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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6화 (16/205)

16화. 에신으로 (7)

어디서부터 지적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일단 혼자 에신의 야생에서 한 달이나 버틸 수 있다고 자신하는 근거가 뭔지 모르겠다.

콘크리트 따위로 포탈을 막는다는 소리도 그렇다. 그런 게 가능했으면 소미가 그 고민을 하지도 않았겠지.

“그냥 보내버리는 게 어때?”

정기호가 무서운 말을 했다.

“곧 더 큰 싸움이 벌어질 텐데, 우리끼리 이럴 시간 없잖냐.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는 걸로 하지.”

“넌 네가 경호팀장이라는 자각이 있는 거냐.”

나는 그에게 핀잔을 주었지만, 속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럽시다. 총 한 자루와 식량, 의약품 정도만 챙겨주시면 됩니다. 다들 그렇게 죽는 게 소원이라면 저 혼자서라도 떠나는 수밖에요.”

그는 팔을 크게 벌리며 보란 듯이 소리쳤다.

“아니면 저랑 같이 갈 분이 계십니까? 눈치 보지 마시고 손드세요, 당신들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숙련된 의료기술자와 여행을 함께한다는 게 쉽게 찾아오는 기회가 아니에요.”

“........”

온 사방이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철모에 떨어지는 빗방울만이 이 희극에 신명나게 반주를 넣고 있었다.

“그만, 정팀장 말대로 우린 이럴 시간이 없어. 박사는 잠시 쉬고 있으시오. 스트레스가 심한 것 같으니.”

대령이 장교들에게 눈짓했다. 장교들은 박사를 강제로 텐트 안으로 데려갔다. 박사는 신체적으로 반항을 하진 않았다. 심지어 고분고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방정맞은 입은 잠시도 쉬질 않았다.

“내가 죽는다면 그건 당신들의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머리 위에 달린 건 장식이 아니에요!”

“저 분은 어쩌다가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된 겁니까?”

나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보안이 요구되는 일이니만큼, 외교부가 사전에 빡세게 인사검증을 한 걸로 아는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젊은 작전장교가 어깨를 으쓱였다.

“의사분을 구하는 게 굉장히 어려웠다는 말을 얼핏 듣긴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참가명단에 가장 마지막으로 리스트 업이 된 게 의료진이었다. 아무래도 먹고 살만한 직종이다 보니, 멀쩡하게 자기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는 사람을 구하긴 어려웠던 것 같다.

“자, 다들 정신 바짝 차려! 눈 크게 뜨고 사주경계를 철저히 한다, 알겠나?”

박문식 대령이 엄격한 목소리로 혼란스러워진 분위기를 수습했다. 그는 악어를 쓰러뜨린 후로 완전히 자신감을 되찾은 듯했다.

“부팀장님.”

한 젊은 의료진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의 손에는 파우치로 밀봉된 보존식량이 들려있었다.

“영양을 충분히 공급해두셔야죠.”

“감사합니다.”

그는 내가 먹을 걸 받자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났다. 진입조엔 취사담당이 따로 있지 않았다. 식사를 챙기는 건 각자의 몫이었다. 그는 전투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포지션에 부담을 느끼는 듯했다. 아니면 동료의 폭주에 대한 나름대로의 속죄인 것인지.

나는 딱딱하게 말린 육포를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왜 아직까지 지원이 오지 않을까?

김신우박사의 말 중에서 유일하게 거슬리는 지점이었다. 정부가 포탈 프로젝트를 포기했을 것 같진 않았다. 애초에 정부는 에신이란 세계의 위험도를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랬을 것 같으면 달랑 총만 쥐어 보낼 게 아니라, 기갑부대라도 우겨넣었겠지.

“결재 때문이다.”

정기호가 불쑥 다가와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했다. 그는 종종 이런 식으로 내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굴었다.

“결재? 무슨 결재?”

“공무원들 결재. 지금쯤 인증서 설치하라고 난리겠지.”

“인증서가 여기서 왜 나오냐.”

나는 그의 실없는 농담에 피식 웃었다.

정기호는 내게 바싹 몸을 붙이더니, 답지 않게 주변을 한 차례 살폈다. 그리고는 나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야, 박봉팔.”

“왜?”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우리가 잘 안 될 수도 있다.”

“너까지 이러기냐?”

“일단 들어봐라.”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나는 일단 들어는 보기로 했다. 그는 뼛속까지 전사로서 단련된 남자였다. 약한 소리를 하느니 그 자리에서 죽는 걸 택할 놈이라, 김신우 박사와 같은 주장을 하진 않으리란 믿음은 있었다.

“아까 크록 기수 한 놈이 우리 앞까지 왔었잖냐.”

“그렇지.”

“그놈이 원하는 건 결투였다.”

“뭐?”

어이가 없었다. 결투에 환장하는 놈이라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조차 본인 취향에 끼워 맞출 줄이야.

“너도 봤을 텐데, 그놈이 총알을 보고 막는 걸.”

