해서 전달했다.
“우리가 도와줄만한 게 있나?”
“지금처럼 서늘하고 습기가 있는 곳에 놔두기만 하면 된다. 며칠 지나면 알아서 잘 걸어 다닐 것이다.”
“육아는? 혹시 젖이 필요하다거나...”
나는 말하면서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말끝을 흐렸다. 포유류도 아니고, 어미 배를 빌어 태어나는 것도 아닌데 젖 같은 게 필요할 리가 없었다.
“육아? 흐음.......교육 같은 것 말인가?”
“비슷해.”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지식을 전수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은 갖추고 자라나니까. 그러나 나는 내 창조물이 세상의 본질을 익히고 탐구하기를 바란다. 이런 건 너희 비늘 없는 자들이 도와줄 수 있겠군.”
나는 크록과 싸울 때를 떠올렸다. 크록 잡졸들은 죽어라던가 살려줘 등 기초적인 어휘밖에 구사하지 못했다. 반면 카룩카르나 카룩카이는 인간과 비교를 해도 꿇리지 않을 정도로 고차원적인 어휘력을 자랑했다. 교육을 받지 못하고 주어진 능력만으로 살아가면 그런 하급전사가 되고 마는 것 같다.
나는 차수진에게 들은 걸 잘 정리해서 전달했다. 예상대로 그녀는 대흥분 모드에 접어들었다. 그녀는 내 상의자락을 꽉 붙들며 핏기가 가신 입술로 더듬더듬 말했다.
“교, 교육이 필요 없다고요? 그건 정말 드문 사례인데요...! 전능 줄기세포일까요? 기억까지 복제가 가능한 건 제가 알기론 플라나리아 정도거든요!”
“너무 깊게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점잖게 그녀를 타일렀다. 무성생식정도로 흥분하는 그녀에게 오데르의 흙구덩이를 기어 올라온 내 이야기를 해준다면 뒷감당이 안 될 것 같았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이건 정말이지 엄청난, 학계를 뒤집어엎을 혁명적인 발견이에요! 재생의학의 신기원이 열릴 거라고요!”
“축하드립니다.”
그녀는 이제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나는 방방 뛰는 그녀를 내버려둔 채 막사를 빠져나왔다.
막사 밖은 온통 물난리였다. 떠내려가려는 철책을 붙들고 늘어지는 공병들이 보였다. 조립식 주택들도 불안불안하게만 보였다.
처음부터 지대가 높은 곳에 자리를 잡긴 했으나, 빗방울이 지면을 깎아내릴 기세로 들이치는 중이었다.
나는 숙소의 처마 밑에서 내게 손짓하는 정기호를 발견했다. 그는 아직 팔에 깁스를 풀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폭우를 뚫고 그를 향해 한달음에 달려갔다.
“간만이다, 박과장.”
그가 미소를 띠며 인사하자, 나도 웃음으로 응수했다.
“뭐냐, 그 깁스는. 약해 빠져가지고.”
“그땐 진짜로 죽는 줄 알았다.”
“아직 싸움 안 끝났으니 방심하지 말어.”
“그래서 말인데, 이 비를 어떻게 해야 할 거 같다. 이대로라면 우리 둘만 또 골병들게 생겼다니까.”
“그렇겠지?”
그의 말에 공감했다. 언제까지 저쪽 주술사의 의도대로 끌려 다닐 순 없는 노릇이었다.
“과장노릇 쉽지 않네.”
“그러니까 네게 맡긴 거야.”
정기호가 멀쩡한 손으로 허리춤의 검을 끌러서 넘겨주었다.
“안녕하십니까, 부팀장님. 황승연 중사라고 합니다!”
거뭇거뭇하게 얼굴을 태운 청년이 우렁차게 인사를 올렸다. 탄탄한 체구와 강인한 턱을 가진, 특전사 홍보물 표지모델을 보는 듯한 사내였다.
“편하게 말씀하시죠.”
“생명의 은인께 그럴 순 없습니다!”
낯간지러운 표현을 잘도 쓰네.
이 친구가 박문식 대령이 내어준 내 파트너였다. 특전사 안에서도 가려 뽑은 최고의 요원이라나.
실력이 뛰어난 것만큼은 확실했다. 에신의 밀림을 홀로 며칠이나 돌아다닐 정도면.
“정말 괜찮겠나?”
대령이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꼭 필요한 일입니다. 주술사를 살려둔 채 전투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대령도 그걸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는 다만 나를 걱정해주고 있을 따름이었다.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겠네.”
마침내 승낙이 떨어졌다. 나는 황승연 중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준비 다 됐습니까?”
