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재편 (2)
다음으로 고천수가 향한 곳은, 바로 기차역이었다.
-여길 이렇게 오네.
-기분이 묘하겠는데.
-지금은 사람들 많다.
시청자의 말대로 지금 기차역은 이용객들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사일런트 걸이 무섭게 계단을 뛰어올라오던 풍경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후."
고천수는 한숨을 한 번 쉬고는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기차역 내부도 전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사일런트 걸을 따돌리기 위해 물건을 얻으려고 들어갔던 패스트푸드점을 지나, 조용진이 죽어 가며 시계를 가리켰던 곳까지 향했다.
천천히 플랫폼으로 내려가자니 기차가 한 대 들어서고 있었다.
고천수는 기관차가 서는 곳으로 가서 서 있었다.
끼이이이이.
천천히 멈춰 선 디젤 기관차.
그리고 기관차의 열린 창문을 통해, 고천수는 어떤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
눈이 마주치자마자 기관차 안에 있던 여자는 바로 밖으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놀란 얼굴로 고천수를 바라보았다.
"또 뵙네요, 장서연 씨."
장서연은 고천수에게 다가서며 중얼거렸다.
"고천수."
그를 본 뒤에야 그녀는 기억이 선명해진 듯 숨을 떨었다.
"진짜, 너야?"
"네, 진짜죠."
"난 내가 꿈이라도 꾼 줄 알았어."
하지만 꿈이라기엔 너무 지독했을 것이다.
"깨어나니까, 내가 뭘 해야 하는지도……."
"그런 것치고는 잘하고 계신데요."
고천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젠 제대로 기관사 일을 하실 수 있겠어요."
"너……."
"잠깐 보러 온 겁니다."
세상이 박살나기 전, 자신과 함께했던 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를 고천수는 확인해 보고 싶었다.
"이 한 장면만으로 족해요."
"잠깐, 설마 그냥 이러고 가려고?"
놀라며 묻는 장서연을 보며 고천수는 미소를 지었다.
"설마요."
갖은 고난을 함께 겪으면서 마지막으로 나누는 대화가 겨우 이것뿐이라면 처참하지 않겠는가.
다만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공간에서, 굳이 따로 비밀스러운 얘기를 할 필요는 없는 법이니까.
"시간과 장소는 정해 두었습니다."
고천수는 허영웅에게 했던 것처럼 장서연에게도 똑같이 말해 주었다.
"우리 그때, 다시 뵙도록 하죠."
***
이후에도 고천수는 여러 장소를 돌아다녔다.
지금까지 자신이 지나쳐 왔던 곳들이었다. 다행히도 종말 세계에서 다시 돌아온 사람들은 일상에 잘 적응해 주었다.
인상 깊었던 건, 제멋대로였던 이들도 설정을 벗겨내 원래 자리로 돌려놓으니 꽤 착실한 인간들이었다는 점이었다. 명서 초등학교의 경찰들이 그러했다.
조용진은 군 생활을 잘 이어가고 있고, 진 소령은 여전히 멋진 사나이였다. 휴는 그냥 이상한 놈이었고, 송하나는 역시 승객들을 잘 챙기는 선박 승무원이었다.
하나하나 다 되짚기는 어려운 이었지만 그래도 모두가 어떻게 지내는지는 궁금했다. 만나고서 유독 미안했던 이가 있다면 바로 초반부의 중국집 배달원이었다.
"역시 좀 부족하네."
여행을 시작하며 명서 초등학교 근처의 중국집에 들어가 마파두부를 시켜먹은 고천수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더랬다.
마침 중국집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배달원 정민규를 보며, 고천수는 사장과 주방장에게 정민규를 한 번 주방에서 써 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다들 기억이 지워져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대전에 도착해서는 진 소령을 만나러 가기 전에 당연히 김하령이 있는 대학교에 들렀던 터다.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김하령은 제법 잘 지내고 있었다. 동기들, 다른 선후배들과도 잘 어울려 다니는 것을 보니 괜히 마음이 뿌듯해지기도 했다.
물론 성격이 완전히 설정만은 아니었는지 아주 친한 사람은 없는 듯 보이기도 했다. 혼자 있을 때도 꽤 자주 있어서 보이자마자 손을 흔들어 주었더니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마 기억이 선명해지는 순간이었으리라.
