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엇갈린 선택 (9)
너무 스윗한 제안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는 내게 지나치게 자비로웠다. 그러고 보면 그는 자신을 죽이려드는 소미를 어쩌지도 못했다. 기껏해야 아무런 능력도 없던 평민 다섯 명을 소멸시켰을 뿐.
대체 무엇이 위대한 에사인을 이토록 자비롭게 만든 걸까?
정말로 그가 위대하긴 한 건가?
물질은 나누면 작아지지만, 신성성은 나누면 나눌수록 커진다. 이른바 신성한 계약이론이란 개념이다.
만약 에사인의 힘이 추종자의 숫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공식이 여기서도 유효하다면, 모든 추종자를 잃은 지금 그가 가진 힘은 평범한 마법사 수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말하자면 그는 포탈을 열기 위해 시간을 버는 중인 것이다.
“먼저 제 재롱부터 받아보시죠.”
나는 몸을 낮추며 찌르기 자세를 취했다. 내밀어진 검극에서 마력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오데르의 창.
술법을 쓰기 어려운 현재로선 이 기술이 내 가장 강력한 공격기였다. 정기호에게 한 번 시연을 해본 터라 더 자신감이 있었다.
나는 짧은 기합성과 함께 자리를 박찼다. 찌르기는 검의 물리적인 간격을 훨씬 벗어난 타점에 통렬하게 적중했다.
......먹혔나?
피륙을 꿸 때의 손맛이 확실하게 왔다. 아약의 몸이 주춤거리나 싶더니, 단상의 귀퉁이까지 비틀비틀 물러났다. 관통상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상대는 혼돈의 다르마알이었다. 몸에 구멍을 좀 뚫었다고 해서 죽일 수 있을 존재일 것 같았으면 에사인이라 불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엇......”
나는 다음 공격을 위해 디딤발을 내딛다가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왼발을 움직이려고 하니 오른손가락이 움직였다. 오른손을 움직이려고 했을 땐 왼쪽 새끼발까락이 꿈틀거렸다. 팔다리를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술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채 에사인을 대적한다는 게 얼마나 무모한 일이었던가를.
- 이제 신을 능멸한 대가를 치러라.
나는 고농도의 마력이 그의 손가락 끝에 응집되고 있는 걸 발견했다. 불꽃의 형상이 당장에라도 쏘아질 듯 격정적으로 너울거렸다. 의식을 시작하기 전에 시연했던 바로 그 기술이었다.
........
나는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떠보았다. 마땅히 찾아왔어야 할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낭랑한 목소리가 어두운 회장 안에 울려 퍼졌다.
“괜찮으세요?”
철그럭, 철그럭...
나는 처음엔 내 머리를 의심했다. 아무리 오데르의 신도가 밤눈이 밝더라도, 가끔가다 헛것을 보는 경우가 없진 않았으니까.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진 마시구요.”
그러나 이번만큼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견고한 철판갑옷으로 머리 꼭대기부터 발가락 끝까지 감싼 채, 황소도 때려잡을 것만 같은 육중한 메이스를 든 소녀가 눈앞에 서있었다.
설마......
나는 비로소 그녀가 섬기는 에사인을 밝히지 못한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는 강철의 에사인으로 알려진, 카둔의 신도가 틀림없었다. 정기호가 정신 나간 명예지향주의자였다면, 카둔의 신도들은 단단한 거, 두꺼운 거, 금속으로 만든 거에 집착하는 변태들이었다. 전투엔 반드시 전신갑옷을 착용하고 임하라는 게 교리에 적혀있을 정도였다.
쿠웅.
나는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로마 군단병이나 들고 다녔을 법한 거대한 사각방패가 바닥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조용히 말했다.
“마법은 제가 중화시켜드릴 테니 마음 놓고 싸우세요.”
“예.”
“그리고 어디 가서 제가 이러고 다녔다고 말하지 말아주세요.”
어째서인지 뒷말이 더 비장했다. 내가 공교육을 받아 암살자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사회화가 되었듯,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난다는 카둔의 신도는 사춘기 소녀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된 듯했다.
“가세요!”
그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혼돈의 불꽃이 또다시 짓쳐왔다. 그녀는 사각방패를 양손으로 붙든 채 아르마딜로처럼 몸을 웅크렸다.
