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재편 (1)
수업 중인 어느 고등학교의 교실.
하늘에서 떨어진 마른 햇살이 쨍하게 안쪽을 비추는 가운데, 맨 뒷자리의 한 남학생이 천천히 눈을 떴다.
"자, 24페이지 3번 문제를 보면……."
교단에 서 있는 선생님을 보던 남학생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갔다. 주위에는 수많은 학생이 앉아 있었다.
죄다 나른한 표정을 하고서는.
"양민철 씨."
갑자기 들린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남학생, 양민철은 화들짝 놀라 옆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익숙한 얼굴의 친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꿈은 잘 꿨습니까?"
속삭이듯 묻는 그의 말에 양민철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는 그런 양민철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완전 꿀잠 자던데? 어제 뭐 재밌는 거라도 했어?"
"……."
양민철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친구는 이 자리에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친구는 분명 자신을 돕다가 죽어 버렸으니까.
"음?"
친구는 멍한 표정을 짓는 양민철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덜 깼남?"
그랬다.
양민철은 아직 잠이 덜 깬 게 아닐까 했다.
아니면 뭔가 환상에 사로잡힌 것일 수도 있었다.
양민철은 주위를 훽훽 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장소는 여기가 아니었다.
여기가 아니고…….
‘어디, 였더라.’
양민철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방금까지 머릿속에 떠올랐던 장소가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이 뭐 때문에 당황했는지도 바로 까먹어 버렸다.
"저기요?"
친구가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댔다.
양민철은 숨을 내뱉으며 그 손을 붙잡아 내렸다.
"너……."
그렇게 친구를 보며 말하려던 양민철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 친구는 정말 자신을 위해 죽었던가.
그럴 만한 성격의 친구이기는 했지만, 이젠 그런 적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정말 꿈을 꿨던 걸지도.
그렇다면 이렇게 기억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아니야."
양민철은 친구의 손을 놓아 주고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선생님은 수업을 지속하고 있었다. 열린 창문에서는 따뜻한 바람이 살랑거리며 들어왔다.
"아무것도 아닌가 봐."
의아해하는 친구의 시선을 받으며, 양민철은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 * *
띵동댕동.
일과 시간이 다 끝난 뒤, 양민철은 친구들과 함께 하굣길에 올랐다.
"오늘 뭔가 이상하지 않아?"
"맞아. 뭔가 멍한 것 같은데."
"그러게."
친구들은 양민철을 보며 한 마디씩 던졌다.
양민철은 그런 친구들에게 뭐라 기분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고작 수업 시간에 잠들었을 뿐인데, 뭔가 비어 버린 느낌이 계속해서 지속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어 양민철은 짜증이 날 정도였다.
"얘들아."
그러다 순간, 양민철은 가던 길을 멈추고 친구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희, 정말 살아 있는 거 맞아?"
그러자 같이 걸음을 멈추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던 친구들이 곧 헛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살아 있지."
"오늘 뭐 잘못 먹었나?"
"별 이상한 걸 다 묻네."
양민철은 고개를 팍 숙였다.
아무것도 기억은 나지 않지만, 자고 일어났을 때의 감정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양민철에게 다음과 같은 행동을 지시했다.
팍.
양민철은 친구들을 붙잡아 끌어안았다.
모두가 눈을 크게 뜨며 그런 양민철을 쳐다보았다.
"미안하다.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기억하지 못해 뭐라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고맙다."
고작 자고 일어나서 가졌다기엔 터무니없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상당히 부끄러웠지만, 양민철은 친구들을 붙잡은 손을 쉽게 놓아 줄 수 없었다.
마치, 이미 허무하게 한 번 놓쳐 버린 적이 있는 것처럼.
"……뭘 잘못 먹은 게 맞네."
"나, 참. 남자들끼리."
"하이고."
친구들은 당황해하면서도 양민철을 밀쳐내지는 못했다.
양민철은 그런 그들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일단은 그걸로 충분했다.
"아."
하지만 아니었다.
충분하지 않았다.
양민철은 뭔가 충분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잠깐."
그는 친구들에게서 손을 떼며 입을 열었다.
"먼저, 먼저 가 있어."
바보 같이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친구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야, 또?"
"이젠 예측하기도 힘드네."
"뭐 하려고."
당혹스러워하는 친구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양민철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먼저 가 있어. 따라오지는 말고. 알았지?"
양민철은 그렇게 혼자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친구들이 뭐라 외쳤지만 멈추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양민철은 꿈에서 친구들이 자신을 위해서 어떤 희생을 했었는지 떠올렸다.
기억이 점점 되살아났다.
그리고 기억이 되살아날수록, 양민철은 두 다리가 교차하는 속도를 더 빠르게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럴 리가.’
꿈에서 친구들이 죽고 난 뒤, 양민철이 만난 한 남자가 있었다.
첫 만남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남자는 무례했다. 친구들이 죽고 나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자신을 보며 비웃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동행하고 싶은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모든 게 바뀌었다.
‘형……!’
남자는 양민철이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다른 사람이었다. 무례하고 무모했지만, 사실 가장 인간다웠다.
남자는 양민철에게 살아 갈 수 있는 희망을 줬다. 그리고 모든 것이 멸망하는 세계의 끝으로 데려갔다.
"천수 형!"
고천수.
그 이름을 기억해낸 양민철이 달려간 곳은 다름 아닌 그와 처음 만났던 장소였다.
"혀엉!"
어째서 이곳에 바로 오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이곳에 올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꿈이 사실인지 아닌지, 아직은 모든 기억이 선명하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때론 선명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중요한 건 기억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인사를 하지 못했다.