그녀는 곧장 달려와 고천수에게 안겼다.
김하령을 얘기하자면 제나도 빼놓을 수는 없었다.
마지막까지 충성 가도를 달린 제나는 실제로 제주도에 살고 있었다. 공항에서 만난 휴가 껌딱지처럼 따라붙는 바람에 결국 같이 가서 보게 되었는데, 제나는 휴는 쳐다도 보지 않고 고천수에게 달려와 손을 붙잡았다.
아마 그게 그녀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반가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제 예의는 필요 없으므로 고천수는 제나에게 포옹을 해 주었다. 제나의 얼굴이 그렇게 빨개질 수 있다는 것도, 그때 알 수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그 녀석도 봐야겠지?"
제나를 보고 되돌아오는 길에는 결국 우명 상사라는 곳에도 들렀다.
다시 마주치면 어떤 생각이 들까 궁금했지만, 생각보다 별 건 없었다.
방찬혁은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에게는 기억을 남겨 주지 않은 것이 잘한 것처럼 느껴졌다.
언젠가 또 기회가 된다면 찾아오기로 하고, 고천수는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고천수는 투어를 모두 끝마쳤다. 이젠 좋은 집에 살게 된 흑구를 포함해 중간 중간 다른 인연들도 어떻게 지내나 살펴보고 왔지만, 모두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어느새, 고천수는 그저 다시 천체의 신전으로 돌아와 앉아 있었다.
"어땠어, 고천수."
온리원은 여전히 상석에 앉은 채로 물었다.
"네가 바꿔 놓은 세상을 보는 기분이."
그 기분은 사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방구석 폐인으로 살아가던 이가 세상을 바꿔 놓는다니, 어리숙한 놈들에게 뭔가 팔아먹으려고 만든 듯한 캐치프레이즈처럼 들리지 않는가.
그럼에도 빼지 않고 대답한다면,
"정말 좋았습니다."
고천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형님 덕분에 진귀한 경험을 다 하네요."
방구석에서 걸어 나와 스스로 세상을 둘러보고 싶어졌다. 자신이 해냈던 일들, 그리고 만났던 이들을 돌아보고 싶어서.
"이거 뭐, 방구석 폐인 구원 프로그램 그런 건 아니겠죠?"
"대답이 필요한가?"
"농담입니다."
그런 이유로 세상을 뒤집어 놓지는 않다는 걸, 고천수도 잘 알고 있었다.
"형님."
고천수는 나지막이 물었다.
"저는 게임을 완료했습니까?"
아직 그 문구를 보지 못했다.
어쩌면 이게 정답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온리원은 미소를 지어 주었다.
"어."
그의 말투는 여태껏 보던 것 중 가장 따뜻했다.
"이 말은, 문구가 아닌 내 입으로 해 주고 싶었다."
천체의 신전에 다시 들어왔다는 것부터가, 사실은 이미 모든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정답이다, 고천수."
화신을 해치우고 난 뒤, 천체의 신전에 들어와 지구의 모든 것을 재편할 기회를 얻은 고천수는 생각했다.
정답이 무엇일까.
누군가 이미 탑을 정복하고 지구를 재편한 적이 있다면, 어째서 종말이 다시 찾아왔는가.
세상을 원래대로 돌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원래대로 만들면, 종말 시계를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세상을 어떻게 재편해서 꾸미든지 간에, ‘종말’이 예정돼 있다면 그걸 바꿔야만 했다.
그리고 예정된 종말을 아예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바로 ‘권한’이 필요했다.
"축하해."
온리원은 지금 이 자리에서 선언했다.
"지구의 관리자가 된 걸."
마치 시험과도 같았다.
종말은 절차.
고천수는 그저 게임을 플레이한 것이 아니었다.
"솔직히, 거의 포기 상태였어."
온리원은 헛웃음과 같은 한숨을 흘렸다.
"1차로 수명이 다 된 별은, 계속해서 종말을 반복해. 우리는 그 종말의 형태에만 관여할 수 있을 뿐이지. 그것도 수십 가지로 정해진 형태로만."
그게 바로 게임의 형식일 뿐.