“예!”
“그럼 갑시다.”
나는 황승연 중사와 함께 정문을 나섰다. 본격적으로 숲 안으로 접어들자 거짓말처럼 비가 멎었다.
나는 시험 삼아 걷는 속도를 조금 높여보았다. 중사가 어디까지 따라올 수 있을지 궁금했다. 꽤 빠르게 걷는데도 그는 내게 등딱지처럼 바짝 붙어 다녔다.
“이쪽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가이드까지 능숙하게 해내는 중이었다. 내 눈엔 거기가 거기인데도, 그는 나무 생김새나 바위 등을 구별하며 가야할 길을 막힘없이 짚어냈다.
우리는 숲 깊은 곳을 향해 약 두 시간 가량 나아갔다. 이상징후가 보인 건 빛이 거의 들지 않다시피 하는 고목림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멈추셔야 합니다.”
나는 이미 멈춰있었다. 길은 몰라도 감각은 내 쪽이 월등했다. 우리는 커다란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수신호를 나누었다.
쫙 펴진 손바닥은 크록 다섯 마리를 의미했다. 나는 그를 가리키며 둘, 나를 가리키면서는 손가락 셋을 들어보였다.
- 내가 셋, 당신이 둘을 맡아 처리합시다.
중사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K7를 조준하는 동안 나는 무성한 수풀 안으로 슬그머니 사라졌다.
약 오십 미터 전방에 크록 전사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특이하게도, 체구가 작았으나 잡졸같이 보이지 않았다. 단단한 나무판으로 가슴과 복부를 가린 채 양쪽 옆구리에 짧은 검을 두 자루씩 매달았다. 흡사 암살자 현역일 때의 나를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타타타탁.
소음기관단총이 연발로 발사되었다. 다섯 마리 중 가장 왼쪽에 있던 놈이 벌집이 되어 맥없이 고꾸라졌다. 나머지 네 놈은 총성이 들리자마자 사방으로 개미처럼 흩어졌다. 그중 내 쪽으로 도망쳐온 놈이 행운의 당첨자였다.
서걱.
검날이 빗장뼈로 들어가 흉곽을 매끈하게 갈라놓았다. 나는 놈의 동강난 상체가 바닥에 닿기도 전에 다음 목표에게 육박했다.
“꾸룩?”
크록이 다급히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갈피조차 잡지 못한 모습이었다.
푸우욱.
복부를 꿴 검날이 놈의 자그만 몸뚱이를 허공으로 반 보 가량 들어올렸다. 나는 놈의 배를 발로 차서 검을 빠르게 회수했다. 아직 타겟이 하나 더 남아있었다.
“비늘 없는 전사!”
마지막 크록이 원한을 담아 외쳤다. 놈은 이 작은 무리의 리더인 듯했다. 다른 크록들과는 움직임이 확연하게 달랐다. 최소한 속도만 따질 것 같으면 내게 그리 뒤처지지 않았다.
나는 놈의 찌르기를 몇 차례나 걷어냈다. 검광이 빛무리를 그릴 정도로 쾌속한 공격이었다. 평범한 인간은 무슨 일인지 인지조차 하지 못한 채 비명횡사하고 말 것이다.
나는 놈의 공격을 계속 쳐내며 반대쪽을 흘끔거렸다. 황승연 중사가 신경이 쓰였다. 분명 그쪽으로 한 마리가 샜을 텐데, 총기가 아직 발사되지 않았다.
“한눈팔지 마라!”
크록이 사납게 외쳤다. 놈은 동료애도 있었고, 도발이 통할 정도의 자의식도 가졌다. 아무래도 개체의 지능은 힘의 크기를 따라가는 듯했다.
“원한다면.”
놈의 검이 내게로 뻗어오다 우뚝 멈췄다. 그림자를 밟히고만 것이다. 장군 정도의 완력을 가지고 있지 않는 이상은 속박에서 벗어나는 게 불가능했다. 놈의 동공이 한껏 확장되며, 비뚤비뚤한 송곳니 사이로 탄식이 새어나왔다.
“너, 너는 주술사...!”
틀렸다.
몸통과 분리된 머리가 허공을 자유롭게 유영했다.
시간이 조금만 있었더라면, 대화를 나눠봤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썩어났더라면 회유를 해봤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틈이 없었다.
“중사님!”
나는 중사를 부르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조그만 공터에서 크록 한 마리와 중사가 대치중이었다. 크록은 본능적으로 총이 위험한 무기라는 걸 알아챈 듯했다. 사격각을 내주지 않으려고 지그재그로 회피기동을 하는데, 기가 막히게 그 사이로 총알이 지나갔다.
