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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4화 (4/205)

4화. 엇갈린 선택 (4)

“하지만 아약님은.......”

“알아요, 그분이 없으면 프로젝트가 성립 안 된다는 거.”

그녀가 선글라스를 코 아래로 슬쩍 내렸다. 검은 눈동자가 조명을 담아 음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서 죽여 달라고 부탁드리는 거예요. 저는 이 프로젝트가 망해야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5억 드릴게요. 선금으로.”

그녀가 검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성공하시면 십오억 더.”

이번에는 중지와 엄지를.

“구구절절 이유를 설명드리진 않을게요. 한다고만 해주시면 곧장 현찰로 오억을 드려요.”

아이돌이 돈을 잘 벌기는 하는가보구나.

그게 내 첫 번째 생각이었다.

둘째로는 이거 잘못 먹었다간 탈나겠다는 거.

환생한 후 나는 한 번도 살인을 저질러본 적이 없었다. 부장이 여름휴가를 이유없이 잘랐을 때도, 여직원 세 명 앞에서 정강이를 걷어찼을 때도, 산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옷 위에 오바이트를 했을 때도.

세금 꼬박꼬박 내고, 재활용 따박따박 하고, 나는 지금껏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왔다.

이십억이라고?

그게 내 자부심의 값이라는 건가?

.......마구 흔들리는 양심으로 보아 제대로 측정한 거 같긴 한데.

“이쯤 되면 궁금해집니다만, 왜 그렇게까지 아약님을 죽이려는 겁니까.”

“혹시 금액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돈 문제가 아닙니다. 돈만 보고 사람을 죽이고 다녔을 것 같으면 지금쯤 제가 있을 곳이 여기가 아니라 교도소 독방이었겠죠. 어, 이렇게 말씀드릴게요. 저는 기왕이면 그 사람에게 죽어 마땅한 이유가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아동성폭행이라던가?”

“아하, 양심의 가책을 느끼시는군요.”

그녀가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해했다.

오데르의 신도 이미지가 딱 그 정도니까.

“공교육의 힘이죠. 윤리 만점을 놓쳐본 적이 없습니다.”

“알겠어요. 박봉팔님께는 이유를 말씀드리는 게 낫겠네요.”

그녀는 잠시 동안 침묵했다.

나는 그녀의 붉은 입술이 열릴 때까지 상상의 나래 속에서 허우적댔다. 초특급 아이돌이 살인을 의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업?

치정?

그것도 아니라면.......

“저는 이 나라가 좋아요.”

그녀가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저는 지구를 열린 세계라고 표현해요. 아직 지구는 젊고 가능성으로 충만해있죠. 특별한 일이 없다면 우리의 후손은 우리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거에요. 하지만 에신은 닫힌 세계에요. 에신을 살아가는 자들은 더 나은 삶을 얘기하지 않아요. 오직 더 강한 힘만을 추구할 뿐이죠. 에신은 에사인을 잉태하는 데 모든 잠재력을 써버렸어요.”

에사인.

그 이름을 여기서 듣게 될 줄이야.

한국어엔 정확히 대응하는 어휘가 존재하지 않으나, 비슷한 표현으로는 ‘강력한 영’이나 ‘위대한 존재’쯤이 있겠다. 내가 섬기는 오데르도 에사인의 일종이었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법이라는 이름의 힘으로 간신히 유지되고 있어요. 그 힘을 넘어서는 힘이 나타난다면 세상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 거예요. 마법사의 변덕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세상. 우린 한 번 그런 세상을 살아봤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에사인은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위험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쪽 세계의 장점인 마법과 이쪽 세계의 기술력을 합칠 수만 있다면 엄청난 시너지가 발생할 겁니다. 난치병을 정복하고, 수명이 늘어나고, 인류가 일찍이 가보지 못했던 새로운 시대가...”

“알아요, 새로운 시대가 열릴 거라고. 아약님이 외교부 공보물에다 쓰신 선전문구죠. 그런데 정말로 모든 일이 뜻대로만 흘러갈 거라고 자신하시나요?”

“장담할 순 없긴 하죠.”

“지금이라면, 단 한 사람의 희생으로 모든 걸 막을 수 있어요.”

“대화는 해보셨습니까? 아약님과?”

“소용없었어요. 그 사람은 이 일에 목숨을 걸었어요. 며칠 후면 포탈을 열 텐데, 그전까지는 결단을 내리셔야해요.”

그녀가 나를 종용했다.

그러나 나는 선뜻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에사인이 위험하다는 주장엔 공감하지만, 그 외의 이야기는 그녀의 추측일 뿐이었다.

게다가 상대가 마법사라는 것도 걸리는 점이었다. 에신의 마법사는 창작물에서 흔히 묘사되는 불 쏘고 얼음 던지는 핫바지들과는 격이 달랐다. 개인에 따라 수준차이가 있겠으나, 강력한 마법사는 물리적인 영역에 힘을 미치는 걸 넘어서서 추상적인 개념을 통제하는 것마저 가능했다.

“아약님이 마법사라서 망설여지신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으세요. 그 사람이 아무리 강하다고해도 포탈을 여는 순간에는 무방비상태일 테니까요.”

