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종말의 끝 (1)
1 대 다수.
싸움은 치열했다.
크아아아아!
마치 자신들의 세계를 잃은 것에 대한 복수를 하듯, 몬스터들은 화신에게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화신은 파도처럼 밀려드는 몬스터들에게 그대로 떠밀렸다. 이리저리 팔을 휘적이긴 했지만, 상황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상층까지 거의 다 무너져내렸다.
조각 난 잔해들이 수없이 떨어져 내렸다. 돌덩이에 깔린 몬스터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화신은 운 좋게 잔해들을 피하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콰과가가각!
최상층에서 추락한 드릴 젤리는 어느새 5층 빌딩만 한 크기가 되어 화신의 근처에 착륙하여 또다시 지면을 파기 시작했다.
속도는 최상층에서보다 빨랐다.
여전히 젤리의 생김새를 갖고 있었지만,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접촉하고 있는 땅을 산산이 부수어 갔던 것이다.
붕.
결국 오래잖아 근처의 지면까지 무너지면서 화신은 그대로 허공에 떠올랐다. 순식간이었다. 화신이 다른 몬스터들과 함께 바로 아래층으로 추락한 것은.
크아아아!
서로의 몸을 완충제로 삼아 추락에서 살아남은 몬스터들은 계속해서 화신을 노렸다. 이미 걸린 도발은 웬만해선 풀어지지 않았다. 화신은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끊임없이 상대했다.
그러다 보면 추락에서 살아남은 다른 몬스터들까지 도발하게 돼 전투가 끝나질 않았다. 수라장이었다. 화신은 자신이 만든 지옥에 갇혀 버린 것처럼 온몸으로 발악했다.
콰드드득!
드릴 젤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지면은 더욱 빠르게 무너졌다.
근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화신은 또 떨어져내렸다.
숲속.
저 멀리 산장이 보이는 층이었다.
고천수가 데려왔던 군인들이 자그맣게 보이는 와중에 지면이 숲째로 무너져내렸다.
쾅! 콰앙! 콰아앙!
층을 거듭할수록 추락이 빨라졌다. 더 이상 몬스터들과의 전투는 없었다. 땅은 물렀고 드릴 젤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계속해서 수행했다.
휘이이잉!
화신은 바람을 느꼈다. 창문 밖으로 메이플라이가 보이는 층을 지났다.
그리고 다시 이어진 추락.
어느새 화신은 7층에 도달해 있었다.
우연이었을까, 어딘가에 서 있던 지영배와 눈이 마주쳤다.
놀란 지영배를 보며 몸을 일으키던 화신의 옆에 더욱 커진 드릴 젤리가 충돌했다.
이젠 잠깐의 멈춤도 없었다.
화신은 드릴 젤리와 함께 그대로 최하층까지 직행했다.
『……당했네.』
콰앙!
1층.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자가,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진 순간이었다.
***
-야, 고천수.
-이 자식 산 거 맞아?
-얀마!
살짝 뜬 실눈으로 보이는 채팅.
고천수는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님들, 저 살아 있는 거 맞습니까……?"
-살아있지, 새꺄. ㅋㅋㅋ
-와, 진짜 또라이네.
-어케 이걸 탈 생각을 했냐.
고천수는 드릴 젤리 위에 타 있었다.
"이거, 타는 거 아닙니까……?"
드릴 젤리는 대형화하고 나서도 계속 젤리의 모양을 유지했다.
고천수는 거기에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거 타고 사는 거 아니었냐고요."
-아닠ㅋㅋㅋㅋ
-타고 살 수 있는 거 맞긴 한데…….
-원래는 최상층에서 화신만 떨어뜨릴 수 있긴 했음. 최상층 다 무너지진 않거든.
"예?"
고천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진즉에 말씀해 주셨어야죠."
-ㅋㅋㅋㅋㅋ
-최상층 다 무너질 거였으면 애초에 화신이 네 동료들은 왜 숨겨 줬겠냐.
-살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해 뒀지.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걸 뭘 어쩌겠는가.
고천수는 자기들끼리 신난 시청자들을 놔두고 고개를 돌렸다.
‘화신은……?’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로서 항상 마음에 두어야 하는 말이었다.
고천수의 시선에 신음과도 같은 괴성을 흘리는 몬스터들이 보였다.
위에서 떨어지면서 자기들끼리 엉켜서 몸이 터져 있는 모양새였다.
"윽."
