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7화 (7/205)

7화. 엇갈린 선택 (7)

“하지만 결국엔 모든 게 심증뿐이군요.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심증만으로 행동하는 게 옳은 일일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

그녀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무안해질 정도로 오래도록.

“제가 말실수를 했나요?”

“전혀 아니에요.”

순간 맞은편에서 오는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이쪽을 훤히 비추었다. 그녀는 내 상상보다 훨씬 불안정한 모습이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민낯인데다가,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전 사람 보는 눈이 없어요.”

“예?”

“저는 박봉팔님께서 오데르의 신도라고 말씀하셨을 때 나쁜 선입견을 품었었어요. 이분은 돈이면 뭐든지 하시겠구나, 돈만 맞춰드리면 어떤 일이든지 해주실 분이겠구나하고.”

“영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그때 제게 그러셨잖아요? 그 사람에게 죽어 마땅한 이유가 있으면 좋겠다고.”

“예, 그랬었죠.”

“그 말씀이 하루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요. 혹시 내가 잘못 판단한 거면 어떡하지 하는 의심이 끊임없이 들었어요. 그날 저는 의뢰를 드렸던 게 아니에요, 너무 괴로워서 제가 당연히 졌어야할 책임을 남에게 미룬 거였죠. 만약 박봉팔님께서 제 생각에 공감해주신다면 좀 더 나 자신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대신 피를 묻혀주신다면 죄책감을 덜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녀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방울이 맺혔다.

“저 비겁하죠, 정말.”

“어, 음.......”

나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 미안해하실 것 없습니다. 일단, 아직 누구도 죽은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리고 증거가 영 없는 것도 아닙니다.”

“증거를 가지고 계시나요?”

그녀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세계가 이어진다면 이쪽 세계가 일방적으로 잡아먹힐 것이다. 제가 그걸 논증할 순 없습니다. 저는 일개 암살자 나부랭이일 뿐이니까요. 아약님이 같은 팀원 다섯 명을 살해했다, 마찬가지로 제가 밝혀낼 수 없는 일입니다. 형사도 모른다는 걸 저 따위가 어떻게 알아내겠습니까. 하지만 아약님이 에사인인지 아닌지 정도는 제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미, 당신의 정체까지도.

나는 뒷말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어떻게요?”

“사람을 데려와서 각각의 에사인에게 신앙을 맹세하게끔 하면 됩니다. 지구에 그것들 중 하나가 넘어온 게 사실이라면, 누군가는 크든 작든 신앙의 대가로 힘을 나눠받게 될 겁니다.”

그녀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런 묘사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그녀는 그 정도로 감탄하는 중이었다.

“제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요?”

“저도 방금 떠올랐습니다.”

“잠깐만요. 신앙을 맹세할 사람들을 어디서 찾죠? 아시겠지만 단순히 좋다는 정도로는 힘을 나눠받을 수 없어요. 정말로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신앙을 받아들여야 해요. 그런데 우린 포교를 하고 있을 시간이 없잖아요. 이제 내일이면 포탈을 여는데.......”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디에요?”

“소미씨 아이돌이잖습니까.”

나는 그녀에게 윙크를 보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신도들을 많이 거느리고 계시던데요.”

드디어 두 세계가 이어지는 날이 왔다.

포탈은 외교부청사 지하 7층에 설치되었다. 도면상으로는 지하 6층이 마지막이나, 비밀취득인가를 소지하고 있다면 보안구역에 접근하는 게 가능했다.

- 확인했습니다.

무미건조한 기계음과 함께 강철로 만들어진 자동문이 좌우로 갈라졌다. 이중 삼중의 문을 지나고 나면 거대한, 마치 비행기 격납고와도 같은 어마어마하게 넓은 공동이 나타났다.

적잖은 사람들이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고위공무원, 선출직 공무원들이 눈에 띄었고, 그들을 수행하기 위한 수행비서들, 의전팀, 경호팀, 심지어 음악을 연주할 악단까지 동원되어 있었다.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범영 과장이 다가와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아침은 든든히 드셨습니까?”

“라면이죠, 뭐.”

