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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5화 (5/205)

5화. 엇갈린 선택 (5)

나브니는 쾌락을 관장하는 에사인이다. 나브니의 신도들이 추구하는 쾌락이란 글이나 말로는 묘사가 불가능할 정도로 음탕했다.

지구의 미래를 위해 간절히 염원하던 그녀의 모습에서 그런 음탕함을 떠올린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으나, 나브니의 신도들이 노리는 게 바로 그런 선입견이었다.

- 증거가 있으신 건 아니겠고.

- 그렇습니다만, 그 여자가 저를 죽이려고 드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가만히 당해줄 순 없는 노릇이니 저도 이쯤에서 행동에 나서볼까 합니다.

- 어떻게요?

- 두 배를 드리죠.

그는 뭘 해달라는 건지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았고, 나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 경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다 무마해드리겠습니다. 감히 계량할 수조차 없는 국익 앞에서 연예인의 목숨 따위는 사소한 일이 될 테지요.

- 그럼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 예.

- 지금껏 왜 직접 손을 쓰지 않으신 겁니까?

그는 마법사다. 내가 알기로 마법사란 사람을 죽이거나 괴롭힐 기회를 마다하는 족속들이 아니었다.

- ........

잠시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 그 문제는 계약이 성사된 후 말씀드리죠.

- 그러면 저도 며칠 고심을 해보겠습니다. 혹시 사람이 구해진다면 다른 분께 의뢰를 하셔도 됩니다.

나는 그에게도 소미와 같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일단 최대한 간을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똥인지 된장인지는 알아보고 입질을 해야 할 거 아니냐.

- 노파심으로 당부를 드립니다만, 포탈이 열리는 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입니다. 설령 제가 죽는다한들 제2, 제3의 아약이 나타나 같은 요구를 이어갈 겁니다. 그 점을 고려한다면 결정하시는 데 어려움이 없으실 테죠.

통화가 끝났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대화에 집중하느라 어딘지도 모를 골목까지 흘러들어와 있었다.

요 며칠간 내 머릿속은 온통 핑크빛이었다. 사람들은 훈훈했고, 프로젝트는 순항할 듯 보였다.

순항은 개뿔, 콩가루도 이런 콩가루가 없네.

주술사와 마법사가 시간차로 암살의뢰를 넣는 거 실화냐고?

“.......”

관자놀이가 지끈거려왔다.

아름다운 아이돌이냐, 잘나가는 웹소설 작가냐.

세계의 멸망을 막을 것이냐,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추구할 것이냐.

먼저 따져봐야 할 건 신뢰였다. 뒤가 구린 놈에게 의뢰를 받았다가 황천으로 간 동료가 부지기수였다. 특히 주술사나 마법사처럼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인물일수록 암살자와의 약속을 가볍게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아약의 주장대로라면 소미는 원만한 아이돌 활동을 위해 사람을 죽이려는 사이코였다. 본인의 신앙을 숨긴 채 문란한 사생활을 즐기는 건 덤이겠고.

그건 밝혀내기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 야, 이상민.

- 투표했냐?

- .......첫 마디가 그거냐.

- 투표했냐고.

- 했다. 득표율 보니까 굳이 내가 안 찍어줘도 1등 하겠던데.

- 오디션 만만하게 보지 마라. 너 같이 안일한 새끼들 때문에 우리 유진이가 패자부활전까지 내려갔다온 거야.

- 알았으니까 뭣 좀 물어보자.

- 뭐?

- 연예인 사생활 터는 법.

- .......

친구야, 충격을 받고 말았구나.

나도 내가 이런 걸 묻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단다.

- 뭐냐, 갑자기? 니가 연예인 사생활을 왜 털어?

- 그냥 순수한 호기심이라고 해두자.

- 호기심? 너 사생짓이 불법이라는 거 모르냐?

- 사생? 사생이 뭔데?

- 뭐긴 뭐겠냐, 너처럼 연예인 신상 터는 스토커새끼들이지.

-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기에 불법 소리까지 듣냐?

- 전화번호 알아내서 시도 때도 없이 스팸하기, 외출할 때 택시 타고 미행하기, 해외 나갈 때 비행기 옆좌석 끊어서 따라다니기, 우편으로 생리대 보내기, 아는 척 안 해주면 자해한다고 협박하기, 숙소 옆집에 세 들어서 감시하기, 자주 다니는 골목에 CCTV설치하기, 차량에 GPS 추적기 달아놓기...

- 그만하면 됐다. 대충 알겠네.

- 한 마디로 미친놈들이다. 연예계 공공의 적이랄까.

- 어딜 가면 그런 미친놈을 만날 수 있냐?

- 그야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 주변을 맴돌고 있겠지. 그런데 봉팔이 너, 설마 우리 유진이한테...

- 정보 고맙다. 나중에 투표할 일 있으면 또 도와주마.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후욱....... 후욱.......

값비싼 옷을 입은 이십대 청년이 무릎을 꿇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듣고 있노라면 굉장히 거슬리는 숨소리였다.

“그러니까 네가 바로 사생이라는 놈이로구만?”

그가 움츠러들자, 두 겹으로 접힌 턱살이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인간을 죽이는 건 상상력이다.

나는 그를 겁주기 위해 거창한 짓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림자를 짙게 만들어 후드 안이 어둠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여줄 뿐이었다.

