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엇갈린 선택 (8)
한 점 빛조차 없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난데없이 찾아온 어둠에 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비명소리, 고함소리, 높으신 분들이 호통치는 소리.
뚜벅뚜벅...
나는 바닥을 나뒹구는 사람들을 느긋한 걸음걸이로 지나쳤다. 어둠과 혼돈이란 오데르의 신도에게 요람과도 같았다. 장막을 거닐며 사람들의 절규를 듣고 있자니 포탈을 열기 전인데도 고향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단상까지 불과 몇십 걸음을 남겨뒀을 때, 철탑 같이 거대한 실루엣이 앞을 가로막았다. 아약이 최종 수호자로 낙점한 자, 정기호였다.
그는 경호책임자임에도 불구하고 총을 휴대하지 않았다. 대신 허리춤에 두 자루의 검을 엇갈리게 메었다.
다른 사람이었라면 겉멋만 들었다는 말이 나왔겠으나, 그는 에신 출신의 걸출한 전사였다. 그는 실제로 총보다 검을 다룰 때 더 위협적인 남자였다.
“난 당신한테는 용무가 없는데.”
“왜, 내가 무섭냐?”
“글쎄.......그래야하나?”
“당연히 무섭겠지. 평생 단 한 번도 정정당당한 싸움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을 테니.”
“그렇긴 해.”
난 빠르게 인정했다. 환생한 뒤 나는 한 번도 싸움이란 걸 해본 적이 없다. 전생버프를 잔뜩 두르고 태어난 주제에 평범한 인간과 투닥거리는 건 너무 격조 떨어지는 행동이잖아.
“남의 피나 빨아먹고 사는 모기 같은 새끼. 어두울 때만 기어 나오는 해충 같은 새끼. 너 같은 벌레를 밟아 없애는 게 내 최대 기쁨이다.”
.......모기는 너무하네.
아무래도 그는 전생에서 암살자 나부랭이에게 데여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날 싫어할 리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줬을 동업자에게 깊은 유감을 느꼈다.
퍼억.
검은 물체가 그의 손을 떠나 콘크리트 바닥에 깊이 박혔다. 허리에 매어뒀던 검이었다. 그는 다른 한 자루의 검을 천천히 꺼내며 말했다.
“배짱이 있다면 뽑아봐라.”
바닥에 박힌 검이 부르르 진동하며 흙먼지를 위로 퍼올리고 있었다.
그는 모기에게 무기를 내어주는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정정당당한 승부를 기대하는 듯했다. 에신에는 희한하게도 이런 타입의 생물들이 많았다. 명예로운 싸움을 위해선 죽어도 상관없다는, 근육이 뇌까지 들어찬 족속들이.
나는 검손잡이를 쥐고 가만히 힘을 주었다. 검은 처음부터 내 손바닥에 붙어있던 것처럼 스무스하게 딸려 나왔다.
“.......”
그는 의외라는 눈빛으로 날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검을 허공에 몇 차례 휘둘러보았다. 휙휙 소리가 나도록 세게 휘두르는데도 저항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거 비싼 거 같은데, 나한테 줘도 되나?”
“가지고 싶다면 자격을 증명해봐라.”
그가 살기 띤 미소를 지었다.
“이야아아아!”
벽력같은 고함이 회장에 울려 퍼졌다. 그가 발을 딛는 순간 바닥에 널브러졌던 의자들이 공중으로 한 뼘씩 튀어 올랐다. 검극이 눈 깜짝할 틈도 주지 않고 코앞까지 쇄도했다. 나는 제자리에 선 채 그의 검면을 강하게 옆으로 쳐냈다.
연이은 두 번째 공격.
머리부터 쪼개버리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수직으로 내리꽂는 참격이었다. 나는 이번에도 지지 않고 맞섰다. 검과 검이 부딪히자 귀청이 떨어질 것만 같은 폭음이 회장 안에 메아리쳤다.
“바, 방금 뭐야?”
“사격중지! 사격을 중지하라!”
곳곳에서 군인들의 혼란스러운 외침이 들려왔다. 그들은 어디선가 총이 격발된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울토르의 검.
제국 장교들이 즐겨 쓰는 극단적인 공격형 검술이다. 거의 모든 초식이 일격필살의 참격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수련자는 기술을 익히는 시간보다 신체를 단련하는 데 더 큰 시간을 들였다.
암살자 입장에서는 신물이 날 정도로 자주 부딪히는 검술이었다. 연마의 정도로 미루어보건대 정기호는 상당한 고위급 장교였음에 분명했다.
생각하는 와중에도 연환공격이 쉼없이 들어왔다. 검극이 바닥을 훑으며 급격하게 사선으로 치솟았다.
쩌어엉.
검손잡이가 손아귀 안에서 미친 듯이 널을 뛰었다. 그동안 수련을 게을리한 탓에 살갗이 찢겨져나갔을 게 뻔했다. 죄 없는 사람들은 난데없는 강풍에 휘말려 잡동사니처럼 굴러다녔다. 그들은 이 바람이 인간이 만들어낸 운동에너지라는 걸 꿈에도 모를 것이다.
나도 반격에 나섰다. 그의 동작이 워낙 커서 충분히 틈을 노려볼만했다. 나는 몸을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낮추며 왼발을 앞으로 길게 내밀었다.
휘오오오......
