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에신으로 (6)
“봤냐?”
정기호가 물었다. 그는 내가 술법을 쓰는 걸 인지하고 호위를 자처했던 듯했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왼손을 눈앞으로 들어올렸다.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크록의 주술사와 내 의식이 부딪힌 건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에 놈은 내게 끝을 알 수 없는, 원시적인 충동으로 가득 찬 악의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오데르의 그림자와 일정부분 맞닿아있기도 했다.
“야, 박봉팔.”
정기호가 재차 부르자,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뭘 봤기에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냐?”
“.......주술사.”
“뭐? 설마 마그나크록의?”
“그래.”
“환장하겠네.”
정기호가 나직하게 욕설을 뇌까렸다.
- 황제의 군대가 남김없이 잡아먹혔다.
이 간단한 문장 안에는 여러 가지 사실이 내포되어 있었다. 황군은 흔히 정규군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부패하고 무능한 밥벌레들이 아니었다. 유능한 마법사와 주술사가 다수 포진된 대륙 최고의 엘리트 무력집단이었다. 심지어 황군을 이끄는 대장군 울토르는 스스로 에사인임을 선언한 초인이다.
남방전선의 실패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을 가능케 한 게 바로 크록이 섬기는 에사인, 마그나크록이었다.
“이걸로 저기 잘 보고 있어라.”
나는 정기호에게 쌍안경을 건네준 뒤 대령에게로 향했다.
“대령님, 기관총 배치를 바꾸셔야합니다.”
“어디로?”
“저쪽입니다.”
나는 크록의 주술사와 접촉했던 방향을 가리켰다. 우리가 보유한 기관총은 3정이었다. 대포를 쓰긴 어려운 상황이니 믿을 건 유탄과 기관총뿐이었다.
대령의 명령을 따라 기관총사수가 황급히 자리를 이동했다. 부사관들은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대원들을 독려했다.
쿠르릉.......
별안간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번쩍였다. 곧이어 나지막한 천둥소리가 뒤따랐다. 경계중이던 방향 하늘에서부터 새카만 먹구름이 부자연스러우리만치 빠르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방수포를 가져와라!”
대령이 목에 핏줄을 돋우며 소리쳤다.
“뭐든 덮어서 총기를 보호해! 방수포가 없으면 옷이라도 널어라!”
벗어던졌던 활동복이 재활용되었다. 가림막을 설치할 시간이 없어 텐트를 갖다 쓰는 촌극마저 벌어졌다.
크록의 주술사는 잔인하기만 한 게 아니라, 교활하고 노련한 사냥꾼임에 틀림없었다. 놈은 비를 맞으면 사냥감의 체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모든 상황이 불길할 정도로 이야기와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전승 속에서도 황군의 발목을 잡았던 건 난데없는 폭우였다.
“부팀장, 저런 구름이 자네 세계에선 일반적인가?”
“예, 종종 있는 일입니다.”
나는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 대령은 이미 충분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무리 군인정신으로 단련되었다한들, 총밖에 쥔 것이 없는 인간더러 비바람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괴물과 맞서라는 건 가혹한 주문이었다.
후둑후둑.
드디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풀잎이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세찬 빗줄기였다. 흰 포말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껴서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시야가 더욱 좁아졌다.
비는 속절없이 내리는데, 크록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참호 바닥엔 점점 물이 차올랐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하나?”
대령이 내게 물었다.
“병사들의 체력은 무한하지 않아. 당장 적이 올 게 아니라면 경계근무를 서며 번갈아 쉬도록 해야 하네.”
“조금만 더 기다려보죠.”
나는 전방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크록의 주술사가 보낸 메시지는 명료했다. 내일도 모레도 아닌, 지금 우리를 찢어놓겠다는 의미였다.
기다리던 신호는 잠시 뒤 나왔다.
“대령님!”
특전사 한 명이 흡사 비명을 지르듯 대령을 불렀다.
“뭔가가 다가옵니다!”
뭔가가 다가온다, 그는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운무가 자욱하게 깔린 정글 깊숙한 곳에서 나무 부러지는 소리, 땅이 쿵쿵 울리는 소리, 소름끼치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명령 없이는 절대 사격하지 마라!”
장교들이 병사들을 단속했다. 그 사이에도 소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나무가 잇달아 쓰러지는 게 이젠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우지끈.
한 아름도 넘는 고목이 수수깡 부러지듯 넘어갔다. 동시에 엄청난 크기의 악어가 지축을 울리며 등장했다.
“말도 안 돼.......”
참호 여기저기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악어가 본체가 아니었다. 저 어마어마한 악어의 등에 안장을 씌우고 올라탄 생물이 있었다.
이족보행을 하는 악어.
전승은 거짓을 말하진 않았다. 그 악어가 다른 악어를 타고 다닌다는 사실을 빠뜨렸을 뿐.
크르르.......
크록 기수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고삐를 힘껏 당겨 악어를 멈춰 세웠다. 악어 대가리가 대각으로 치솟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완력이었다. 놈은 그렇게 멈춰 서서는, 기다란 창을 꼬나 쥔 채 이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쏴야하겠나?”