물론 외진 곳으로 끌고 오느라 뒤통수를 몇 대 때리기도 했고, 닥치고 조용히 있으라고 협박도 조금 했던 것 같다.

“몇 살이냐?”

“스, 스물넷요.”

“직장은?”

“안 다니는데요.”

“부모님은 네가 이러는 거 아시나?”

“........”

“대답해야지.”

“엄마아빠는 일하느라 바쁘세요. 저는 휴학하고 쉬는 중이고요.”

“혹시 네가 사라진다면 슬퍼해줄 사람이 있을까?”

“제, 제발 살려주세요, 돈이라면 얼마든지 드릴게요...!”

그가 두 손 모으고 싹싹 빌기 시작했다.

죽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기는 했다.

아까부터 이놈의 디지털 카메라 앨범을 살펴보는 중이었는데, 앨범의 절반이 소미의 무방비한 모습을 도촬한 사진이었다.

“돈은 됐고, 소미에 대해 아는 걸 다 불어봐.”

“네? 소미에 대해서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어, 어디서부터 말씀드릴까요?”

“생각나는 것부터.”

“제, 제가 소미와 처음 만났던 건 십년 전, 그 애가 연생일 때부터였어요. 소미는 그때도 무척 눈에 띄는 아이였어요. 데뷔를 한 선배들보다 더 빛이 난다고 느낄 정도로요. 그때만 해도 제가 본진이 따로 있어서 입덕은 조금 늦었는데요...”

“잠깐.”

“네?”

“한국말로 좀 해라. 너희들만 알아듣는 이상한 용어 쓰지 말고.”

“앗, 죄송합니다.”

이놈도 이상민과 비슷한 과였다. 연예인 얘기를 시작하니까 언제 두려움에 떨었냐는 듯 뺨에 혈색이 돋았다.

“제가 소미와 처음 만났던 건 십년 전인데요. 기획사에는 연습생이라는 제도가 있거든요...”

“야.”

“네?”

“일어서, 발목 나가겠다.”

“고맙습니다.”

그가 두 다리를 딛고 똑바로 섰다. 그 정도 운동량만으로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대체 이런 건강상태로 스토킹이라는 게 가능한지가 의문이었다.

“우선 남자관계에 대해서만 읊어봐. 다 듣다간 밤 샐 거 같으니.”

“혹시 소미가 소문이 좋은 편이 아니라는 건 알고 계신가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애가 밤마다 몰래 남자들을 만나고 다니긴 해요. 그것 때문에 저희끼리 싸움이 벌어진 적도 있어요. 스폰을 한다, 몸으로 로비를 한다, 아시죠? 기레기들이 소설쓰기 딱 좋은 소재잖아요. 저는 소미를 끝까지 믿었지만, 주둥이로만 팬이라고 떠들던 애들은 많이 떠났죠.”

“끝까지 믿은 이유는?”

영혼이 없는 질문이었다. 오죽 좋아서 그랬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그의 반응이 특이했다. 갑자기 콧김을 내뿜으며 눈을 음침하게 희번덕거렸다.

“왜냐하면 저는 진실을 알고 있거든요.”

“진실? 그게 뭔데?”

“제 사랑의 징표요.”

“뭐?”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우리 둘만의 소중한 비밀이에요. 제가 비밀을 간직하는 한 그 애는 제꺼인 거죠.”

두 번 듣고 나서야 내 청력이 정상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비위가 좋은 편이라고 자부했다. 그런데 방금 어떤 생리적인 혐오감이 등골을 타고 올라갔다.

사생이란 실로 여러모로 용한 존재였다. 주술사를 도촬하질 않나, 암살자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질 않나.

“그냥 죽일까?”

무의식중에 혼잣말이 나오고 말았다.

“마, 말씀드릴게요! 죽이지 마세요!”

포기는 빨랐다. 그는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저어댔다.

“말씀드릴게요. 비밀은 그 애의 생리주기에요. 생리주기랑 맞춰보면 이상한 이유로 남자들을 만나고 다니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어요.”

“니가 소미 생리주기를 어떻게 알아?”

“그야 쓰레기통도 뒤져보고...”

“아니, 됐다. 듣고 싶지도 않다. 아무튼 아니라는 거지?”

“네.”

“잠시 자고 있어라. 때가 되면 풀어질 테니.”

“아, 아저씨, 아, 앞이 안 보여요!”

“그래, 안 보이라고 이러는 거야.”

나는 그림자를 일으켜 그의 눈을 가렸다. 내친김에 입까지 틀어막았다. 이 정도가 지금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술법의 한계치였다.

“읍, 으읍....!”

“그리고 네가 모은 자료들은 모조리 압수다. 혹시 경찰 부르던가 해서 귀찮은 일 만들면 너만 독박 쓴다는 거 명심하고.”

“읍, 으읍, 으으읍......!”

나는 그의 메모리카드와 노트, 다이어리 등을 챙긴 뒤 건물을 걸어 나왔다.

오데르와 연결이 끊어진 상태라 간단한 포박술을 유지하는 것도 숨이 찼다. 몇 분 후엔 놓아주어야 할 듯했다.

사실 정말로 고역인 건 술법을 유지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제부터 변태놈이 쓴 한 무더기의 기록물을 읽어나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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