나는 도약하는 와중에 그녀가 걱정되어 뒤를 흘긋 쳐다보았다. 그녀는 불구덩이 속에서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들고 다르마알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잊고 있었다. 카둔의 신도가 말하는 ‘중화’라는 걸.
그들의 어휘는 일반인과 다소 달랐다. 마법을 맞아서 버티는 게 중화고, 둔기로 피떡을 만드는 게 교화, 육체를 단련하는 걸 여가라고 부르는 식이었다.
- 건방진 놈들.
아약의 사념파가 울려 퍼지자, 또다시 감각이 교란되었다. 나는 이번엔 바뀐 신경신호에 정확히 대응하여 움직였다. 같은 수법에 또 당할 거였으면 오데르의 흙구덩이를 기어 올라오지도 않았다.
이제 그와 나의 거리는 불과 다섯 걸음이었다.
그리고 그에겐 더 이상 남겨진 수가 없었다. 검이 가슴께에 겨눠졌을 때, 그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한때 전 에신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강대한 에사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나는 단숨에 거리를 좁혀 그의 왼쪽 가슴에 힘껏 검을 꽂아 넣었다.
“컥.......”
신의 단말마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얼굴을 흉하게 일그러뜨리며,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을 붕어처럼 뻐끔거렸다.
별안간 소미의 뾰족한 외침이 들려왔다.
“엎드려요!”
난데없이 턱 밑에서 용광로처럼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소미의 손을 떠난 메이스가 흡사 탄도미사일처럼 날아와 아약의 어깨를 박살내었다. 피와 살점이 폭죽처럼 비산했고, 아약에게서 전이된 불꽃은 삽시간에 내 몸까지 뒤덮었다.
“우아아아악!”
나는 얼굴을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모든 생각이 휘발되었다. 오로지 지극한 고통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산채로 불태워지는 격통 속에서 벼락처럼 전생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앙상한 숲과 높다랗게 쌓아올려진 시체 무더기, 핏빛 웅덩이 위에서 포효하는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
- 죽어라, 오데르의 개여!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림자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흉포하게 울부짖었다. 놈이 앞발을 들어 후려칠 때마다 잘려나간 팔다리가 탄피처럼 허공으로 솟구쳤다.
광기가 전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인간들은 불나방처럼 죽어나가면서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이 죽어나갈 때마다 그림자는 눈에 띄게 마모되어갔다.
........님.
그림자는 힘이 쇠할 때까지 발악하다 결국 진창에 처박혔다.
벌려진 입 안으로 흙탕물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왔다. 가느다란 숨이 이어질 때마다 기포가 입 안팎을 들락날락거렸다.
그림자는 전생의 나였다.
........봉팔님.
어느덧 배경이 바뀌었다. 눈부시도록 흰 빛과 함께 목 놓아 우는 아기가 보였다. 간호사인 듯한 여성이 아이를 안아 산모에게 보여주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산모와 아이에게 쏠리고 있을 때, 나는 병실 바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침대 밑에서 뻗어 나온 옅은 그림자가 갓 태어난 생명에게 들러붙고 있었다. 전생의 악연이 현생으로 승계되는 중이었다.
“...박봉팔님, 정신 차리세요!”
조금씩 흐려졌던 시야가 돌아왔다. 난 웬 여성의 품에서 깨어났다. 그 여성이 소미라는 걸 알아채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사이 회장 안에는 빛이 돌아와 있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아무래도 난 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혹시나 해서 몸을 더듬어보았으나, 옷도 멀쩡하고 화상 비슷한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그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예, 괜찮습니다.”
그제야 그녀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전히 갑옷을 입은 채 면갑의 덮개만 위로 올리고 있었다.
“무사하신 걸 확인했으니 전 돌아가볼게요. 혹시 누가 저에 대해서 물어보거든 지나가던 환생자라고 말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녀가 면갑 덮개를 다시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참, 그리고 알아두셔야 할 게 있어요.”
“뭐죠?”
나는 그녀가 고갯짓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회장 가운데에 설치된 석조 구조물이 여덟 개의 팔을 활짝 벌리고 있었다. 단상은 온데간데없었고, 그 자리엔 강력한 마력의 응집체가 소용돌이 형상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포탈이 열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