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6화 (6/205)

6화. 엇갈린 선택 (6)

“이제 이틀 남았군요.”

이범영 과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널찍한 방 안에 에신1과의 직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여러분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음으로 딛게 될 한 걸음은 닐 암스트롱 이후 인류가 내딛은 가장 위대한 걸음이 될 겁니다!”

그가 소주잔을 앞으로 내밀자, 모든 사람이 잔을 테이블 중앙으로 모았다.

“인류의 진보를 위하여!”

“위하여!”

나는 팀원들과 잔을 부딪친 후 소주를 목구멍 안으로 단숨에 털어 넣었다. 뜨거운 기운이 식도를 불태우며 뱃속 깊이 흘러들어갔다.

크으으.

싸구려 증류주와 기름진 돼지고기의 조합.

이 맛을 위해 환생한거지, 환생이 별거냐.

잔이 여러 순배 돌자 분위기가 한층 달아올랐다. 목청껏 떠드는 사람이 많아서 집중하지 않으면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조차 듣기 어려웠다.

“재밌게 즐기고 계신가요?”

아약이 곁에 앉으며 친근하게 물었다. 그는 이미 취한 듯이 얼굴이 벌겋게 물들어있었다.

“예, 덕분에.”

“무슨 말씀을. 저야말로 박봉팔님 덕분에 시름을 덜겠는데요.”

그는 의뢰를 받아달라며 우회적으로 시위하는 중이었다. 나는 못 들은 척 다른 걸 물어보았다.

“아약님께선 혹시 에신에서도 소설을 쓰셨습니까?”

“아뇨, 관심은 있었지만.”

“그럼 어쩌다 작가가 되신 겁니까?”

“저야말로 왜 작가를 안 하셨는지 묻고 싶은데요.”

“예?”

“현대 지구인에게 에신이란 곳은 판타지적 공상 그 자체니까요. 우리가 살았던 삶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게 여기서는 설정이 되고 스토리가 된다는 거죠.”

“그게 그렇게 되는군요.”

“물론 이틀 후면 공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말겠죠. 놀라 자빠질 얼굴들을 상상만 해도 즐겁습니다.”

그가 짓궂게 웃었다. 나는 그를 따라 미소 짓다가, 문득 그의 잔이 비어있는 걸 보았다.

“한잔 받으시죠.”

“감사합니다.”

“건배사는 이렇게 합시다.”

나는 그에게 몸을 기울이며 조용히 속삭였다.

“인류의 밝은 미래를 위하여.”

그는 똑똑한 사람이니 이 건배사가 어떤 의미인지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밝은 미래를 위하여!”

나는 이번에도 단숨에 잔을 비워버렸다. 술이 슬슬 단맛을 내고 있었다.

“자랑은 아닙니다만, 전 사람 보는 눈이 있어요. 박봉팔님을 처음 봤을 때부터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다 싶은 감이 왔습니다. 저를 택한 걸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현세의 부귀와 미래의 영화를 함께 누리게 되시리라 장담합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이번엔 제 잔을 받아보시죠.”

나는 그가 소주병을 기울일 때, 무심한 목소리로 지나가듯 말했다.

“참,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뭐든지요.”

“왜 소미씨에게 직접 손을 쓰지 않으신 거죠?”

“......”

그는 같은 질문에 또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의 얼굴주름의 변화, 눈썹의 떨림, 솜털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암살자는 인상훈련이라는 걸 받는다. 미세한 근육의 변화를 감지하여 인간의 심리를 읽어내는 훈련이다.

현생에서 이 훈련이 도움이 됐던 건 아침마다 부장 심기를 체크할 때뿐이었다.

두려움?

...혐오?

“좋습니다, 이젠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제가 말씀드렸죠. 그 여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거라고.”

“예.”