“...보긴 했지.”

특전사의 사격실력은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와중에도 정교하기 짝이 없었다. 대원들은 크록 기수의 몸통에 초탄부터 적중시켰다.

놈이 소총탄의 십자포화를 뚫고 살아나간 건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대부분 갑옷으로 튕겨냈기 때문이었다.

“그놈은 제대로 무술을 배운 놈이었다. 아무리 크록이 강한 종족이라고 해도, 그 정도 수준의 전사가 정찰이나 하고 다닐 만큼 할 일이 없진 않다고 본다.”

“일리는 있네. 어디까지나 뛰어난 전사라는 것까지만.”

“일단 가능성만이라도 열어봐라. 전승에서도 크록이 명예를 모른다고는 하지 않았잖아.”

“오케이, 가능성은 열어놨다.”

“그럼 생각해봐라, 세상에 조건 없는 결투란 존재치 않는다. 특히 목숨이 걸린 결투는 그 값에 걸맞은 조건이 반드시 걸려있기 마련이다. 요컨대 그놈은 뭔지는 몰라도, 혼자 우리 앞으로 나설 정도로 간절하게 바라는 게 있었다는 거다.”

“크록이 대화가 가능한 상대라고?”

“가능성을 열어둔다면.”

“그럼 날더러 죽으라고 한 주술사는 뭔데?”

“나야 모르지.”

“.......”

나와 그의 눈이 어색하게 마주쳤다. 무척 흥미로운 주장이었으나, 잡담은 거기까지였다. 쌍안경으로 전방을 주시중이던 대원이 다급히 보고했다.

“전방에 적 다수 발견!”

“적습입니다!”

쿵쿵쿵...

전장의 북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흡사 정글 전체가 요동치는 것만 같았다. 무질서한 발자국 소리가 하나의 울림이 되어 메아리쳤다. 놈들은 압도적인 숫자로 우리를 뭉개버릴 작정인 듯했다.

대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은 채 매의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누구도 패닉하지도, 주눅이 들지도 않았다. 싸움은 기세가 전부라는 게 지금도 증명이 되는 중이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도망치면 살 수 있습니다!”

.......한 놈만 빼놓고는.

안개 속에서 어슴푸레하게 적의 실루엣이 보였다. K3 기관총이 즉시 불벼락을 토해냈다. 대령은 이번엔 내 동의를 구하지도 않았다. 이미 그에겐 그런 것 따위가 필요 없어졌다.

“한 놈도 남기지 마라!”

거대한 크록들이 짚단처럼 스러져갔다. 정기호의 말대로 저들 중에 무술의 달인은 없는 듯했다. 그들이 인간보다 훨씬 강한 근골을 가진 것만큼은 틀림없었으나, 분대지원화기의 무시무시한 화력 앞에서는 다 똑같은 고깃덩이일 뿐이었다.

상황이 바뀐 건 중장갑을 걸친 크록들이 전면에 나서면서부터였다. 그들은 다른 크록들과 종자가 다른 듯했다. 덩치도 훨씬 컸고, 비늘의 색도 좀 더 어두웠다. 그들은 두껍고 큰 방패로 총알을 여유 있게 받아내며 전진했다.

“부팀장!”

대령이 큰 소리로 날 찾았다.

“자네 차례일세!”

어느덧 총성이 멎어있었다. 대원들은 내 얼굴만을 오매불망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뭔가를 해줄 거라 간절히 염원하였으나, 그것이 어떤 형태인지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히히히히, 다 끝났어. 다 끝났다고.”

김신우 박사가 미친 듯이 낄낄거렸다.

“멍청한 새끼들,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굼뜬 놈이 먼저 죽는다고! 내 말을 따랐으면 몇 명은 살 수 있었을 텐데! 너희는 항상 이런 식이었지. 말을 들어 처먹지를 않았어!”

나는 박사의 히스테릭을 반주 삼으며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크록 전사들이 명예를 아는지는 몰라도, 강한 적을 알아보는 분별력은 있는 듯했다. 그들은 내게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으르렁대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 두 손으로 축축한 땅을 짚었다.

그림자병사 소환술.

스으으.......

전장에 자그만 변화가 일어났다. 그림자가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했으나, 누구도 자기 발밑을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았다. 그림자는 결코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거라 믿기 때문에.

오데르를 상대할 때 흔히 저지르는 패착이었다.

“꾸륵.......”

크록 중갑병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뀌에에엑...!”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중갑병 한 놈이 들고 있던 대검으로 다른 놈의 등판을 찌른 참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눈 뜨고 보지 못할 혈투가 벌어졌다. 그들은 들고 있는 무기로 서로의 몸을 아낌없이 토막 내며, 조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어떤 발악으로도 자기 그림자를 떼어낼 수는 없었다.

수십 명의 병사들이 전멸하는 데에는 일 분이면 충분했다. 북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사람들을 귀찮게 하던 누군가의 히스테릭도 멎었다. 양 진영이 한마음이 된 것처럼 충격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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