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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7화 (17/205)

17화. 에신으로 (8)

정말 오랜만이었다. 온전한 힘으로 술법을 써보는 건. 이토록 짙은 피 냄새를 맡아보는 것도, 이토록 거리낌 없이 살육을 해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위험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무엇이든 저질러버려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피로 물든 대지를 밟으며, 적진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그림자가 짙어져만 갔다. 종국에는 육신이 사라지고 그림자만 남게 되었다.

크록 전사들은 마치 역병을 피하듯이 한사코 나와 거리를 두었다. 길게 찢어진 파충류의 눈에 선명한 공포가 깃들어있었다.

“쓸모없는 놈들!”

다른 크록보다 몇 배나 큰 개체가 벽력같은 고함을 지르더니, 걸리적거리는 잡졸들을 주먹으로 후려쳐 으스러뜨려버렸다.

크록은 몸집과 비늘의 색깔로 계급을 구분하는 게 틀림없었다. 기관총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진 잡졸들은 희끄무레한 빛깔에 인간보다도 덩치가 작았고, 눈앞의 괴물은 삼 미터는 될 것 같은 거대한 몸과 칠흑같은 비늘을 지녔다.

“당장 저 매끈한 놈의 모가지를 잘라오지 못하면 내게 먹힐 줄 알아라!”

크록의 발성은 구강구조가 다른 탓에 바람 새는 소리가 반이었다. 그러나 그가 나를 지목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죽여, 죽이자!”

크록들이 칼과 창을 앞세워 매섭게 돌격했다. 그들은 나와 자신들의 대장 중 누가 더 무서운지 판단을 마친 듯했다.

나는 가장 앞선 놈의 조잡한 찌르기를 피하며 검을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절단된 몸통이 선혈을 내뿜으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다른 놈들도 어설프긴 마찬가지였다. 내 검을 막기는커녕 검의 궤적을 눈으로 따라오는 놈조차 없었다. 나는 크록의 무리 사이를 질주하며 닥치는 대로 찌르고 베었다.

“못 죽여, 저놈은 못 죽인다!”

크록 한 놈이 겁을 집어먹고 대열을 이탈했다. 놈은 허겁지겁 달려다가다, 솥뚜껑 같은 손에 낚아 채여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크르르.......”

크록 전사가 놈들 대롱대롱 매단 채 가래 끓는 소리를 내었다. 잡졸은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며 자비를 구걸했다.

“살려, 살려줘!”

그 다음 벌어진 장면은 내 눈을 의심케 하는 것이었다. 놈은 송곳니가 촘촘한 아가리를 쩍 벌리더니, 자기 부하의 머리를 덥썩 물어뜯었다. 크록 잡졸은 비명조차 제대로 못 질러보고, 입질 몇 번에 상관의 뱃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먹는다는 말이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었을 줄이야.

저러면 나 같아도 목숨 걸고 싸우는 수밖에 없겠다. 나는 눈앞의 크록들에게 측은지심마저 들었다.

전생일 때 같았으면 아무런 감흥이 없었겠으나, 현생의 나는 예비역 병장으로서 까라면 깔 수밖에 없는 고충을 잘 알고 있다.

“뭣들 하냐, 싸워라!”

“왜 네가 나서지 않지?”

나는 크록 전사에게 따져 물었다.

“이쯤이면 네 부하들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 텐데 왜 뒤에서 명령질만 하냐, 비겁한 새끼야.”

“뭣이?”

크록 전사가 콧김을 거칠게 내뿜었다. 파충류의 표정을 읽는 재주는 없으나, 놈이 발하는 살기만큼은 또렷하게 전달되었다.

“아니, 진짜 궁금해서 그래. 왜 넌 숨어있기만 하냐고. 그 큰 덩치가 울겠네.”

“나는 위대한 마그나크록의 장군 카룩카르다, 비늘도 없는 하찮은 것아! 내가 너 같은 미물과 상대를 해줄 것 같으냐?”

“.......”

미물이라서 싸워줄 가치도 없다고?

무슨 개소리냐, 이게.