“혹시 이런 생각은 해보셨나요. 에사인이 이미 지구로 넘어와 있다는 겁니다. 강력한 고대의 영이 아름다운 소녀의 탈을 쓴 채 우리 사회를 활보하고 있고, 다른 경쟁자가 유입되는 걸 막기 위해 프로젝트를 방해하려 든다는 거죠.”

그는 지금 소미가 에사인이라고 주장하는 중이었다. 흥미로운 발상이지만, 그러려면 설명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증거가 있습니까?”

“증거요? 그토록 기를 쓰고 저를 죽이려고 드는 게 증거가 아니면 뭐겠습니까. 제가 죽어서 이득을 보는 사람이 대체 누구겠나요?”

심증뿐이라는 거네.

참고로 나는 밤잠을 줄여가며 음침한 변태놈의 기록물을 분석했다. 덕분에 소미의 속옷취향, 고물상을 뒤적이는 취미, 골목길에서 양아치 몇 명을 때려눕혔던 일 등 쓸데없는 정보는 낱낱이 꿰게 되었지만, 난잡한 사생활이나 음험한 취미 따위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럴 분이 아니라고 믿습니다만, 그 여자의 아름다운 외모에 흔들려선 안 됩니다. 아시다시피 에사인은 직접적으로 힘을 쓰는 걸 선호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뒤에서 조종하고, 이간질하고, 반목하게끔 만들죠. 그들에게 놀아나지 않으려면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 말은 맞는 소리였다. 에사인은 직접적으로 힘을 쓰는 걸 선호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의 운명을 원하는 방향으로 틀어놓음으로서 자신들의 우월함을 만끽하곤 했다.

정말로 그녀가 에사인이라면, 나는 어디까지 끌려들어와있는 걸까.

술자리가 파했다. 팀원들은 차를 타거나 택시를 잡아 하나둘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나와 정기호 선수였다. 그는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사람처럼 안색이 멀쩡해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가 안주를 저만치 밀어버리고 말술을 들이붓던 모습을 똑똑히 봤었다.

“태워드려요?”

그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두툼한 손가락에는 스포츠카의 키가 걸려 대롱거렸다.

“먼저 가시죠. 저는 만날 약속이 있어서.”

“2차 뛰시나요?”

“3차도 갈지 모릅니다.”

“내일이 그 날인데도 박봉팔님은 무척 바쁘시군요.”

“포탈이 열려도 삶은 흘러가니까요.”

“.......”

그가 탐색하듯 나를 아래위로 훑었다.

꿈틀.

엄지손가락이 또 떨린다.

그가 발산하는 투기는 세상에 순응하려는 나를 사정없이 낚아채 시체가 나뒹굴던 오데르의 흙구덩이로 처넣었다. 똑같이 환생해 똑같은 나라에서 살았는데도 그는 이쪽 세계와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것 같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그가 점점 멀어져갔다.

나는 홀로 남겨지자 손목시계를 들어 시간부터 확인했다.

새벽 두시 사십오분.

술에 떡이 된 취객 말고는 사람 그림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나는 새벽공기에 숨결을 불어넣으며 무료하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정각 세 시가 되자, 선팅을 두껍게 한 승용차가 다가와 길가에 멈춰 섰다. 나는 얌전히 선 채 차창이 충분히 내려가기를 기다렸다.

“타세요.”

나는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본 뒤 차에 올라탔다. 왠지 그 사생인가 뭔가 하는 소름끼치는 놈이 훔쳐보고 있을 것 같아서.

“우, 술 엄청 드셨네요.”

소미가 엄지와 검지로 코를 가볍게 쥐었다.

“두 병쯤 마셨습니다.”

“죄송해요, 창문 좀 열게요. 저는 알콜 근처만 가도 어질어질해서.......”

“술이 약하신가봅니다.”

“마셔본 적도 없어요. 회사에서 못 마시게 했거든요.”

“성인인데 술도 못하게 하나요?”

“아뇨, 마시지 말라고 한 건 연습생일 때에요. 근데 너무 잔소리를 듣다보니 지금도 마시면 죄 짓는 기분이 들 거 같아요.”

