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망명자 (1)
망명이라니, 우선 그런 표현을 크록이 쓸 수 있느냐는 차치하고, 내겐 망명 여부를 결정할 권한이 없었다. 아마 그는 강한 개체가 지도자가 된다는 상식에 의거해 내게 협상을 제안해온 것 같다.
“알았다. 최대한 노력해보지.”
나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카룩카르가 정말로 불멸의 존재라면 아군의 전멸은 불을 보듯 뻔했다. 이것이 절체절명의 상황과 나의 양심을 저울질해 꺼낼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거래는 이루어졌다.”
크록 전사가 엄숙하게 선언하며 창대로 바닥을 세 번 두들겼다. 약속이 맺어졌음을 선포하는 동작인 듯했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어째서 동족을 떠나려하는지, 어째서 처음 본 인간들에게 몸을 맡기려하는지, 마그나크록의 힘이 깃든 성물이라는 게 무엇인지. 그러나 내겐 더 이상 붙들 정신이 남아있지 않았다.
“부팀장님, 부팀장님! 정신 차리세요!”
“잠시 쉬고 있어라.”
의식을 잃기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창을 쥔 채 걸어가는 거대한 파충류의 등판이었다.
나는 찌뿌둥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간밤에 꿈자리가 굉장히 흉흉했는데, 구체적인 기억은 나지 않았다.
눈을 뜨니 가장 먼저 들어오는 건 군용텐트의 칙칙한 빛깔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깁스를 한 채 붕대에 칭칭 감겨있는 팔과 다리가 보였다.
어쩌다가 이 꼴이 됐더라?
나는 멍한 눈으로 천장만 가만히 쳐다보았다. 기억이 돌아오는 데엔 약 일 분 가량이 걸렸다. 빗속에서의 전투, 춤을 추던 그림자, 거대한 크록에게 맞아 날아가던 일까지. 팀원들, 카룩카르, 망명을 요청하던 이지적인 도마뱀도 순차적으로 떠올랐다.
우리가 이긴 건가?
자세한 경황은 모르겠으나, 후방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은 걸 보면 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박봉팔씨.”
갑자기 텐트 입구가 젖혀지며 간호사 복장을 입은 젊은 여성이 들어왔다. 간호사는 돌풍 작전에 포함되지 않았던 직군이었다.
“오늘은 상태가 어떠실까요?”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다가오다가,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어머......”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차트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부팀장님이 깨어나셨어요!”
무어라 대답하려했으나, 그녀가 한 발 빨랐다. 그녀는 집에 불이라도 난 사람처럼 황급히 달려 나갔다. 곧 바깥이 시끄러워지더니, 누군가가 텐트 안에 요란스럽게도 난입했다.
“부팀장님!”
차수진이었다. 머리카락이 잔뜩 헝클어지고 얼굴엔 온통 흙이 묻어 있었지만, 내가 아는 그 말괄량이 박사가 틀림없었다.
그녀가 와있다는 건 정부의 후발부대가 도착했다는 의미였다. 국가가 우릴 버렸다며 고래고래 떠들던 작자는 어찌 됐을지 궁금했다.
“........”
그녀는 들어오고 나서는 아무 말도 않은 채 눈만 연신 깜빡였다. 큼지막한 눈망울이 또 촉촉해지고 있었다.
“진짜 큰일 나는 줄 알았다고요...”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깁스를 네 군데나 하고 잘도 그런 말이 나와요? 미이라가 따로 없는데!”
“이 정도는 금방 낫습니다.”
에신의 생물들은 곧잘 다치고 곧잘 나았다. 천지사방에 충만한 마력이 생명의 생장을 적극적으로 돕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팀원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녀의 표정이 돌연 어두워졌다. 덩달아 내 가슴도 덜컥 내려앉았다.
“대원 한 분이 돌아가시고, 네 분이 크게 다치셨어요. 정팀장님도 중태이시구요.”
“그렇군요.”