“오늘은 밥심이 좀 필요하실 겁니다. 포탈이 예정대로 순조롭게 열린다면, 저녁 무렵엔 에신으로 진출해 전초기지를 짓게 될 수도 있습니다.”

“드디어 고향땅을 밟게 되네요.”

“하하, 환생자분들은 감회가 남다르시겠죠.”

불현듯 저편 세계에 놓고 온 인연들이 떠올랐다.

나는 여느 오데르의 자식들처럼 어둡고 음습한 흙구덩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도, 형제도 가져보지 못했지만 동료라고 부를만한 자들은 있었다.

“자리를 마련해두었습니다. 저쪽으로 가셔서 앉으시면 됩니다.”

그가 손으로 회장 왼편을 가리켰다. 나는 그를 지나치며 곁눈질로 보안태세를 확인해두었다.

.......살벌하구만.

거의 중대병력 하나가 투입된 듯했다. 시야가 가려질만한 곳엔 어김없이 중무장한 병사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정해진 자리로 가서 얌전히 앉았다. 어째서 이런 비밀시설 내에 와이파이가 원활히 들어오는지는 모르겠으나, 시간 때우는 덴 문제가 없었다.

잠시 후, 회장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이 납신 듯했다.

“마법사님이 입장하십니다!”

우렁찬 외침을 신호삼아 악단이 웅장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약은 평소처럼 캐주얼한 복장이 아니었다. 황제의 일곱 가지 권능을 상징하는 의례복을 입고, 공작새의 깃털로 만든 부채를 흔들고 있었다. 환생자가 보기에도 썩 그럴싸한데 마법사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 눈엔 얼마나 멋지게 보이겠나 싶었다.

아약은 높으신 분들과 인사를 나눈 뒤 중앙에 위치한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단상 앞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 박수갈채가 끊이지 않고 쏟아졌다.

........

이윽고 박수갈채가 잦아들었다. 사람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의 다음 행보를 지켜보았다. 사전에 계획한 순서라는 게 있겠지만, 이 의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게 그의 의지에 달려있었다.

초미의 이목이 집중된 순간에 그가 택한 행동은 휴대폰을 꺼내드는 것이었다. 그는 휴대폰의 키패드를 누르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단상 아래를 훑어보았다.

- 띠리리리리리.

불과 몇 초 후 내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전화를 받기 전에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졌다.

- 안녕하신지요, 아약님.

드디어 그가 나를 찾아냈다. 그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짓는 게 몇십 미터 밖에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 귀한 분들이 참 많이도 오셨습니다. 정말이지 저 혼자 보기엔 아까운 광경입니다.

그는 손에서 자그만 파란 불꽃을 만들어내더니, 가볍게 허공으로 흩어버렸다. 사람들은 탄성을 지르며 재차 박수를 보냈다. 누구도 지금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혹은 누구도 저 불가사의한 힘이 정부가 갖춘 만반의 준비태세를 뚫어낼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 듯했다.

- 그나저나 박봉팔님은 어떻게, 액수가 모자랐던 걸까요?

- 돈이야 그만하면 됐죠. 사실 0이 그쯤 붙으면 앞자리 숫자 달라지는 게 무슨 상관인가 싶습니다.

- 그러면 설마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시는 중입니까?

그는 내가 돌아섰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 그 여자가 착각하는 게 있는데, 박봉팔님도 알아두셔야 할 겁니다. 인류의 미래라는 공동선은 단 한 번도 박봉팔님 개인의 선과 일치한 적이 없습니다. 그 여자는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쁜 외모를 타고나서 큰 어려움 없이 부와 명예를 독차지했죠. 하지만 박봉팔님은 어땠습니까? 부모 잘 만나 출세한 놈에게 가축 이하의 대접을 받을 때, 그곳에 인류애라는 게 존재하던가요?

- 확실히 제 전 직장의 근무환경이 좋지 않긴 했죠.

- 감히 충고 드립니다만, 조직의 선과 개인의 선을 분리하시는 게 좋습니다.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게 박봉팔님의 몫이 아니듯이, 안경원숭이를 복원하는 것도, 멸종해가는 고래를 걱정하는 것도 박봉팔님의 몫이 아닙니다. 그런 건 등 따시고 배가 부른 후의 일이죠.