환장하는 건 잡졸들이 저 말에 환호를 보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자기 동료가 산 채로 잡아먹히는 걸 똑똑히 보고서도, 나한테 동료들 머리가 줄줄이 사탕처럼 날아가는 걸 보고서도, 카룩카르! 카룩카르! 이러면서 앙상한 팔다리를 열심히 흔드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면 크록의 영양상태가 개체별로 너무 차이가 컸다. 어떤 놈은 제3세계 난민마냥 서 있는 게 고작이었고, 어떤 놈은 힘이 남아돌아 중갑을 걸치고 있기까지 했다. 전체적으로는 마르고 병약한 개체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적으로 본보기를 보일 필요가 있겠군. 배신자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더해서.”

배신자?

의문은 잠깐이었다. 카룩카르가 언월도를 두 손으로 쥐며 직접 앞으로 나섰다. 놈이 얼마나 대단한 전사인가는 말이 필요가 없었다. 그저 마주섰을 뿐인데도 압박해오는 투기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두려워해라, 비늘 없는 놈아.”

“덤벼.”

“크라아아!”

카룩카르가 불도저처럼 달려와 언월도를 수직으로 휘둘렀다.

막으면 죽는다.

나는 술법을 일으키며 전력으로 회피기동을 했다. 언월도는 내 그림자의 일부를 대지 깊숙이 박아 넣었다. 압축된 공기가 날카로운 소닉붐을 일으켰고, 창날이 닿은 지표가 대포에 맞은 것처럼 터져나갔다.

그는 그렇게 큰 공격을 하고도 후속동작에 딜레이가 없었다. 제 이격, 삼격이 쉼 없이 날아왔다. 모든 동작이 내 가장 강한 공격보다 강했고, 가장 빠른 공격보다 쾌속했다.

나는 비로소 대부분의 크록이 말라비틀어진 이유를 깨달았다. 에신은 초인 한 명이 평범한 인간 천 명을 이기는 세계다. 그렇다면 영양과 자원을 강한 개체에게 몰아주는 게 종의 보전을 위해 합당했다.

“죽어!”

나는 언월도를 간발의 차이로 피하며 놈의 그림자를 힘껏 밟았다. 그러나 놈은 잠깐 주춤거렸을 뿐, 전혀 동작에 거리낌이 없었다. 놈은 어처구니없게도 내 최강의 봉인술을 완력으로 상쇄하는 중이었다.

이대로라면 가망이 없다.

어떻게든 더 큰 술법을 쓸 시간을 벌어야겠는데, 눈 한번 잘못 깜빡거려도 목이 날아갈 상황이었다.

나는 어느덧 참호와 가까운 지점까지 속절없이 밀려났다. 호흡이 흐트러질까봐 참호 안의 대원들에게 도망치라는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타앙.

단발의 총성이 난데없이 울려 퍼졌다. 특전사 저격수가 쏜 총알이 놈의 이마에 정통으로 적중했다.

“크르르......”

카룩카르가 드디어 공격을 멈췄다. 놈은 분노한 눈으로 사수를 노려보았다. 특전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을 치다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총알은 놈의 검고 매끈한 비늘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으나, 내가 그토록 바라던 시간은 충분히 벌어주었다.

퍼어억.

빛살 같은 찌르기가 카룩카르의 가슴팍을 꿰었다. 검날은 강철보다 단단한 비늘을 비집고 내부장기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잠깐이지만 나는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그 순간 끔찍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뭔가에 맞은 것 같은데, 정확히 뭔지 알 수는 없었다. 내가 새처럼 허공을 날고 있다는 것만 인지했을 뿐이었다. 곧이어 바닥을 구르는지 하늘과 땅이 몇 차례나 뒤바뀌었다.

“커헉!”

나는 구석진 텐트에 처박힌 채 고통스런 신음을 토해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폐에서 차오른 피가 기도를 틀어막고 있었다.

무릎이었나?

