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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2화 (12/205)

12화. 에신으로 (3)

“부팀장님.”

나는 못 들은 척 앞만 보고 걸었다.

“부팀장님!”

뾰족한 물체가 바닥을 턱턱턱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체중이 가벼운 여성이 구두를 신고 전력으로 질주해오는 소리였다.

“부팀장님, 잠시만 멈춰보세요!”

흰색 가운을 입은 젊은 여성이 헐레벌떡 다가와 내 소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가운에 달린 명찰에는 차수진이란 이름이 자수로 새겨져있었다.

극지연구소 책임연구원,

생물학박사 차수진.

이 조그만 체구의 여자가 요 며칠 내 스트레스지수 상승의 주요원인이었다.

“왜 이렇게 걸음이 빠르세요? 에신에서는 천천히 걸으면 누가 잡아가나요?”

“무슨 일이십니까?”

“잠시만요, 숨 좀 돌리고.......”

그녀는 잠깐 뛴 것만으로도 숨이 턱에 닿아있었다. 이십대 후반의 꽃다운 나이에 이미 체력은 황혼기로 접어든 듯했다.

나는 무심하게 서서 그녀가 심호흡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푸석푸석한 머릿결, 날마다 색깔만 바뀌는 옷.

꾸미면 예쁠 것 같긴 한데, 이 여자는 그런 쪽엔 터럭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그런 데에 관심이 있었다면 학위를 따자마자 남극으로 날아가진 않았겠지.

“저기, 부팀장님. 부탁 좀 할게요.”

“안 됩니다.”

“무슨 부탁인지 아직 말도 안 했는데요?”

“보나마나 뻔합니다.”

“일단 들어보고 판단해주세요! 진짜로!”

그녀가 막무가내로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나는 잠시 그녀가 지금껏 했던 부탁이란 것들을 돌이켜보았다.

초면에 채혈을 하겠다고 덤비지 않나, 포탈에 몰래 들어가려다 경호팀에 붙들리질 않나. 생물지도를 만들어야한다면서 환생자들을 하루 종일 취조하는 건 덤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하면 물불을 안 가리고 달려드는 바람에 에신1과 직원들에게서 민원이 폭주하는 중이었다.

“일분 드리겠습니다.”

“너무 짧아요. 삼분!”

“......그럽시다.”

나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선을 그어두지 않으면 오후 전체가 통으로 날아가는 수가 있었다.

그녀는 마른입술에 침을 적시며 잠깐 할 말을 정리했다.

“저기, 저희 같은 생물학자들의 꿈이 뭔지 아세요?”

“제가 알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한 번 찍어보세요.”

“글쎄요. 환경오염을 막는 일입니까?”

“물론 그것도 중요하죠. 근데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또 있어요. 화성에서 외계생명체를 발견하는 일이에요.”

“아하.”

“상상이 가세요? 인류가 화성에서 흙 한 줌 퍼오는 데 얼마나 큰 시간과 노력을 들였는지! 지구 밖에도 생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오늘 이날까지 얼마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그녀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나는 하품을 참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축하드립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화성탐사 프로젝트엔 끼지도 못했다구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분통이 터져 죽겠는데.”

“요점이 뭡니까.”

“국장님한테 절 진입팀에 넣어달라고 말 좀 해주세요.”

“안 됩니다.”

“왜요?”

“일단 제 권한이 아닙니다.”

에신에 대해 잘 안다는 이유로 여기저기 자문을 해주고 다니는 중이지만, 내 임무는 어디까지나 경호책임자였다. 남 일에 발 벗고 나선다고 해서 수당이 더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부팀장님 빽이 외교부장관님이시잖아요.”

“.......그거 헛소문입니다.”

“이상하네요. 부팀장님이 말씀하시면 다들 잘 들어주시는 게 그것 때문이 아니었어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장관이 사고 수습을 위해 뛰어다닌 게 이렇게 와전되고야 말았다.

아닌 게 아니라 청사 내에 나를 둘러싼 갖은 소문이 난무하고 있었다. 고위 외교부공무원의 아들이다, 소미와 데이트를 하는 사이다, 악마의 자식이니 눈만 마주쳐도 저주가 옮는다. 해명하기도 귀찮아 방치중이었는데, 이렇게 돌아오는 걸 보면 무슨 수를 쓰긴 해야 할 모양이었다.

“정 급하면 정기호 팀장한테 가보시면 됩니다.”

“팀장님은 안 돼요.”

“왜 그렇습니까?”

“그분은 너무 꽉 막혀서 협상불가에요.”

내가 만만하게 보였다는 거로군.

“제발요, 네?”

그녀가 두 손바닥을 찰싹 붙이며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많이도 안 바래요. 토양샘플만 채취할 수 있어도, 아니, 공기 중에 떠도는 포자나 박테리아라도 좋아요, 뭐든지 외계생명을 입증할 수만 있다면 괜찮으니까요! 학자의 모든 걸 걸고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인류 최초로 외계생명을 입증할 기회를 제게 주세요!”

“........”

분명 빌고는 있는데 비는 것 같지가 않았다. 포탈과 동귀어진하겠다던 박문식 대령과 맞먹는 기백이 느껴졌다.

대단한 열정이긴 했다. 물범인가 뭔가를 연구하겠답시고 이십대의 나이에 남극기지에 틀어박힌 것만 봐도 그렇고, 포탈 프로젝트 소식을 듣자마자 남극에서 여기까지 날아온 것도 그렇고.