일점으로 집중된 마력이 검극에서 연기처럼 승화했다.
기술이 제대로 나가줄지는 모르겠다. 도대체 얼마만의 실전인지 가늠조차 힘들었다.
생각은 여기까지였다. 나는 자세가 완성되자마자 튀어나갔다. 마치 투창처럼, 찌르기가 검의 길이 이상으로 뻗어나가 정기호의 가슴을 강타했다.
“크윽....!”
정기호는 비틀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는 굉장히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걸 막는다고?”
속마음이 무심코 튀어나왔다.
기술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간만이긴 했어도, 제대로 구동이 되기는 했다. 그렇다면 지금쯤 그의 가슴에 예쁘게 바람구멍이 뚫려있어야 정상이었다.
이번에는 그가 기술을 걸었다. 나는 그가 공중으로 뛰어오르자마자 어떤 공격이 들어올지를 감지했다.
울토르의 검, 대번격.
나는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그가 떨어지는 걸 노려보았다. 죽느냐 사느냐가 찰나의 판단에 달려있었다.
이건 못 막는다.
나는 허리를 부셔져라 비틀어 몸을 빼냈다. 마력에 휘감긴 검신이 바닥을 문자 그대로 작살을 내놓았다. 홍해가 갈라지듯 철근이 골조를 드러내었고, 콘크리트는 유탄이 되어 사방팔방으로 쏘아져나갔다. 나는 몸을 뒤집고 구르는 생쇼를 하고 나서야 나서야 간신히 일어설 수 있었다.
“너 뭐하는 놈이냐?”
그가 바닥에 꽂힌 검을 회수하며 사나운 목소리로 물었다.
“알잖아, 9급 공무원인거.”
“장난치지 마라. 너 대체 뭐하던 놈이야? 암살자가 맞기는 하냐?”
“맞으니까 어두울 때 기어나왔지.”
“......이십년 군생활을 통틀어 수많은 암살자를 만나봤다. 대부분은 잠들었을 때 기습을 하거나, 음식에 독이나 타는 찌끄레기였다.”
“대부분은 암살자가 아니야, 오데르의 신도는 더욱이 아니고. 진짜를 만났더라면 좀 더 일찍 환생하는 게 가능했을 텐데.”
“하.”
그가 실소를 흘렸다. 나쁘지 않은 웃음이었다.
“그럼 그렇다고 치자. 중소기업은 뭣 때문에 다니고 있었냐?”
“대기업 갈 머리가 안 됐으니까.”
“아니, 하다못해 도장이라도 차리지, 인마.”
“사무직이 내 꿈이었어.”
“.......”
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내 인생이 어이가 없었다. 모처럼 환생을 했는데 왜 지능이 그대로인거냐고.
“됐다, 김샜네.”
그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매무새를 바로잡았다. 그는 더 이상 나와 싸우는 일에 흥미가 없는 듯했다.
“김샜으면 가 봐도 되냐?”
“받어.”
그가 허리춤에서 검집을 풀어서 내게 던져주었다. 검집의 문양만 봐도 얼마나 비싼 검인지 짐작이 갔다.
그가 뒤를 돌아 걷기 시작하자, 나는 조금 당혹스러워졌다. 아무리 김이 샜어도 그렇지 경비책임자가 자리를 비우는 건 좀 아니지 않을까.
“야, 진짜 안 막아도 되냐?”
그는 대답 대신 어깨를 한 차례 으쓱거렸다. 정말로 아약이 어찌되건 상관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에신을 떠나온 지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서 깜빡 잊고 있었다. 전사라는, 그들만의 명예에 목숨을 거는 미치광이들을.
그들은 특히 결투라는 행위에 유난히 환장했다. 이 정신나간 것들은 심지어 영토나 왕권이 걸린 전쟁을 결투로 매듭짓기도 했다. 그는 몇 번 검을 섞어본 뒤 나를 전사로 인정했고, 이 싸움에 정당한 이유가 존재할 거라 멋대로 규정해버린 듯했다.
아약은 단상에 선 채 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소미가 장담한대로 완전한 무방비상태로 보였다.
나는 검을 빼들고 아약에게 다섯 걸음 안쪽까지 다가갔다.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좁힐 수 있는, 총으로 치면 유효사거리라 부를 수 있는 간격이었다.
어젯밤 나는 소미와 함께 에사인을 찾아내는 실험을 진행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가 옳았다. 아약을 가장하고 있는 존재는 흉신으로 알려진 혼돈의 다르마알이었다.
그는 세계를 국밥에 타서 말아먹으려다가 황제의 일곱 수호신에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해지는데, 민담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이 정확한 행적은 오리무중이었었다.
후우우.......
손아귀에 힘을 불어넣을 때였다. 그가 난데없이 몸을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집중을 흩트리지 않은 채 그를 주시했다. 순간 언어를 초월한, 문자화된 의지가 머릿속에 곧장 전달되어왔다.
- 박봉팔.
단 한 마디,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도 나는 그가 인간의 탈을 완전히 벗어던져버렸음을 알 수 있었다.
- 네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내게 굴종하라. 나를 주인으로서 섬겨라. 그리하면 두 발 달린 짐승들 중에선 널 능가할 존재가 없게 될 것이다. 일곱 대신이 네게 머리를 조아리고, 네 자손들이 대륙의 이빨부터 꼬리까지 퍼져나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