대령은 갈등하고 있었다. 비가 이렇게 퍼붓는 중인데도 나는 그가 식은땀을 흘리는 걸 알아챘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감에 찬 미소를 보여주었다. 싸움은 기세가 전부다. 초장부터 지고 들어가서는 아무것도 될 리가 없었다.
“미개한 짐승에게 현대문명의 위력을 맛보여주도록 하죠.”
“......알겠네.”
그가 결심을 내린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전 대원, 사격준비!”
“사격준비!”
곳곳에서 우렁찬 복창이 울려 퍼졌다. 크록 기수는 우리가 뭘 하려는지 짐작도 못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단결된 기세가 놈을 움츠러들게 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놈은 고삐를 틀어 악어 머리를 다급히 뒤쪽으로 돌렸다.
“사격!”
피 끓는 외침이 폭우를 꿰뚫자, 참호 여기저기에서 샛노란 불꽃이 맹렬하게 치솟았다.
두두두두.
총탄의 궤적을 따라 빗방울이 허공에 호선을 그렸다. 대상이 인간이었다면 몸이 남아날 리가 없는 집중사격이었다.
나는 실제로 크록 기수의 갑옷이 움푹 파이는 걸 볼 수 있었다. 격발음 사이사이 둔탁한 탄착음이 분명히 섞여있었다. 악어가 배를 뒤집으며 발광하는 바람에 저만치 나가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놈은 죽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는가 싶더니, 덩치에 맞지 않는 기민한 동작으로 모습을 감췄다. 반면 악어는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거의 모든 총탄을 몸으로 받아낸 악어는 빗물 젖은 대지에 스러져 피를 웅덩이째 토해냈다.
“사격중지!”
“사격중지!”
사격을 멈춘 병사들로부터 착착 보고가 올라왔다. 부상자는 발생하지 않았고, 기관총 한 정이 초장부터 탄이 걸리는 바람에 사격을 제대로 못한 게 특이사항의 전부였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음 전투에 대비해라.”
대령은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고 있었다. 대원들도 용기백배하는 중이었다. 악마 같은 괴물도 힘을 합치면 충분히 물리칠 수 있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한 셈이었다.
“어떤가? 자네 생각은.”
“유탄이라면 확실하게 끝장낼 수 있겠습니다.”
“내 생각도 같네.”
“하지만 머릿수가 많이 모자랍니다. 곧 들이닥칠 본대를 상대하려면 더 강한 화력이 필요합니다.”
“차수진 박사가 지금쯤 지원을 요청했을 겁니다.”
작전장교가 옆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 그때,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지금까지는 존재하는지조차 몰랐을 정도로 조용했던 사람이었다.
“지원은 안 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김신우 박사.”
“차수진씨가 떠난 지 몇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모르시겠습니까? 정부가 우릴 버린 거라고요. 아쉬울 땐 조국의 미래였지만, 일이 좀 꼬인다 싶으니 개 버리듯 유기한 겁니다!”
절망에 찬 외침이 참호 구석구석에 스며들었다. 그는 공포에 사로잡혀있었다. 그는 악어가 죽은 것보다 그런 괴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더 충격을 받은 듯했다.
“좋은 말로 할 때 입 닥치시오.”
대령이 사나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박사는 어디까지나 연구원이오, 본분을 잊지 마시오. 전투는 우리 같은 전문가들이 알아서 잘 할 테니.”
“제가 못할 말 했습니까? 그만 현실을 직시하자는 겁니다. 돌아갈 길은 보나마나 콘크리트로 막혔을 테고, 가진 탄약은 한줌뿐입니다. 잘하면 악어 몇 마리는 더 잡을 수 있겠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어차피 가망이 없는데.”
“고작 첫 전투가 끝났을 뿐이오. 우리는 이런 극한상황에 숙달되어 있소.”
“숙달이요? 아까 보니 저만 겁을 먹은 게 아니던데, 그 친구들은 대령님이 모르는 사람들입니까?”
“박사, 내가 경고했을 텐데...”
“그쯤 해두시죠.”
내가 끼어들었다. 말리지 않으면 대령이 한 대 칠 것 같아서.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건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대안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시죠. 그게 아니면 자리로 돌아가 주시고요.”
“당연히 있습니다. 아무래도 여기서 머리를 쓸 줄 아는 사람은 저뿐인 것 같으니.”
김신우란 남자는 공포에 사로잡힌 순간조차 남을 비하하는 걸 멈출 수가 없는 듯했다.
“어디 들어보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혹시 모르지, 이 똑똑한 양반이 정말로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천재적인 의견을 낼지.
“우리가 가진 물자가 일주일 남짓입니다. 이걸 머릿수대로 나눠서 각자 다른 방향으로 도망칩니다. 아껴 쓰면 보름도 버틸 수 있습니다. 풀뿌리를 캐먹으며 버티면 한 달도 살아남을 수 있겠죠. 그러다보면 운이 좋아서 환생자 여러분이 말씀하신 문명화된 사회에 도달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운이 좋지 않아서 죽는 분들도 나오겠지만, 확정적으로 모두가 전멸하는 결말보다는 낫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