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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3화 (13/205)

13화. 에신으로 (4)

마침내 돌풍 작전의 개시일이 되었다. 길고 긴 조정 끝에 확정된 진입조는 특전사 26명, 의료진 5명, 경호팀 2명, 과학자 3명, 외교관 3명, 총원 39명이었다.

이중에서 가장 신이 난 건 과학자 그룹의 리더인 차수진 박사였다. 나는 그녀가 저렇게 방방 뛰다가 어디론가 날아가지 않을까 의심중이었다.

나는 그녀의 단꿈을 깨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않고 있었으나, 에신이 그녀가 상상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활동복 착용 도와드릴게요.”

과기부 직원들이 달려들어 마대자루 같은 옷을 덮어씌우기 시작했다. 활동복이란 인간이 생존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버틸 수 있도록 제작된, 흔히 우주복이란 불리는 물건이었다.

산소호흡기, 체온 유지기, 생체신호 감지기가 차례차례 부착되고, 벨트로 옷의 이음새를 단단히 조인 후 거대한 헬멧이 씌워졌다.

아직도 굳이 이런 옷을 입어야하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과기부의 입장은 단호했다. 전생에서 당신들이 살았던 환경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환경인지 정확한 데이터가 없다는 것이다.

온도, 중력, 대기성분 등, 지구 환경에서 아주 사소한 것만 달라져도 인간은 쉽게 죽어버릴 거라며.

드디어 궤도차량에 물건이 모두 적재되었다. 약 일주일 간 생존할 수 있는 물자와 탄약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국무총리와 외교부장관이 나서서 진입조 한 명 한 명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기 시작했다.

“반드시 성과를 내고 돌아오게. 자네에게 조국의 미래가 달려있어.”

외교부장관 박병철이 내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조국의 미래는 몰라도 내 미래가 달린 것만큼은 확실했다.

나는 그와 악수를 나눈 뒤 포탈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포탈은 저편 세계를 어렴풋이 비친 채 맹렬히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한 걸음.

그저 한 걸음 내딛었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날 둘러싼 모든 풍경이 달라졌다. 첨단 기계와 수많은 인력들이 바글바글대던 청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울창하고 축축한 밀림이 나타났다.

나는 헬멧에 뿌연 김이 서리도록 숨을 크게 내쉬었다. 가슴이 마구 벅차오르는데,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었다. 지난 삶에선 그저 흙이고 나무였을 것들이 거대한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먼저 진입했던 정기호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눈빛만으로 이미 백 마디 말을 하고 있었다. 지금 내 표정이 그와 똑같다는 데 나는 전 재산을 걸 수도 있었다.

- 돌아왔다.

내장스피커를 통해 짤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몇 걸음 더 걸어보았다.

다행히도 최소한 중력만큼은 지구와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과학자들에게 중력이 다를 경우, 특히 지구보다 무거울 경우엔 큰 문제가 될 거라고 들었었다.

- 여기가 어딘지 알겠냐?

- 글쎄.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진입점 주변을 훑어보았다. 에신은 지구만큼이나 광대한 세계다. 숲 한가운데에 떨어뜨려놓고 어딘지 맞춰보라는 건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으란 말과 같았다.

- 일단 남반구인거 같긴 한데........

나무와 덩굴식물들이 앞이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빼곡하게 들어차있었다. 흡사 아마존의 정글을 연상시키는 광경이었다. 모든 생물이 지구에 있던 것들보다 몇 배나 크다는 것만 빼고는.

나도 그렇고 정기호도 그렇고, 이런 밀림지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비행기도 자동차도 존재치 않는데다가 도처에 무시무시한 괴물이 도사리고 있으니 애초에 탐험이라는 걸 할 수 없는 세계였다.

- 그리고?

- 지성체의 흔적도 없어 보이고.

에신에는 고등한 지능을 가지고 공동체생활을 하는 수백수천의 종족이 존재했지만, 최소한 시야가 닿는 곳 내에서는 문명의 흔적을 찾아낼 수 없었다.

잠시 후, 박문식 대령이 포탈 너머로 건너왔다. 그는 충격을 받은 듯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더니, 이내 입술을 꽉 깨물며 무서운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 아무 이상 없나?

- 모릅니다, 아직은.

- 자네들은 측면을 살펴보게나. 나는 전방을 감시하지.

그는 소총탄이 가득 든 탄통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K7을 장전했다. 세상이 뒤바뀌었는데도 그는 꿋꿋이 임무를 떠올려냈다. 과연 뼛속까지 군인다운 양반이었다.

박문식 대령을 뒤따라 특전사 대원들이 속속 차원을 넘었다. 대원 한 명이 외부채널로 주기도문을 읊기 시작하자 불호령이 떨어진 것 말고는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특전사가 모두 넘어온 다음엔 의료진이 진입했다. 이어서 과학자의 차례가 되었을 때였다. 난데없이 과학자 한 명이 손에 든 물건들을 떨어뜨리며 바닥에 엎드렸다.

- 차수진 박사님, 심호흡하세요.

의사가 경고하며 차수진을 부축했다. 그녀는 엎드린 채 가까스로 숨을 내쉬고 있었다.

-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 맥박이 너무 빠릅니다, 정확한 이유는 검진을 해봐야겠지만...

- 괜찮아요, 별 일 아니에요.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지금 제가 너무 행복해서 그래요.