그녀가 내 마음을 읽은 듯이 덧붙였다.

“지금 확답을 드리긴 힘들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며칠 더 고심을 해보겠습니다.”

“부디 올바른 결단을 내리시길 바랄게요. 칠십억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그녀가 두 손을 모으며 간절하게 말했다. 나는 새삼 그녀의 외모가 껍데기일뿐임을, 안에는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을 살아왔을 주술사가 깃들어 있음을 실감했다.

바깥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일단 좀 걸어보기로 했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정리하는 데 시간이 걸릴 듯했다.

우선, 나는 암살의뢰를 받았다. 탑클래스 아이돌이자 직장동료인 소녀로부터. 타겟은 같은 직장에 다니는 한 소설가였다.

액수를 크게 부르긴 했으나 실은 돈은 중요치 않았다. 돈이야 제때 고기를 구워먹을 수 있을 정도로만 벌어도 충분했다.

문제는 명분이었다. 나는 정당한 사유가 존재할 경우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생의 가치관중에서 아직 사회화가 덜 된 부분이었다. 정말로 포탈 때문에 세계가 멸망할 수 있다면, 그건 정당한 사유에 해당되었다.

- 띠리리리리.

상념에 빠져 한참을 걸었을 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 전화도 결코 평범하지 않으리라는 걸 예감했다.

- 발신인 : 아약

나는 우선 뒤부터 살펴보았다.

홍대 거리는 비가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느 때처럼 붐비는 중이었다. 우산 때문에 일일이 얼굴을 확인할 순 없었으나 소미가 따라오지 않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 안녕하십니까.

- 안녕하신지요, 박봉팔님.

- 어쩐 일이신지요?

- 얼마 부르던가요? 그 여자가.

아약이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질문을 받는 순간 골치 아픈 일에 끼어들었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는 내가 소미에게 의뢰를 받았을 거란 걸 예측했다. 그것은 두 사람을 둘러싼 갈등이 내 예상보다 훨씬 깊고 오래됐음을 말해주었다.

-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지막으로 저를 죽이려 들었던 자가 삼억이었습니다. 박봉팔님은 유능하시니 그보다 더 받으시겠죠.

- 암살의뢰가 처음이 아니십니까?

- 제가 죽어야 끝나는 일이니까요.

- .......

어이가 없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암살의뢰가 난무하고 있었을 줄이야.

뭐야, 나만 얌전하게 살았던 거야? 나만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라야한다고 생각했나?

- 놀라셨나보군요.

- 아무래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

- 그러면 박봉팔님께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더 드리겠습니다. 혹시 그 여자가 절 죽이려는 이유도 말해주던가요?

- 예.

- 뭐라고 합니까?

- 에사인 얘기를 하더군요.

- 아, 눈물 나는 이야기죠. 지구를 구하는 영웅이 되어달라고, 맞습니까? 너무 식상한 레파토리라 요새는 소설도 그렇게 쓰면 말아먹습니다. 작가인 제가 보증합니다.

- 에사인이 위협적이지 않다는 말씀이십니까?

- 물론 타락한 에사인이 위험할 순 있습니다. 인류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위협이긴 해요. 하지만 위협은 어디까지나 위협일 뿐이고, 지고 이기고는 다른 얘깁니다. 인류가 정말로 작심하고 전쟁을 일으킨다면 에신이란 행성을 내핵까지 쪼개버릴 수 있습니다. 왜 세계대전이 다시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인류가 가진 무기의 위력이 너무 강력해서 더 이상 지구에서는 싸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낙관적인 이야기였다. 내 머릿속에는 에신이 무방비하게 핵무기를 맞는 장면이 잘 그려지지 않는데, 전문가들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 어쨌건, 전쟁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얻는 건 적고 피해는 큽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 우리측 협상전문가들이 충분히 그쪽을 설득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 소미씨의 의견과는 상당히 다른 견해로군요.

- 그건 그 여자가 아이돌이기 때문입니다.

- 예?

- 생각해보십시오. 그 여자는 주술사를 자처하면서도 본인이 어떤 에사인을 섬기는지는 한 번도 밝힌 적이 없습니다. 박봉팔님이 오데르를 따른다고 거리낌 없이 말씀해주신 것에 비하면 수상쩍기 이를 데 없는 행동이죠.

- 오픈해서 좋을 게 없는 정보이긴 합니다만.

나는 소미를 변호해주었다. 내가 오데르의 신도임을 밝힌 이유는 배째라정신의 산물이었다. 이미 이범영 과장에게 암살자라는 사실을 실토했던 터라, 숨겨봤자 소용없겠다는 판단도 있었고.

- 물론 그렇습니다만, 만약 그 여자가 섬기는 에사인이 나브니라면 어떻겠습니까? 현생에서 쌓은 커리어가 완전히 박살나지 않겠습니까?

- 전생 때문에 현생의 커리어가 박살난다고요?

- 아이돌 팬덤의 극성맞음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에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 여자가 나브니의 사제였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죽기보다 포탈이 열리는 걸 더 싫어하는 이유가 뭐겠나요? 엔터테인먼트 업계 어디에도 창녀가 설 자리는 없기 때문이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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