“그렇군요.”

정기호와 달리 소미는 이쪽 삶에 완전히 적응한 듯했다. 사람이라는 게 그렇다. 금방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고, 흘러간 건 금세 또 잊어버린다. 프로젝트만 없었다면 나도 암살자고 나발이고 평범하게 살다 갔겠지.

“갑자기 보자고 하셨을 땐 깜짝 놀랐어요. 하필이면 그때 개인방송중이었거든요.”

“사실 언제쯤 연락을 드리는 게 좋을지 갈피를 못 잡고 있습니다.”

“언제든지요. 새벽에 메시지 보내셔도 돼요. 어차피 세상이 망하면 아이돌 노릇도 못하는걸요.”

그녀는 말해놓고 자기가 웃긴지 피식 소리를 내었다.

“지난번에 주신 제의를 깊이 생각해봤습니다.”

“네.”

소미가 운전대를 쥔 채 고개만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희미한 불빛 속에서도 그녀의 실루엣은 가위로 오려낸 듯이 뚜렷했다.

시원스레 뻗은 허벅지, 구불구불한 머리카락, 도톰한 아랫입술.......

- 그 여자의 아름다운 외모에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약의 당부가 뇌리를 스쳐갔다. 장담하건대 그는 이런 절세미녀와 단 둘이 밀폐된 공간에 있어보지 못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저도 소미씨의 우려에 공감합니다.”

“정말요?”

“그 전에 확인하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습니다. 가급적 솔직히 대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그럴게요.”

“아약님을 죽여 달라고 의뢰한 사람이 저 하나뿐인가요?”

“네.”

그녀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녀의 표정에서 읽어낼 수 있는 건 한 점의 흔들림도 없는 단호함이었다. 저게 연기라면 아카데미상도 탈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환생자 여러 명이 사망한 일이 있었다는데, 그건 소미님과 무관합니까?”

“알고 계셨네요.”

그녀가 놀란 듯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얼마 전에 들었습니다.”

“네, 정말 끔찍한 일이죠. 제가 아약님을 멈춰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이유가 그것 때문이에요. 저는 아약님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믿고 있거든요.”

“증거가 있나요?”

“아니요, 형사님들도 범인을 알아낼 만한 단서가 전혀 안 나왔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증거가 없는 게 곧 증거라고 생각해요. 다섯 명을 죽이고도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는다는 건 마법사나 가능한 일이잖아요.”

“그렇다면 아약님은 굳이 왜 나서서 살인을 해야만 했던 걸까요? 그분은 프로젝트가 계속되길 간절히 원하잖습니까. 그러려면 최대한 그런 잡음이 나지 않아야 좋을 텐데요.”

“저도 그 점이 의문이었어요. 형사님들이 외교부 건물 안까지 들어와서 탐문을 벌이고 다니니까 팀 분위기가 뒤숭숭해졌죠. 저는 아약님이 왜 그런 무리수를 뒀을지 계속 고민하다가, 최근에 꽂히게 된 생각이 있어요.”

“뭐죠?”

“저는.......”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고 한 차례 심호흡을 했다.

마치 뭔가가 가슴 언저리에 걸려있는 것처럼.

“저는 어쩌면 에사인이 이미 지구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상상을 했어요.......그래서 다른 에사인도 불러들이기 위해 포탈을 열려고 드는 건 아닐지.......저는 아약님이 조급해하는 이유를 정말 모르겠거든요. 사실 저희는 굳이 포탈을 잇지 않아도 괜찮잖아요? 대한민국이 에신보단 훨씬 살기 좋은 나라잖아요.”

“아약님이 에사인이라고 주장하시는군요.”

“네, 확신하진 못하지만요.”

“알겠습니다.”

나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의 장난인지, 두 사람은 서로 죽여 달라고 의뢰한 것도 모자라 서로가 에사인이라고 주장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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