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1화 (11/205)

11화. 에신으로 (2)

나는 그쯤하고 술법을 풀어주었다. 단순한 포박술이지만, 마법에 대한 내성이 전혀 없는 사람은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것만으로도 질식사할 수 있었다.

“쿨럭, 쿨럭...!”

“괜찮으십니까?”

“허어억.......”

그는 부축하려는 내 팔을 쳐낸 뒤 힘겹게 몸을 세웠다. 몸을 일으키고도 그는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눈가의 주름이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켰고, 굵은 땀방울이 연신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적게 잡아도 40년이다.

그는 오랜 세월 세상에 귀신 따위는 없고,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건 모조리 미신이라고 호언하고 다녔음에 틀림없었다. 나는 한 인간의 신념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을 목도중인 것이다.

“미안하군, 추태를 보였다.”

그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말했다.

“내가 무지했음을.......인정하지.”

“죄송합니다, 한 번 보여드리는 게 빠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죄송할 것 전혀 없어. 말보단 언제나 행동이니까. 자네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내가 먼저 요구를 했을 거야.”

대령은 다시 군인다운 절도를 되찾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내게 검증을 요구하고도 남았을 사람 같았다.

“따라오게.”

그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회의실로의 초대였다.

회의실엔 특수전사령부에서 파견한 장교 다섯 명이 먼저 와서 대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계급에 비해 대체로 젊어보였고, 눈빛과 자세가 아주 패기만만했다. 대한민국 최정예부대의 일원으로서 숱한 사선을 넘어왔다는, 근거가 있는 자신감이었다.

“단결!”

최문식 대령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다섯 장교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거수경례를 올렸다. 경례각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칼 대신 갖다 써도 될 듯했다.

“쉬어.”

대령이 경례를 받자 그들은 일어났을 때처럼 일사분란하게 착석했다. 나와 정기호는 대령을 따라 앞으로 나섰다.

“소개하지. 이쪽은 외교부 에신1과 소속 경호팀장과 부팀장이다. 에신1과가 본 프로젝트의 경호업무를 총괄하고 있으니만큼, 긴밀한 협력하에 작전계획을 수립하도록 한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렁찬 목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군기가 잔뜩 든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도로 입대한 것만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대령은 A2 용지를 이어 붙여 만든 상황판을 펼쳐보였다. 에신 진입작전의 이름은 ‘돌풍’이었다. 작전명은 멋있게 지은 거 같다만 세부내역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상황판 전체가 텅텅 비어있었다.

“보다시피 지금부터 여길 채워 넣어야하네. 자네들이라면 우리가 어떤 상황을 대비해야하는지 말해줄 수 있겠지.”

“에신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계신가요? 그것부터 저희가 알아야 말씀드리기 편할 것 같습니다..”

“작전장교.”

대령이 관등을 부르자, 소령 계급장을 단 장교가 두꺼운 서류철을 한 부씩 나누어주었다.

- 에신 황국의 문화와 제도

내가 채용되기 전, 환생자들이 모여 각자의 경험을 집대성한 자료였다.

.......

나는 서류철을 빠르게 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잘 만들어진 자료이긴 했다. 우리의 목적이 관광지 투어였다면 성공한 가이드라고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령이 필요로 하는 건 유사시를 대비한 정보였다. 서류에는 그런 정보만 쏙 빠져있었다. 집필에 참여한 대부분의 환생자들이 성곽도시에서 태어나 큰 어려움을 모르고 살아온 탓인 듯했다.

“이건 네가 설명하는 게 낫겠다.”

정기호가 내게 서류를 떠넘겼다.

“왜?”

“나보다 네가 도시 밖에 오래 있었을 거 아니냐.”

“뭐, 그렇긴 하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수긍했다. 정기호가 도시태생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 같은 전사들은 자신들의 결투가 명예롭고 정당하리라는 확신에 차있었다. 삶의 터전이 높다란 벽으로 보호된 자들에게만 허락되는 발상이었다.

나?

나는 일단 누군가의 배를 빌어 ‘태어나지’ 않았다. 오데르의 흙구덩이를 두 손으로 기어 올라왔지. 어둠과 죽음밖에 없는, 저주받은 땅 복판에서.

“크흠.”

나는 한 차례 헛기침을 한 뒤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포탈의 폭이 넓지 않아 자원과 물자를 마음껏 투입하기 어렵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4륜 차량을 반입하지 못한다는 가정하에 작전을 세우시길 권고드립니다.”

“알겠네.”

"또한 진입지점에 대한 데이터도 전무합니다. 사막 한가운데에 떨어질지, 깊은 산중으로 가게 될지, 혹은 사람들로 붐비는 도심일지, 아무런 정보가 없기 때문에 현장에서 어떤 상황과 마주하게 될지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주게.”

“최악의 상황이라.......”

나는 전생의 기억을 돌이켜보았다. 일반적으로 적용 가능한, 계획이 틀어졌을 때 마주칠 수 있는 악운이란 무엇이었던가.

“시체걸이라는 놈이 있습니다.”

“시체...걸이?”

“혹시 좀비 좋아하십니까?”

“난 그런 걸 본 적도 없다네.”

“좋아합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게 좀비물입니다.”

