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종말의 끝 (2)
"……."
고천수는 말없이 로브를 돌아보았다.
로브는 어느새 그의 근처에 멈춰 서 있었다.
"만나서 반갑다, 고천수."
대화를 트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로브는 고천수를 향해 마침내 ‘만나서’ 반갑다라는 말을 꺼내 놓았다.
"드디어 여기까지 오게 됐네."
말투는 화신일 때와 같았지만, 분위기는 차분했다. 로브는 가만히 서 있는 고천수를 놔두고 테이블의 상석에 가 앉았다.
"피곤할 텐데 일단 거기에 앉는 건 어때."
로브의 제안에 고천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주변은 조용했다. 여태까지의 소란이 전부 거짓이었던 것처럼, 로브와 자신의 기척만 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고천수는 상석 근처의 자리에 앉았다.
바깥에 있었을 때와는 완전히 반전된 환경에 고천수가 딱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으려니, 로브가 다시 말을 꺼내 놓았다.
"놀랐어."
그리고 그건, 다름 아닌 고천수에 대한 격찬이었다.
"이렇게 빨리 도달한 사람은 없거든."
아무리 같은 환경에 놓여 있어도 그걸 활용하는 사람에 따라 결과는 천차만별이기 마련이었다.
로브는 바로 그 점을 강조했다.
"넌 특별해."
살면서 고천수는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아 본 경험이 별로 없었다. 이런 게임에 참가하지 않았다면, 과연 이런 소리를 들을 수나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형님."
다만 예전의 고천수였다면 바로 흥분해서 특급 리액션이라도 선보였을지 모를 일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온리원 형님, 맞습니까?"
고천수는 놀이를 끝내기 위해 이곳에 도착한 게 아니었다.
모든 것은 확실하고 명확해야만 했다.
그렇게 가장 기본적인 사실부터 확인받으려는 고천수를 보며 로브는 잠시 멈칫했다.
"……온리원."
그러면서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온리원이지."
로브, 온리원은 고천수의 바람대로 답을 내려 주었다.
"네가 만나고 싶어 했을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뵙고 싶었습니다."
온리원은 고천수가 인생의 낙을 잃고 방송을 해 왔을 때 곁에서 자리를 지켜 주던 시청자였다.
만나지 않고 싶었다면 거짓말이었다.
"다만 여기까지 왔는데도 뭔가 속이 시원하질 않네요, 형님."
온리원은 다른 사람들만 새롭게 조형한 게 아니라 고천수의 기억도 건드렸다. 자신이 어디까지 진짜이고 가짜인지를 모르니 고천수는 아직도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전 원래 고천수가 맞습니까?"
"맞아."
온리원은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려는 듯 말했다.
"넌 진짜 고천수야. 네 인생이 망가졌던 것도, 방송을 해 왔던 것도 진짜지."
"그럼 제 기억에서 틀어진 부분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효율성을 위한 거였지."
"효율성……."
"네가 게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거였지. 잡다한 기억이 너무 많으면 갈피를 잡기 어려울 수도 있으니까."
고천수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부모님도 같은 이유였습니까?"
"그럴 리가. 그건 그냥 내 실수야. 그냥 널 고아로 만들었어야 하는데, 그건 좀 심한 것 같아서 기억을 거기까지 손보지는 않았거든. 설마 네가 그렇게 빨리 사실을 깨닫게 될 줄은 몰랐어."
"그게 무슨……."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 고천수를 보며 온리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미안하게 됐어. 이 세계는 종말을 거듭하다 보니까 가지고 있는 정보가 많이 소실됐거든. 재구축할 때 누락되는 부분이 많았다는 소리지."
"제 부모님도 그랬다는 겁니까?"
"그래."
온리원은 나지막이 말했다.
"네 부모는 2차 종말 때 이미 죽었고, 다음 회차에서 정보가 제대로 복구되지 않았어."
어이가 없는 얘기였다.
화를 낼 만도 했지만, 고천수는 그저 굳은 표정을 지었다.
"역시 그랬군요."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형님은 역시 이 세계를 장난감 정도로 생각하신 거군요."
"장난감?"
"네."
그렇지 않다면 종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게 하면서 사람을 죽게 만들고 아예 소멸시킬 이유가 없었다.
과연 이 게임에 끝이 있기는 한 걸까.
"형님께서 약속했던 부분은 기억하고 계십니까?"
"약속이라면, 세계 재편 말인가?"
온리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고 있지."
"저는 지금 게임을 클리어했습니까?"
아직 게임을 끝냈다는 알림을 받지 못했다. 고천수가 묻자 온리원은 살짝 웃음을 흘렸다.
"네가 그렇게 느낀다면, 그런 거 아닐까?"
"그렇게 답변하실 생각입니까?"
정확한 대답이 아니었다.
고천수는 질문을 바꿨다.
"그럼 제가 세계를 재편할 기회는 얻었습니까?"
"얻었지."
온리원은 주위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네가 이곳에 들어온 것부터가 그 증거야. 고천수,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
"여긴 네가 봤던 시청자들이 모이는 장소야. 천체의 신전이라고 불리지."
어둠이 가득했던 공간에 별빛이 돌기 시작했다. 온리원은 그러한 별빛들로 손을 내뻗었다.
"우리는 여기서 각자 가진 별들에 대해 얘기하고는 하지. 고천수, 지금 넌 이곳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이곳에 온 거야."
온리원이 별빛 하나를 찍자 갑자기 홀로그램처럼 지구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리고 지구는 곧 자신이 품고 있는 곳곳의 모습을 확대해 보여 주기 시작했다.
쿠구궁.
종말.