- 제겐 그렇게 거창한 대의가 없습니다만.

- 그렇다면 역시 여자가 문제겠군요.

- 글쎄요.......

나는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눈물을 흘리던 소미를 떠올렸다.

그때 그녀와 나 사이에 특별한 유대감이 형성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썸도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두 환생자가 서로의 인간성에 대해 재평가하는 계기가 됐을 뿐.

-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그 여자가 사랑한다는 말을 지금까지 몇 명의 남자에게 했을 것 같습니까?

- 셀 수 없이 많겠죠.

- 예,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아이돌이라는 직업이 그렇습니다. 노래와 춤을 앞세우지만, 본질은 사람들에게 연애와 유사한 감정을 일으켜서 다양한 파생상품을 팔아먹는 데 있습니다. 그 여자는 그 일을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잘했습니다. 아이돌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아이돌이었죠. 덕분에 수많은 청춘들이 사랑이라는 미망에 휩싸여 가족도, 직장도, 미래마저도 도외시한 채 길바닥을 전전하고 있습니다.

방금 그 대사는 녹화를 떠서 사생이란 것들에게 들려주고 싶네.

- 저도 그러면 질문을 좀 드리죠.

- 예.

- 이렇게까지 절 설득하는 데 공을 들이시는 이유가 뭔가요?

- .......

그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그것을 허를 찔렀다는 신호로 해석했다.

- 저는 이제 당신이 누군지 압니다. 그렇지만 의문은 더 커졌을 뿐이죠. 왜 당신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당신만의 게임을 계속하는 걸까요? 거슬리는 건 개미처럼 그냥 짓밟아버리면 그만이잖습니까. 저 하나를 설득하는 게 그 모든 수고로움을 감수할 정도로 당신에게 가치가 있는 일인가요?

- 저를 안다고 하셨지요.

- 예.

- 거기에 답이 있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그는 할 말을 마치자 휴대폰을 내던져버렸다. 이윽고 방대한 마력이 드넓은 회장에 풀어지기 시작했다. 공기가 무거워지는 걸 마법사가 아닌 사람들조차 느낄 정도로 마력의 밀도가 높았다.

“대단하군요.”

곁에서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범영 과장이었다.

“누차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마법사라는 건 실로 불가해한 존재인 듯합니다. 그야말로 인간이라고 부를 수가 없는.......인간이 맞긴 한 걸까요?”

“아니오.”

나는 잘라 말했다.

“아약님은 인간이 아닙니다.”

“과연.......”

이범영 과장은 내 말을 대수롭잖게 흘려들었다. 그는 아약이 에신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족 중 하나이겠거니 하고 넘긴 듯했다.

쿠구구구구.......

단상에 설치된 꽃봉오리 형상의 구조물이 개화하듯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저 구조물이 완전히 개화됐을 때가 포탈이 열린 때였다. 엄청난 양의 마력이 투입되고 있는데도 구조물은 굼벵이가 기는 것처럼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이쯤에서 나는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오후 세 시.

나는 긴장을 풀기 위해 두 주먹을 반복해서 쥐었다 폈다. 나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긴장하는 중이었다.

도처에 무장병력, 곳곳에 CCTV.

긴장이 되지 않는 게 이상하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범영 과장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문득 그의 양복이 평소 입던 게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얼핏 보기에도 때깔이 다른 게 새로 산 옷이 틀림없었다.

“옷을 사셨네요.”

“집사람이 아침부터 빼입고 가라고 성화를 부려서, 하하.”

“아내분을 사랑하시나요?”

그는 무슨 그런 질문이 다 있느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물론입니다.”

“그러면 절대 고개를 들지 마시길.”

“예?”

“지금부터, 누군가는 죽습니다.”

발치에서 돋아난 그림자가 내 몸을 타고 올라와 얼굴에 새카만 음영을 만들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더니, 괴상한 비명소리와 함께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누차 말하지만, 인간을 죽이는 건 상상력이다.

“저는 그게 과장님이 아니길 바랍니다.”

나는 진심을 담아 그에게 경고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