“죽어, 죽어라!”
크록의 날카로운 소검이 중사를 겨누었다. 소검 끝에는 싯누런 독이 묻어있었다. 중사는 총을 내던지고 특공무술 자세를 취했지만, 이미 방어를 하기엔 늦은 타이밍이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자리를 박찼다. 자세를 낮추는 단계도 건너뛰고, 마력도 모으는 둥 마는 둥 하고, 간격에 걸치자마자 냅다 기술을 구동했다.
쉬이이익.
새하얀 검신이 창처럼 늘어나 크록의 머리에 틀어박혔다. 두상이 산산이 박살나며 내용물을 화려하게 분출했다. 오물을 뒤집어쓰는 건 모두 중사의 몫이었다.
“.......”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사와 내 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래, 오데르의 창이 원래 이런 위력이었지.
에사인의 화신에, 크록의 장군에, 괴물 같은 것들만 상대하다보니 내가 약해진 줄로만 알았다.
“으허헉...!”
중사가 뒤늦게 신음소리를 냈다.
“이, 이게 다 뭡니까?”
“뇌수요.”
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줘야 트라우마 같은 거 안 생긴다.
중사는 전투복 소매로 더러워진 얼굴을 슥슥 닦아냈다. 그 바람에 애써 발라둔 위장크림이 한 움큼이나 지워지고 말았다.
“이놈들 보기보다 훨씬 빠르군요.”
중사야말로 보기보다 더 강골이었다. 겉은 터프한데, 막상 죽을 고비가 닥치면 무너지는 인간을 숱하게 봐왔다. 그러나 그는 크록의 뇌수를 뒤집어쓰고도 그다지 개의치 않아하는 듯했다. 나는 그가 절체절명의 기로에서 당황하지 않고 특공무술 자세를 잡았을 때부터 이미 감탄했었다.
“조심하셔야합니다. 크기가 작다고 해서 방심할 수 없는 놈들입니다.”
“그나저나 부팀장님은 어떻게 그렇게 움직이실 수 있으신 겁니까? 이 놈들도 대단하지만 부팀장님껜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군요.”
“노력의 결과죠.”
나는 기나긴 사연을 한 마디로 압축했다. 당신이 눈을 뜨고 일어나 잠자리에 들기까지 만났던 모든 사람을 합친 것보다 내가 하룻밤에 죽인 인간의 수가 많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그와 함께 시체들을 덤불 안에 숨겨 뒷마무리를 했다. 혈흔이나 육편이 튄 것까지 어쩔 수는 없었다. 야생동물이 먹어주길 바랄 수밖에.
“다 왔습니다.”
황승연 중사가 날 안내한 곳은 정글 한복판에 높게 솟은 바위언덕이었다. 워낙 공기가 맑은 곳이라 쌍안경의 힘을 빌린다면 수십 킬로미터 밖까지 관찰할 수 있는 명당이었다.
“처음에 교전했던 부족은 세력이 그렇게 크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지도자를 잃은 후 이쪽 길을 따라 도망쳤는데, 남은 숫자가 백 마리 미만이었습니다.”
나는 중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쌍안경을 들이대었다.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사람 두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나갈 수 있을만한 길이 나있었다.
“적의 본대로 추정되는 무리는 저쪽 방향입니다. 며칠 동안은 움직이지 않고 무리의 크기를 불리기만 하더군요.”
“.......”
나는 중사가 말해주는 방향으로 쌍안경을 돌리다가 할 말을 잃어버렸다. 흡사 바다 같았다. 수를 셀 수조차 없는 병장기들의 반사광이 지평선에 걸친 채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이거 대령님도 알고 계십니까.”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중사에게 물었다. 저 정도 되는 숫자가 덤벼든다면 진지가 날아가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청사가 뚫릴지도 몰랐다. 서울시내로 크록들이 쏟아지는 광경을 상상하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중사가 난감해하며 대답했다.
“예, 그래서 화력도 보강하고 지뢰도 매설중이었는데, 하필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알겠습니다. 아직은 늦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디지털 쌍안경의 배율을 최고로 높였다. 육안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거리가 멀었다.
나는 정밀히 적진을 훑어나가다가, 병장기의 바다 외곽지점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한 줄기 올라오는 걸 발견했다.
“저기로군요.”
“뭘 발견하셨습니까?”
“제 목표물입니다.”
내가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크록은 음식을 익혀먹지 않았다. 대낮에 연기를 피울만한 놈은 제사장이나 주술사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