지구 안 여러 나라는 이미 지반이 다 무너져 바다 속에 삼켜진 상태였다. 남아 있는 땅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 탑이 남아 있는 땅만 아직 모양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 혹시 오해는 하지 마. 네가 빨리 온 건 진짜야. 다만 플레이어가 탑에 오르면 종말이 오는 속도가 빨라져서 일이 이렇게 된 것뿐이라는 거지."
"그럼 만약에 제가 이곳에 도착하지 못했다면……."
"솔직히 이후에 살기는 쉽지 않았겠지."
그 말에, 고천수는 천천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형님."
이제 온리원이 어떤 짓을 해 왔는지는 대략 감이 잡혔다.
고천수는 이제 확인이 필요했다.
"형님이 이 세계를 장난감으로 생각하신 것 같다고 얘기하긴 했지만, 이젠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형님께서는 종말을 거듭하다 보니까 가지고 있는 정보가 많이 소실됐다고 하셨죠."
그렇다고 아예 재구축을 포기하진 않았다.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천수의 부모 정보를 남겨 놓은 것이 그랬다.
"저를 효율적으로 움직이게 하려고 했다면서, 동시에 그렇지 못할 부분을 남겨 놓기도 했습니다. 재미로 그랬다기엔, 지금 반응을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네요."
"뭐, 그럴지도."
"지구가 수명을 다할 때까지 이러시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에 화신을 죽여야 하는 절차마저도 온리원은 생략했다. 온전한 게임이라기엔 시스템이 명확한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이 혼재되어 있었다.
사실 온리원이 이 게임을 주재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시청자였던 부분부터가 그러했다.
"형님에게도, 규율이 있는 것이죠?"
모든 것은 시스템이 존재한다. 한도초과를 보았을 때, 시청자들이 신과 같은 존재라고 해도 저 혼자만 멋대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들 또한 후원 금액을 모으는 것에서부터 자기들만의 규율을 적용받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게임 자체도 어떤 규율의 실행 절차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면 형님께서도 이럴 필요까지는 없었겠죠."
"항상 넌 예측 범위 밖으로 생각하네, 고천수."
온리원은 의자에 몸을 늘어뜨렸다.
"내가 재미로만 그러지 않았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확신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어차피 세상이 종말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떻게 할지는 결정을 내려 뒀기 때문에.
"고천수, 이제 대화는 여기까지야."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아니면 더 이상의 대화는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온리원은 반가움을 표하는 건 여기까지라는 듯 말했다.
"좀 더 둘만의 시간을 만끽하고 싶지만, 여길 보지 못하는 다른 시청자들이 결과를 궁금해 할 테니까."
"그렇군요."
그렇다면 고천수도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온리원이 손가락을 튕기자 다시 축소된 지구가 고천수의 앞에 나타났다.
"기회를 실행해."
온리원이 말하자 지구는 고천수의 손에 폭 담겼다.
고천수는 지구의 모든 것이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어때, 마치 신이라도 된 기분이지?"
온리원은 우스갯소리처럼 말했다.
"부디 네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기를 바랄게."
고천수는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직 모르는 것들이 있었지만 여러 위기를 겪고 살아나 이곳까지 도달했고, 약속됐던 보상도 얻어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맨 처음에 생각했던 세계 재편의 방식이 생각났다. 원래대로라면 간단하게 세계를 종말 이전으로 되돌려 달라고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형님."
마지막이었다.
고천수는 온리원을 향해 말했다.
"마치 신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냐고 하셨죠?"
고천수의 손에 담긴 지구가 빛나기 시작했다.
"역시 형님은, 절 선택한 게 맞았네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기분 탓이었을까, 로브 모자의 음영 밖으로 보이는 입술로 온리원이 살짝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였다.
[게임을 완료했습니다.]
문구가 떠올랐다.
고천수는 지구와 함께 빛에 휩싸이는 자신을 내려다보다가 온리원을 다시 바라보았다.
둘은 대화 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게임명, 마이 엑시트.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 * *
김포공항.
위이이잉.
제주도로 떠나는 비행기가 이제 막 이륙하는 가운데, 하늘은 청명하고 맑기만 했다.
활주로 위를 점령했던 탑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사람들은 여행을 가기 위해 공항을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종말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몬스터들이 뛰어다녔던 서울도 다시 활기를 찾는 도시로 돌아왔다.
기차는 더 이상 끊기지 않은 레일 위를 달렸다.
인터넷에는 다시 시시콜콜한 얘기들이 올라왔다.
종말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서울에도, 제주도에도, 대전에도, 그리고 일이 시작됐던 곳에서도 그랬다.
[고천수의 공포게임 방송.]
의자가 넘어져 있는 한 원룸 안에는 컴퓨터 한 대가 켜져 있었다.
그리고 컴퓨터의 모니터에는 방송 채널명.
시청자가 하나도 없는 그 방송에는 웃기게도 BJ의 플레이마저 존재하지 않았다.
원룸 안은 조용했다.
원래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우우웅!
그 와중에 울리는 진동 소리.
우우우웅!
그 소리를 듣고 방구석에 누워 있던 남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
그의 시선이 옆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02로 시작하는 광고 전화가 폰 스크린에 떠올라 있었다.
뚝.
그는 받지 않기 버튼으로 손을 움직인 다음에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후줄그레한 방의 풍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아."
모니터에 떠 있는 익숙한 채널명을 눈에 담고서, ‘고천수’는 그제야 헛웃음을 내뱉었다.
"나, 꿈이라도 꿨나?"
그는 머리를 매만지며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났다.
그리고 냉장고로 가 시원한 냉수를 꺼내 마셨다.
꿀꺽꿀꺽.
온몸이 차가워지면서 막혀 있던 숨이 탁 터져 나갔다.
그러자 고천수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다시 명확하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좋아."
고천수는 옷장 문을 열어젖히며 말했다.
"이제 결말을 확인할 시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