나는 마음이 약해진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매정하게 말했다.

“진입팀에 학자 여러분들을 포함시키지 않는 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연구할 기회는 앞으로 얼마든지 있습니다.”

“부팀장님이 지켜주시면 되잖아요.”

그녀가 고개를 들며 당돌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부팀장님 엄청 싸움 잘하신다면서요. 특전사 아저씨들도 부팀장님한테 배워간다면서요.”

“그건 그거고, 방침은 방침입니다.”

“그러면 돈이면 될까요? 제가 아직 큰 돈은 못 모았지만 적금 정도는 깰 수 있어요.”

“아니, 됐습니다. 말씀 정도는 전달해보죠.”

“진짜요?”

“그냥 얘기만 해보겠다는 소립...”

그녀가 와락 달려들어 나를 빨래 쥐어짜듯 꽉 껴안았다. 그녀는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제자리에서 몇 바퀴나 방방 뛰더니, 실험도구를 챙겨둬야겠다며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려갔다.

외교부가 남들의 오해를 살만큼 환생자에게 특혜를 퍼주는 건 맞다. 지금 내가 들르려는 곳도 그런 특혜의 연장선이었다.

이름하야 연무실.

서울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청사 17층에 경호팀 전용의 체력단련장을 내준 것이다. 경호팀이라고 해봐야 전투력이 있는 건 나와 정기호뿐이라, 사실상 둘 만의 공간이라고 봐도 좋았다.

내가 팀원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동안 정기호는 연무실에 틀어박혀 검술연마에만 매진했다. 그는 암살자인 나와 동수를 이뤘다는 데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듯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그가 평범한 전사가 아니라 고위가문의 자제였을 거라고 추측중이었다. 값비싼 스포츠카와 명품 옷을 자연스럽게 소화하는 모습이 부를 향유하는 데 익숙한 인간이라는 티가 났다.

“왔냐.”

그는 상체를 탈의한 채 샌드백을 두들기다가, 내게 건성으로 알은척을 했다. 나는 캔커피를 하나 따서 창가 옆으로 가 섰다.

잠깐 동안 그는 말없이 샌드백을 더 두들겼다. 그러더니 앞뒤 맥락도 없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

“에신에 돌아갈 곳은 있냐?”

“아니.”

돌아갈 곳 따위가 있을 리가.

내가 외교부에 들어온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안정된 직장, 둘째로는 놓고 온 동료들 때문에.

오데르의 그림자라 불리는 암살자들은 종종 인간성 없는 괴물로 묘사되곤 하지만, 실은 그들끼리는 동료애라는 게 존재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신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죽이는 게 허락되지 않은 대상이었다. 호기심이나 호승심 등의 일차원적인 감정은 점차 우애나 사랑 같은 복합적인 감정으로 변해갔다.

“나는 있다.”

정기호가 말했다. 나는 관심없는 척 하며 한쪽 귀를 쫑긋 세웠다. 그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내게 꺼내는 건 처음이었다.

“집이냐?”

당연히 집이겠지, 질문하고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원래 내가 물려받았어야 할 가문이다. 지금쯤이면 내 여동생이 다스리고 있겠지.”

“꽤 잘나가는 가문처럼 들리는걸.”

“스트리아.”

스트리아?

아무리 에신이 넓다지만, 직업특성상 나는 웬만한 귀족가문의 이름은 달달 외우고 다녔었다. 환생하고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 대부분의 이름은 잊혔으나, 사람들에게 회자되던 큰 가문만큼은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스트리아였다.

“혹시 황국 남부에...”

“맞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며칠이면 고향으로 돌아갈 사람 같지가 않았다. 어울리지 않게 시름에 젖어있다고나 할까.

“뭐가 문제냐? 복에 겨워서 주체가 안 되냐?”

“날 죽인 게 여동생이다. 완벽하게 허를 찔렸지.”

- 남의 피나 빨아먹고 사는 모기 같은 새끼. 어두울 때만 기어 나오는 해충 같은 새끼.

그가 날더러 이를 박박 갈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과연 암살자를 혐오할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왜, 복수라도 하게?”

“스트리아는 한때 내 것이었으니만큼 일을 크게 벌여서 손해를 끼치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배신자의 목 하나면 족하겠지만, 가주쯤 되는 인물을 조용히 처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나는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깨닫고 커피를 뿜을 뻔했다.

“뭐?”

“너는 지금껏 내가 만나본 인간중에서 가장 강하다. 이제 술법의 힘도 되찾았으니 암살자로서의 역량은 훨씬 강하겠지.”

“아마도.”

“도와줄 수 있냐?”

그의 접근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본인 자존심을 내려놓는 동시에 날 인정하는, 귀족 출신답지 않은 화법이었다. 전생의 동료들과 바로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눴었다.

안 그래도 그에겐 빚진 게 있다. 다르마알과 싸울 때 그가 끝까지 발목을 잡았더라면 상황이 어디까지 나빠졌을지 몰랐다.

“이게 공짜가 아니었구만?”

나는 그에게 받은 검을 가리키며 씩 웃었다. 비로소 그의 얼굴에도 웃음기 비스무레한 게 어렸다. 그를 알고 나서 처음 보는 웃음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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