대령이 눈살을 찌푸리며 부정한 반면, 장교들은 의욕적으로 긍정했다. 그들은 내가 지금 담력테스트나 하려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시체걸이는 부패의 에사인이 업무를 태만히 해서 생겨나는 놈들입니다. 생김새가 좀비와 비슷하지만, 바이러스와 무관하기 때문에 물려도 전염되진 않습니다. 대신 더 강하고, 더 빠르고, 더욱 지능적이죠. 보통은 예닐곱 마리씩 몰려다니는데, 큰 전투가 벌어졌던 곳 근처에서는 군단 단위의 무리가 목격되기도 합니다.”

“........”

장교들은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은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상관이 세상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있으니 차마 마음속 말을 꺼내지 못하는 듯했다.

“그놈들은 어떻게 상대할 수 있나? K7같은 개인화기로 처리가 가능할까?”

“글쎄요.......죽은 시체에게 총은 그다지 효과적일 것 같지 않습니다. 관통상이 큰 의미가 없으니까요. 일반적으로는 냉병기로 토막을 내는 전술이 선호됩니다.”

“냉병기? 우리더러 총검술이라도 쓰라는 건가?”

“어설프게 총검을 들이대느니 화력으로 밀어붙이는 게 낫습니다. 수류탄을 까던, 유탄을 쏘던.”

“그렇군.”

대령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멍하니 서있던 작전장교에게 호통을 쳤다.

“뭐하나? 받아쓰지 않고.”

“죄, 죄송합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새겨들어! 귀관들의 피가 되고 살이 될 정보다. 귀관들은 이후 여기서 나온 정보를 각급부대에 전파해야할 임무도 있어.”

장교들이 다급하게 필기를 시작했다. 너무 흘려들은 탓에 적극적으로 베끼기를 시도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다음은? 또 주의해야 하는 적이 있나?”

“일단 특징적인 것들만 두어 개 더 추려보겠습니다. 평지거인이라는 놈은 이름 그대로 거대합니다. 시체걸이처럼 호전적이진 않은데, 자기 영역이 침범당하는 걸 굉장히 싫어하죠. 가죽이 두꺼워서 쓰러뜨리려면 105밀리 견인포 정도는 끌고 와야 할 겁니다.”

“거인이라고? 얼마나 크기에 거인이라는 건가?”

“성체 키높이가 대충 저렇습니다.”

나는 창문가 너머에 있는 지상 십오층 가량의 빌딩을 가리켰다. 대령의 눈에 불신의 빛이 깃들었다. 아무리 미지의 땅이라지만 설마 저렇게까지 거대한 생명체가 있겠냐는 것이다.

“악령들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영체는 물리적인 실체가 없기 때문에 화기로는 제압이 불가능합니다.”

“아멘.”

악령이란 단어가 나오자마자 한 장교가 반사적으로 성호를 그었다.

“귀신도 나온단 말인가.......”

대령이 탄식했다. 장교들도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특히 성호를 그은 장교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듯했는데, 귀신이 언급되면서부터 패기는 온데간데없이 얼굴이 파랗게 질려있었다.

“악령을 상대할 때는 카둔의 고위사제이신 소미님께 도움을 요청하시는 게 좋습니다. 소미님이 축성을 한 탄환은 영체에 작용하리라 추정합니다.”

“추정한다고? 확실하진 않다는 건가?”

“축성한 화살을 사용해보긴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탄환은 처음이라서요.”

“.......알겠네.”

악령은 정말이지 골치 아픈 적이었다. 사실 다르마알이 아무리 고약한 놈이라도, 악령이 돌아다니는 곳에 좌표를 찍어 두진 않았을 것 같긴 했다.

“진입지점에 전초기지를 세울 계획이시라면, 최소한 거인 정도는 상대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진지를 구축하고 견인포를 여러 대 운용한다면 거인 한두 마리까지는 내쫓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두 마리 이상이 몰려오면 어떡하나?”

“저와 정기호 팀장이 도망칠 시간은 벌어드릴 수 있습니다.”

나는 허리에 찬 검집을 두들기며 미소지어주었다. 정기호는 고개만 까딱일 뿐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도망? 그런 것도 가능한가보지?”

“진입점에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게 도망입니다.”

“그렇다면 적들은?”

“우리를 따라오겠죠. 최악의 경우 청사 지하층을 봉쇄하는 수도 있으니, 도망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특전사로서 지켜야할 명예가 있어.”

대령이 결심을 굳힌 듯 단호하게 말했다.

“귀관들도 잘 들어라, 우리는 결코 후퇴하지 않는다. 적을 끌어들여 조국을 위기에 빠뜨렸다는 오명을 뒤집어쓸 바엔 군인으로서 죽는 게 낫다, 알겠나!”

“예!”

귀청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특히 대령은 정말로 포탈과 동귀어진이라도 할 각오인 듯했다.

“조언 고맙네. 자네의 정보를 매뉴얼화해둬야겠군. 진입한 후에는 우리 나름대로 작전을 수행하겠지만, 종종 도움을 요청하지.”

“물론입니다.”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특전사 대원들이 나보다 전투력이 낮을지는 몰라도, 전술적인 판단력이 모자라진 않으리라 믿었다.

나는 특히 특전사 개개인의 발전가능성에 주목했다. 그들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혈기왕성한 청년들이었다. 그들이 무술에 재능이 없을 리가 없었다. 대령을 잘 구슬려본다면 상당한 전력을 손에 넣게 될지도 몰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