- .......그러시군요.

잠깐 걱정했던 게 바보였다. 차수진은 곧 제 발로 일어나 멀쩡히 걸어 다녔다. 몇 걸음 걸은 뒤엔 펄쩍 뛰기까지 했다.

- 믿을 수가 없어요! 이게 진짜 현실인가요?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게 머릿속 망상이 아니라고 누가 확실히 말해주시겠어요?

- 망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계속 마이크에다 대고 소리 지르시면 채널을 나가겠습니다.

- 앗, 죄송해요. 하지만 이건 정말.......정말이지.......

그녀는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되자 대신 거친 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특전사들은 사전에 의논했던 대로 진입점을 확보한 뒤, 탄약과 물자를 보관하기 위해 일체형 텐트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과학자들은 몇 가지 기계를 꺼내 이런저런 테스트를 실시했다.

- 대기의 질이 지구와 매우 흡사합니다.”

도시락 박스와 흡사하게 생긴 네모난 기계를 만지작거리던 과학자가 말했다.

- 게다가 산소농도가 매우 높습니다. 이건 굉장히 흥미롭군요.

- 산소농도가 높다는 게 무슨 의미요?

박문식 대령이 모두를 대변하여 질문을 던졌다. 대답은 측정한 과학자가 아닌, 차수진에게서 나왔다.

- 몸집이 큰 생물을 기대해볼 수 있을 거란 의미죠! 산소농도와 생물의 몸집은 어느 정도 비례하거든요.

- 거인이라는 게 진짜로 있을 수 있다는 소리군...

대령은 거인을 마음속에 깊게 담아둔 모양이었다. 나는 그를 위해 확실하게 못을 박아주었다.

- 거인은 진짜로 있습니다. 그나저나 산소가 그렇게 많으면 헬멧을 쓰고 다닐 필욘 없는 거 아닙니까?

- 데이터상으로는 충분히 호흡이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만, 좀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독성물질과 유독가스 테스트도 진행해보겠습니다.

다른 결과도 속속 들어왔다.

- 중력은 지구의 약 1.135배 가량입니다. 기온은 21도이고, 일교차는.......자전주기를 지켜봐야할 것 같습니다.

모든 데이터가 한 가지 결론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곳이 지구와 매우 흡사한, 생물이 번성한 행성이라는 것.

그 사이 정신이 돌아온 차수진은 흙을 한 움큼 퍼서 체로 거르는 중이었다. 마치 새 장난감을 받은 아이들 같았다. 과학자들이 얼마나 들떠있는지는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처럼 이세계의 생태에 대한 환담을 나누었다.

이윽고 큰 원을 따라 텐트촌이 만들어졌다. 궤도차량이 텐트 바깥에 방벽처럼 주차되었고, 차량과 텐트 사이에 참호를 만드는 작업이 이어졌다. 나와 정기호도 땅을 파내는 데 한몫 거들었다.

- ......셔도 될 것 같습니다.

한창 작업에 열중할 때, 외부채널을 통해 메시지가 들어왔다. 나와 특전사들은 삽질을 하다말고 미어캣처럼 고개를 쳐들었다.

- 헬멧을 벗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 진짜 괜찮은 겁니까?

- 데이터상으론 확실하긴 합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때부터 활짝 열려있는 통신망에 어색한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말을 꺼낸 과학자를 비롯한 누구도 먼저 헬멧을 벗지 못했다. 이대로 두면 영원히 쳐다만 보고 있을 것 같았다.

- 그럼 제가 벗어보도록 하죠.

- 부팀장님, 잠시만요...!

차수진이 미처 말리기도 전에 나는 헬멧을 활동복과 분리해버렸다. 그녀는 입을 틀어막고 경악해했다.

- 부팀장님........

나는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싱그러운 향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한때 너무나 당연했으나 지금은 그렇지가 않게 된, 원시의 자연만이 뿜어낼 수 있는 생명의 에너지였다.

- 멀쩡하시네요?

“뭘 기대했습니까, 벗으세요.”

내가 무사한 걸 확인하자 하나 둘 헬멧을 벗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심호흡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원들은 이어서 힘들게 착용했던 활동복도 벗어 고이 접어두었다. 족쇄를 해제하자 삽질에 스피드가 붙었다.

“부팀장, 이리 와보게.”

대령이 먼발치서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정기호와 세 명의 외교관이 먼저 와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진입지점을 무사히 확보했으니, 돌아가서 보고를 해야지.”

“제가요?”

“무슨 소리. 자네는 여길 지켜야지, 가긴 어딜 가.”

“보고는 저희가 가서 하겠습니다. 장관님이 목을 빼고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외교관들이 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돌아가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기대로 뺨이 붉게 달아올라있었다.

나는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지금 상황에서 가장 필요없는 인력이 외교관이긴 했다.

“그래서 말인데, 보고를 하러 가는 김에 당국에 요청할 게 있으면 지금 말해두게.”

“뭐든 요청해도 됩니까?”

“뭐든지.”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 공병을 더 불러달라고 하세요. 제대로 건물을 올려보죠.”

돌풍 작전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했다. 현지인의 취락과 가까운 곳에 떨어질 가능성과 그렇지 않을 가능성.

후자가 나쁜 것임에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일단 예상되는 위협을 대비하는 차원에서라도, 진입지점을 거점기지로 삼아 요새화를 해두는 게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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