이야기가 그렇게 끝날 줄은 알지 못했다.
잠들었다 일어난 채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양민철은 그에게 할 말이 있었다.
뚜벅.
그때였다.
누군가의 걸음 소리가 들렸다.
양민철은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민철이 요란한 건 어디 안 가네."
모든 게 갑자기였다.
세상은 돌연 멸망하기 시작했고, 친구들이 죽었으며,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는 그 악몽을 감내하기 힘들었다.
어쩌면 그대로 죽어 버렸을 수도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나타났다. 자신을 끝으로 데려다줄 인도자가.
양민철은 또 다시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를 보며 복잡한 감정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바로 이 남자였다.
고천수.
꿈처럼 어렴풋하던 기억이, 드디어 선명해지는 순간이었다.
* * *
기억이라는 건 참 간사했다.
형태를 확인하긴 어렵지만, 어떤 것보다 뚜렷한 형태를 가진 것처럼 사람을 이어 주기도 했다.
-[한도초과] : 결국 이런 선택을 내렸네.
고천수의 시야에는 다시 채팅창이 떠올라 있었다.
-[한도초과] : 너다운 선택이었어.
과거를 기억하게 됨으로써 양민철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 것인가.
그건 복잡한 문제였다.
하지만 고천수는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
"형!"
달려와 자신을 붙잡는 양민철을 보며 고천수는 미소를 그렸다.
-천수는 관종이니까.
-현실 관종이 될 수도 있는데 그걸 포기할 리는 없지.
-난 만족.
고천수를 붙잡은 양민철은 일이 어떻게 됐는지를 물었다.
마지막에 고천수는 일행들을 잠재우면서까지 무언가를 하려고 했다. 그리고 양민철이 두 눈을 떴을 땐, 세상이 이렇게 바뀌어 있던 것이었다.
"형이, 한 거죠?"
이런 일은 누구도 해낼 수 없었다.
하지만 양민철은 고천수라면, 해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같이 한 거지."
고천수는 나지막이 대답했다.
사실 고천수는 양민철이 생각하는 것만큼은 무적처럼 강인하지는 않았다. 흔들리고 고민하기를 반복했다.
끝까지 오는 동안 무릎이 접혀 주저앉을 뻔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결국 끝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을 지켜보던 이들의 믿음 덕분이었다.
시청자와 동료가 고천수가 이를 악물고 싸울 수 있게 해 주었다. 혼자라면 포기했을 수도 있음에도.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게임이 끝나고 세계를 재편할 권한을 얻은 고천수는 양민철의 기억에 재회할 수 있는 방법을 집어넣었다.
양민철이 기억을 되찾으며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그게 내가 하고 싶은 전부야."
고천수는 그러면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양민철과 같은 교복을 입은 이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네 친구들, 쫓아왔나 보네."
그 말에 양민철은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그의 친구들이었다. 갑자기 달려간 그가 걱정돼 쫓아온 것으로 보였다.
"가 봐."
"네?"
"순서가 있으니까."
당장 모든 회포를 풀 필요는 없었다. 고천수는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됐는지를 먼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다녀와."
고천수는 망설이는 양민철을 살짝 떠밀었다.
"다시 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사이, 양민철의 친구들이 도착했다.
친구들은 양민철과 고천수를 번갈아 보았다. 둘이 무슨 사이인지 알고 싶은, 의문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럼."
고천수는 양민철을 놔두고 걸음을 옮겼다.
양민철이 떠나가는 그를 길게 지켜보았다.
* * *
세계는 재편되었다.
고천수는 망가졌던 세계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다음은 누구야?
-궁금해.
-볼 사람이 많네.
복구된 사람들의 기억은 대부분 지워 버렸다. 남겨 두면 당연히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
물론 일부는 기억을 남겨 두었다.
따릉.
걷다 보니 주변으로 지나치는 자전거를 맞닥뜨릴 수 있었다.
전기 자전거였다.
타고 있는 이는 둥그런 안경을 쓰고 있는 순한 인상의 순경이었다.
"어……!"
그는 고천수를 슬쩍 돌아보고는 균형을 잃었다.
핸들이 꺾인 자전거는 길을 이탈해 달리다가 수풀 속에 처박혔다.
-ㅋㅋㅋㅋㅋ
-여전하네.
-얘도 천수 만나러 가고 있었나?
"글쎄요."
고천수는 미소를 그리며 걸음을 다시 옮겼다.
아직 모두를 급하게 만날 필요는 없었다. 다 같이 만날 장소는 이미 정해 두었으니까.
"고, 고천수 씨!"
순경, 허영웅은 확실히 고천수를 기억해냈다.
수풀 속을 기어 나오며 소리치는 허영웅을 돌아보고 고천수는 우뚝 멈춰 섰다.
"형님들, 그래도 잠깐 시간 좀 내고 갈까요?"
고천수는 허영웅에게 향했다. 허영웅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고천수를 멍하니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진짜로, 있었네요."
"그러게요."
고천수는 허영웅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도 허영웅 씨를 다시 보니까 감회가 새롭네요."
게임의 초반부에 만났던 인물을 다시 보니, 뭔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고천수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허영웅이 그 손을 붙잡기 위해 자신의 손을 뻗었다.
하지만 고천수의 손은 자전거를 붙잡았다.
놀란 표정을 짓는 허영웅을 놔두고 자전거를 세워 탑승한 고천수가 말했다.
"이렇게 된 김에, 이것 좀 잠깐 빌려도 되죠?"
"네?"
"모일 시간은 미리 정해 뒀어요."
고천수는 미소를 그리며 자전거를 움직였다.
"머릿속에 거기가 떠오르면, 만나러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