이 지경이 되고서도 내 의문은 그것이었다. 언월도를 휘둘렀다면 궤적을 못 봤을 리가 없다. 놈은 내가 놈의 심장, 높은 타점에 정신이 팔렸을 때 니킥을 먹인 게 틀림없었다.

단 한 방에 이 꼬라지가 나다니.

상대가 너무 나빴다. 놈이 자기소개를 장군이라고 하지 않았다면 마그나크록 본인으로 착각했을 정도였다.

“쿨럭, 쿨럭...!”

눈앞이 점점 가물가물해져왔다. 흐릿한 시선 속에서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넘어지듯 달려오는 게 보였다.

“부팀장님!”

내게 말린 육포를 건네줬던 의사였다.

“부팀장님, 정신 차리세요!”

그는 내 앞에 엎드리며 허겁지겁 구급상자를 뒤적였다. 거즈, 소독약, 가위 등등 별에 별 물건이 다 튀어나왔다. 그는 내 상처를 압박하며 지혈을 시도했다. 나는 고개를 움직여 상처를 쳐다볼 힘조차 없었다.

“어떻게 되어갑니까.”

전황이 궁금했다. 본진방어를 맡았던 정기호가 버틸 수 있는지, 특전사들은 잘 싸우고 있는지, 먹먹한 귀로 기관총이 발사되는 소리만 어렴풋이 들릴 따름이었다.

“말씀 아끼세요! 기운을 아끼셔야합니다!”

그는 나를 압박하다 말고 뒤를 돌아 큰 목소리로 외쳤다.

“여기 지원 부탁드립니다! 부팀장님이 크게 다쳤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사람의 것임에 분명한 비명소리도 들렸다. 전황엔 손톱만큼의 여유도 없음에 분명했다.

그때, 텐트 뒤편이 부스럭거리며 크록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카룩카르가 뒤를 쫓아온 줄로만 알았다. 놈은 그만큼 덩치가 컸고, 윤기가 흐르는 새카만 비늘을 지녔다. 그러나 카룩카르와는 입은 갑옷이 달랐다. 이쪽은 들고 있는 무기도 언월도가 아니라 창이었다.

“사, 사, 살려주세요....!”

의사는 얼마나 놀랐는지 뒤로 자빠져 경기를 일으키고 말았다. 나는 한사코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팔다리가 도저히 말을 듣지 않았다.

“.......”

놈은 덤벼드는 대신 우리를 가만히 지켜볼 따름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놈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이런 말 하면 미쳤다는 소릴 듣겠지만, 놈의 샛노란 눈동자에서 이지적인 빛이 느껴지는 듯했다.

“비늘 없는 자여, 나와 협상을 하자.”

구강구조 탓에 발음이 새는 것 말고는 깜짝 놀랄 정도로 차분한 말투였다.

“협상?”

나는 인상을 쓰며 반문했다. 정기호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명예를 아는, 대화가 통화는 크록이 있을 거라던.

“네가 싸우는 모습을 잘 보았다. 비늘 없는 자 치고는 무척 인상적이더군. 그러나 네가 지닌 무기로는 카룩카르를 죽이는 게 불가능하다. 오직 마그나크록의 힘이 깃든 성물로만 그를 죽일 수 있다.”

“부, 부, 부팀장님...!”

의사가 사시나무 떨 듯이 몸을 떨며 나를 불렀다. 나는 그가 에신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남은 힘을 쥐어짜내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보였다.

“원한다면 그를 물리쳐주마. 대신 너희는 내 요구를 한 가지 들어주어야 한다.”

“뭘 원하는......쿨럭, 쿨럭!”

나는 말을 하다말고 피가 섞인 기침을 연거푸 했다. 의사가 깜짝 놀라 나를 다시 지혈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크록이고 자시고 다 치우고 눈앞의 환자부터 살려보기로 작심한 듯했다.

“뭘 원하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설령 노예가 되어달라고 하더라도 진지하게 고려를 해봐야 할 판국이었다. 그러나 그가 꺼낸 말은 내 예상을 한참 벗어나있었다.

“나는 너희 비늘 없는 자의 나라에 정식으로 망명을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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