사망자가 나온 건 안타까웠으나, 우려했던 것만큼 피해가 크진 않았다. 정기호가 죽을힘을 다해 막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물론 결정적인 활약은 뜬금없이 망명요청을 했던 크록 전사의 몫이었을 것이다. 그는 장군 카룩카르와 대등한,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실력자였다. 그런 엄청난 강자들이 툭툭 튀어나오는 걸 보면 과연 크록이 두려움의 대상이 될 만하다 싶었다.
“혹시 악어를 닮은 종족이 우리를 돕지 않았습니까?”
“네, 맞아요!”
이번엔 그녀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겉모습은 무섭지만, 속은 정말 젠틀한 분이세요. 안 그래도 그분 조직샘플을 분석하던 중이었는데, 놀라지 마세요. 재생세포의 숫자가 무려...”
“잠깐만요, 크록의 뭘 분석해요?”
“조직샘플요.”
“어떻게 그걸.......아니, 됐습니다.”
나는 그녀가 거대한 크록과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하며 조직을 채취하는 걸 머릿속으로 그려보았으나, 곧 상상력의 한계를 느끼고 말았다. 그런 발상은 그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진짜 안 들어보셔도 돼요? 현대의학이 완전히 뒤집어질 사건인데도요?”
“어차피 저 비전공잡니다.”
그녀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녀는 자신이 발견한 걸 자랑하고 싶어서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자네, 깨어났군.”
이어서 박문식 대령이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왼팔에 깁스를 한 것 말고는 큰 상처가 없어보였다.
“정신 차린 지 얼마 안됐습니다.”
“여기 차수진 박사는 자네 걱정을 무던히도 했지만, 나는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지. 자네라면 반드시 털고 일어날 거라고 믿었으니까.”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네......”
그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줄였다. 나는 그가 말을 잇기만을 가만히 기다렸다.
“자네가 쓰러지고 나서 난 죽기 살기로 싸웠어. 그러다가 부하 한 놈을 떠나보내게 됐는데, 내가 깨달은 게 있어. 내가 좀 더 잘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 말일세.”
“대령님은 충분히 잘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아.”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 자네를 보며 배운 거야.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과 남을 죽이기 위해 싸우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더군. 생각해보면 우린 기껏해야 움직이는 표적지 따위에나 총을 쏴봤지, 제대로 된 실전을 겪어본 적이 없어.”
나는 박문식 대령에게서 이전보다 강인한 의지력을 느꼈다. 그는 사선을 넘으며 한 단계 성장해낸 게 틀림없었다.
“아무튼, 무사한 걸 봤으니 나는 이만 가보겠네.”
“벌써 가시게요, 대령님?”
차수진이 대령을 붙들었다. 그는 군모를 깊게 눌러쓰며 무뚝뚝한 얼굴로 대답했다.
“잠깐 서울에 다녀오리다.”
“서울엔 어쩐 일로요?”
“부하놈 본가가 서울에 있소.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순 없으니 금방 돌아올 거요.”
그는 전사자 통지를 직접 전할 생각인 듯했다. 그것은 또 다른 종류의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대령이 나가자, 나는 차수진에게도 축객령을 내렸다.
“박사님도 그만 가보시죠.”
“왜요? 저는 더 있고 싶은데요?”
“가서 조직샘플인가 뭔가 연구하고 싶으시잖습니까.”
그녀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어떻게 그걸 알았느냐고 얼굴로 물어오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실소를 삼키며, 괜스레 피곤한 척을 했다.
“게다가 전 나으려면 좀 쉬어야할 겁니다.”
“에이, 어쩔 수 없네요, 그럼.”
그녀는 병상 이불을 내 목까지 덮어주고 텐트를 나갔다. 나는 혼자 남겨진 채 이런저런 상념에 잠겼다.
몸이 나으면 체력부터 빨리 되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 기량은 전생을 기준으로 칠 할이 채 되지 않았다. 훈련을 게을리 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었다.