"2차 수명을 줄 수 있는 천체의 규칙은 하나뿐이었어. 우리는 플레이어가 될 수 없었고, 금제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너한테도 꽤 가혹했을지 몰라."
온리원은 세계를 살리고 싶어 했다. 고천수 또한 이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답을 골라 줘서 고맙다, 고천수."
고천수는 지구의 세계를 재편하며 자신의 위치와 권한을 재편했다.
다시는 종말이 오지 않게 만들 수 있는 소망은, 다름 아닌 그가 해당 세계의 최종 결정자가 되는 것 그 자체였다.
"저도 감사합니다, 형님."
무슨 일이 일어났든, 이유야 어찌 됐든 상관없었다.
"솔직히 저도 잘될지는 몰랐거든요."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몰라도 항상 최선의 선택을 고른다.
그게 플레이어이자 방송 BJ로서 고천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고천수의 말에 온리원은 답이 없었다.
무언이었지만 굳이 대답이 필요 없어서라는 것도 고천수는 잘 알고 있었다.
"형님, 제 부탁은 잊지 않으셨죠?"
천체의 신전을 나가기 전, 고천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그곳에는 다른 로브를 입은 자들이 가득 차 있었다.
울부짖는정신병자, 새로운주인, 니목에혓바닥……, 그리고 이외의 수십 명. 굳이 누군지 설명하지 않아도 같은 자격의 존재로서 그들이 누군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반가운 모습들이었지만, 단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걱정 마."
온리원은 어느새 멀쩡하게 돌아온 곰 인형, 온리베어를 끌어 잡아 손을 흔들게 하며 말했다.
"너야말로 잊지 말고 다시 오라고."
아직 많은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
로브들, 그리고 뒤에 나타난 천 개가 넘는 빛무리들.
시청자였던 이들과는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다음에.
고천수는 한 번 미소를 지으며, 드디어 걸음을 옮겼다.
***
"후우."
돌아온 곳은 다름 아닌 그가 지내던 원룸이었다.
"역시 방구석 찐따한텐 여기가 편해. 그치?"
더 이상 그를 지켜보는 이들은 없었다. 아직도 켜져 있는 모니터로 보이는 시청자 수 0명의 ‘고천수의 게임 방송’을 돌아보며 고천수는 웃음을 흘렸다.
이제부터는 뭐가 어떻게 될까.
사실 이렇게 살아 본 적은 처음이라 고천수도 자신의 미래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띠링!
그때 갑자기 들린 소리.
고천수는 방송의 시청자 수가 올라간 것을 확인했다.
띠링! 띠링띠링!
시청자 수는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고천수는 그런 시청자들의 닉네임을 확인하고 창문으로 향했다.
그렇게 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열어젖혔을 때였다.
"와."
고천수는 그 밖으로 목격한 광경을 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이런 느낌이었구나."
거기에는 수많은 사람이, 고천수의 방송이 켜진 폰을 들어 올리며 서 있었다.
지금까지 여정에 동행했던, 이곳의 주소와 약속된 행동을 떠올리게 해 두었던 이들의 모습을 보며 고천수는 창틀을 꽉 쥐었다.
"이제야, 뭔가 해낸 기분이 들어."
타이밍 좋게 고천수의 폰에서는 벨이 울렸다. 거기에는 부모님이 사는 집 전화번호가 떠올라 있었다.
고천수는 폰을 들어 올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자신은 과연 모든 것이 완벽한 세상을 만들었을까.
하지만, 사실은 완벽하지 않아도 다시 존재하게끔 하는 게 더 나을 때도 있는 법이었다.
마지막으로 고천수는 방 안에 남아 있는 문을 돌아보았다.
그곳은 그가 천체의 신전에서 나올 때 사용했던 문이었다.
달칵.
약속된 시간에 열린 문.
그곳에서 나온 건, 어깨까지 와 닿는 검은 머리카락에 동그랗고 깊은 느낌의 눈동자를 가진 또래 외양의 여자였다.
"상상이랑 조금 다르시네요."
자기를 몰라볼까 봐 가슴팍에 ‘한도초과’란 명찰까지 붙인 채 쭈뼛거리는 그녀를 보며, 고천수는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얼굴에 그렸다.
아무래도 이번 게임은 엔딩 이후가 더 즐거울지도 모르겠다.
<내게 종말은 게임이다 -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