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엇갈린 선택 (1)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물론 세상에는 아무 짝에 쓸모없는 정보도 존재했다. 나는 여전히 먹고 살기 위해 출근을 해야 하는 몸이었고, 로또는 들어맞지를 않고, 컵라면은 뜨거운 물을 붓기 전엔 스스로 익지 않았다.
말해서 뭣하겠냐만 셋 중 가장 엿 같은 일은 첫 번째였다. 새파란 부장놈에게 털릴 때마다 나는 전생에서 지은 죄를 한 가지씩 반성중이었다.
- 박봉팔씨, 지금 나영씨가 출근해서 잔업처리중인 거 알고 있어요?
- 모르고 있었습니다.
- 팀장이 모르면 누가 압니까? 서로 챙겨주라고 팀을 만들어놓은 거 아닙니까?
- 죄송합니다.
- 나는 박봉팔씨 같은 사람이 신기해요. 그런 식으로 일하면서 월급은 따박따박 잘도 받아간다는 게. 혹시 밥 먹다 체하고 그러지 않아요? 염치라는 게 있으면 그럴 거 같은데.
- 죄송합니다.
- 죄송만 한가봐요?
- 곧장 출근하겠습니다.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더라.
........진짜 세 번이면 되는 거 확실하지?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세상에서 살 때는 말을 하기 전에 상대의 무력부터 가늠해야만했다. 상대가 날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입을 닥쳐야하고, 그렇지 않다면 무슨 말을 해도 좋았다. 최소한 내가 아는 한 나는 부장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상상 속에서.
주말출근 강요죄를 시급히 입법해야 한다.
골통을 깨도 정당방위가 성립하도록.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굼벵이처럼 느릿느릿하게 침대 밖으로 기어 나왔다. 일어나고 나선 우선 인덕션에 주전자부터 올려놓았다. 출근을 하긴 해야 할 모양이다만 빈속으로 나가긴 싫었다.
아침 메뉴는 컵라면으로 결정되었다. 어제 저녁에 먹은 것도 컵라면이었고 그제 저녁도 컵라면이었던 듯하지만, 컵라면의 장점은 남들이 메뉴를 고민할 시간에 젓가락질을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개 같은 부장새끼.
낙하산타고 입사한 주제에 주둥이만 살아가지고는.
성질 같아서는 확 그냥,
어휴,
콱 저질러버려?
후......
- 띠리리리.
나는 화들짝 놀라며 휴대폰을 쳐다보았다.
이것이 시스템에 길들여진 인간의 비애였다. 한 번 시스템의 일부가 되고 나면 시스템이 부여한 권위가 의식을 좌우하게 된다. 아무리 신체적으로 강하다한들 부장은 포식자이고 나는 겁 많은 초식동물에 불과했다.
일단 부장은 아니었다. 모르는 발신인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평소 같으면 안 받아야 옳았다.
실제로 난 받지 않으려고 했다. 기분도 꿀꿀하고 갈 길은 멀었다. 그런데 이놈의 전화가 도대체 끊어질 줄을 몰랐다.
“누구십니까.”
나는 수신버튼을 누른 뒤 퉁명스럽게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박봉팔님. 이범영 과장이라고 합니다.”
“어디서 거셨는데요?”
“대한민국 외교부입니다.”
뭐야, 보이스피싱이었네.
창의력점수는 후하게 줘야겠다.
평범한 보이스피싱이라면 경찰이나 검찰을 사칭하겠지만, 이 양반은 무려 외교부 직원을 자처하는 중이었다. 그런 컨셉으로 어떻게 내 예금을 털어먹겠다는 건지 의문이었다.
“예, 수고하시고요. 저는 바빠서 이만...”
“혹시 환생자가 아니십니까?”
“예?”
“저희 외교부는 박봉팔님이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환생한 분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하마터면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는 내 가장 내밀한 비밀을 다이렉트로 찌르고 들어왔다.
그러나 나는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그가 환생을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전화가 누군가의 짓궂은 장난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예, 말씀 잘 들었고요. 다음 소설은 언제 나옵니까?”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저희도 아직 이런 일에 익숙지 않아서.”
“무슨 일 말입니까?”
“실례지만 다시 한 번 확인하겠습니다. 에신에서 넘어오신 분이 맞습니까?”
에신은 전생의 세계를 가리키는 단어였다. 전생까지는 어찌 넘어간다고 쳐도, 에신이란 이름을 안다는 건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였다. 그는 나를 알고 전화를 건 게 틀림없었다.
“.......글쎄요. 어쨌든 용무나 들어봅시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는 내 이름과 연락처, 말 못할 비밀까지 꿰고 있는 반면 나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내 불안을 이해한다는 듯이 조용히 설명을 이어갔다.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은 대외비에 해당됩니다. 박봉팔님께서는 아직 비밀취득인가가 없으시지만, 곧 발부받게 되실 테니 편하게 들으셔도 됩니다. 정부는 조만간 에신 제국과 공식적인 외교채널을 수립할 계획입니다. 외교채널이 만들어진 후에는 문화적, 경제적인 교류를 이어나갈 생각이고요.”
터무니없는 구상이었다. 에신 제국이란 나라는 지구상에 존재치 않았다. 그 나라는 소위 판타지세계라 일컬어지는, 마법과 주술이 판치는 이차원의 국가였다.
“저희 쪽에 박봉팔씨 같은 환생자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중에는 마법에 통달한 분도 계시지요. 저도 정확히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두 지점의 좌표를 알기만 한다면 공간을 잇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군요.”
나는 마법에 관해서는 쥐뿔도 모른다. 마법은 어디까지나 특권계층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분명 전생에 포탈이 유용하게 쓰이긴 했었다.
“그래서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저희 외교부는 박봉팔씨를 특정직 공무원으로써 정식으로 채용하고자 합니다. 저희는 에신 제국의 문화와 언어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는 분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아무래도 외교부라는 소리가 진짜인 모양이었다. 포탈이나 환생자 이야기, 누군가에게는 말이 안 되겠으나 내겐 논리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말이 되고도 남았다.
그나저나 공무원이라고.
나는 전생의 기술을 어떻게 하면 현생에서도 활용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연봉을 높이고 삶을 윤택하게 만들까, 여러 날 고민했었다.
그러나 사람 죽이는 재주만 가지고는 고를 수 있는 진로의 폭이 좁았다. 격투기선수나 군인처럼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하거나, 아니면 아예 범죄의 길로 나가거나.
결국 얌전히 살자고 결심했던 게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공무원이라니.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다니.
그는 내가 망설이는 동안 인내심있게 수화기를 붙들고 기다려주었다. 그는 통장번호를 부르라고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신뢰를 얻어내는 중이었다.
“특정직 공무원이라고요?”
“예.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저희는 박봉팔님이 저희가 찾는 인재상이라 확신합니다.”
“그러면 9급부터 시작하나요?”
“급수는 에신에서 어떤 지위를 가지고 계셨는지에 따라 조정됩니다. 다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만, 대체로 귀족이나 마법사는 5급을 받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박봉팔님께서는...”
“평민이었습니다.”
그가 실망할 것 같아 나는 재빨리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암살자였죠.”
“.......”
이번에는 그가 침묵할 차례였다. 나는 젓가락을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컵라면은 이미 식어서 불어터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