무기와 방어구도 필요했다. 특히 방어구 문제가 시급했다. 한 방 맞고 날아가는 사태가 다시 벌어지지 않으려면 마력이 부여된 방어구를 반드시 구비해야만했다.
또 잠이 들었던 듯했다. 거의 눈만 감으면 곯아떨어지는 수준이었다. 이번에 깬 건 자력으로 일어난 게 아니라 불청객 때문이었다. 오밤중인 듯한데, 누군가가 텐트 안으로 들어와서 부스럭대고 있었다.
“누구냐?”
나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마력을 끌어올렸다.
“접니다, 김신우 박사.”
텐트에 조명이 들어왔다. 품이 넓은 의사 가운을 입은 젊은 남자가 눈앞에 서있었다. 첫 전투가 끝나자마자 도망가야 한다며 난리를 폈던 그 인간이 맞았다. 마음고생을 좀 한 모양인지 그 사이 뺨이 홀쭉해졌고, 안색도 영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할 말이 있습니다.”
“예, 듣고 있어요.”
그때 막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뭐 그런 흐름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내 예상을 보란 듯이 뛰어넘었다.
“환생자들이 그러기를 당신이 쓴 기술을 술법이라고 부른다던데, 맞습니까?”
“예.”
“제게도 가르쳐주시죠.”
“예?”
나는 당황해서 반문했다. 너무 당당하게 요구를 해서 채권자라도 찾아온 줄 알았다.
“당신 세계에선 술법을 가르치기 위해 총명한 아이를 어릴 때부터 뽑아 기른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평범한 사람은 익히지 못하는 고난도의 학문일 테지요. 그렇다면 저만한 적격이 없다고 자부합니다. 저는 공부를 시작한 이래로 지금껏 전국석차 수석을 단 한 차례조차 내주지 않은 사람입니다. 의과대를 졸업할 때는 우수성적자로서 졸업자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요?”
“제가 누구보다도 훌륭한 학생이 될 거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단지 저만 좋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당신처럼 뛰어난 술법 사용자가 또 있다면 프로젝트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
그는 굉장히 독특한 캐릭터였다. 일단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건 확실했다. 그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건 자기 자신이었고, 모든 판단의 기준은 공부를 얼마나 잘했는가의 여부였다.
장족의 발전이라면 지난번처럼 날 무시하진 않는다는 점이었다. 피칠갑을 하고 크록들을 썰어 넘긴 게 도움이 된 것 같았다.
“흐음.......”
나는 이 순진할 정도로 이기적인 의사를 어떻게 계도할지 고민을 해보았다. 말해두지만 내가 주술을 가르칠 순 없다. 그림자술법은 저주받은 땅의 오물들이 어둠을 받아들이며 저절로 체득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멀쩡한 정신을 가진 인간이 후천적으로 이걸 익힌 케이스는 존재치 않았다.
“미안합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즉시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째서입니까? 제가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기 때문입니까?”
“그게 아니라 자격이 안 되십니다.”
“제가요? 이 제가 말입니까?”
김신우 박사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말로 사람을 치는 게 가능했다면 지금 그의 표정을 살펴보면 될 것 같다.
“술법은 학문과는 다릅니다. 머리가 좋으면 유리한 건 사실이지만, 그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이렇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박사님께서는 저를 얼마나 믿으십니까?”
그가 멈칫거렸다. 내가 역으로 물어볼 줄은 몰랐다는 듯이.
“남들만큼은 믿습니다.”
“더 믿어보십시오. 제가 돌을 떡이라고 하면 떡처럼 먹을 수 있어야하고, 불을 차갑다고 하면 불 속으로 뛰어들 수 있어야합니다.”
“그건 믿음이 아니라 맹목입니다만.”
“말씀 잘하셨습니다.”
나는 미소로서 그를 칭찬해주었다.
“술법은 맹목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정도도 못하시면 가르쳐드릴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