미간을 한 번 찌푸리며 고천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직 화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만약 살아있다면 다시 대응을 해야만 했다.
『고천수.』
그때, 소리가 들렸다.
고천수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으악!"
화신은 바로 자신의 뒤에 있었다. 고천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화신에게서 물러섰다.
"언제 여기에……!"
『걱정 마라. 내 꼴이 안 보이나?』
고천수는 그제야 화신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화신은 온몸이 다 찢겨 있었다. 팔과 다리는 하나씩 없어진 상태였다. 얼굴도 반쯤은 터진 상태였다.
뒤를 노리고 다가왔다기엔 이미 전력을 잃은 것으로 보였다.
『그래.』
멍한 표정을 짓는 고천수를 보며 화신이 말했다.
『내가 패했다, 고천수.』
실감나지 않는 발언.
화신은 남은 팔로 자신의 몸을 일으켰다.
『설마 이런 방식으로 끝을 낼 줄은 몰랐다. 원래라면 최상층에 남은 조각들 위에서 싸움을 했어야 했겠지.』
"……."
『넌 항상 나를 놀라게 할 정도로 기상천외한 면이 있다.』
고천수는 거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화신은 오해를 하고 있었다. 고천수는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 기상천외하거나 대단하지 않았다.
그저 눈에 보이는 방식대로 싸우며 게임을 플레이할 뿐이었다.
그게 최선이었다.
『끝을 내라, 고천수.』
화신은 자신을 가리켰다.
『아직 이 몸의 생명줄이 끊기지 않았다. 네가 끝을 내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럼 온리베어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전혀 예상치도 못한 질문이라는 듯 화신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 와중에 온리베어의 생사를 신경 쓰는 건가?』
"뭐가 됐든 저와 생사고락을 함께 한 녀석입니다. 형님에게는 그냥 도구였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군.』
화신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적은 없었는데.』
-고작 온리베어 때문에 일을 그르치려는 거야?
-얼른 끝내.
-이러다가 화신이 다시 회복하면 어쩌려고 그래?
시청자들의 질타가 이어졌다.
고천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맞는 말이지만.’
혼자만 살아남아 게임을 클리어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게 엊그제 같건만, 고천수도 자신이 어떻게 이렇게 변한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아니, 알 것 같기도 했다.
늘 방구석에서 혼자만 살아가던 고천수에게, 여기까지 함께 온 이들은 정말 오랜만에 관계를 맺은 동료와도 같은 것이었다.
유치하다고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고천수는 이걸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방구석 게이머는 원래 별거 아닌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법이었다. 누군가 게임에 심어 넣은 이스터에그 하나에도 사람의 손길을 느끼고 반가워하며 살아가던 고천수였으니, 게임의 마지막까지 함께 한 이들에 대해서는 남다른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안 되면 말고요."
물론 그렇다고 해도 안 된다고 하면 과감한 선택도 필요했다.
마른침을 삼키는 고천수를 화신은 빤히 쳐다보았다.
『역시.』
화신은 나지막이 말했다.
『널 고른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던 것 같군.』
스륵.
화신이 순간 자리에 쓰러졌다.
갑자기 죽은 듯 움직이지 않는 화신을 보며 고천수는 눈을 크게 떴다.
"……형님?"
답이 없었다.
고천수는 화신 곁으로 가 몸을 흔들어 보았다. 축 늘어진 것을 보고 있자니 불길한 감정이 샘솟았다.
스륵.
하지만 그 기분을 배신하듯, 화신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고천수를 다시 바라보았다.
"뭐, 뭡니까."
화신은 고천수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자신의 팔과 다리를 내려다보며 놀란 듯 고개를 움직여댈 뿐이었다.
-야, 이거 온리원 아닌 것 같은데?
-설마 온리원 채팅창으로 돌아온 것?
-뭔 소리야. 온리원 이제 채팅창으로 안 돌아와.
시청자들의 말에 고천수는 그제야 깨달았다.
"온리베어!"
화신이 아니었다.
온리베어였다.
고천수는 기어가 온리베어를 끌어안았다.
"자식! 돌아왔구나!"
온리베어는 어안이 벙벙한 기색으로 고천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뒤늦게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겠다는 듯 고천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나도 반가워."
툭툭.
온리베어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천수의 뺨을 잡고 돌렸다.
고천수는 온리베어의 손길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1층에 문이 하나 나타나 있었다.
황금색으로 되어 있는 문이었다.
"설마……."
기대하고 기대하던 것이지만 막상 보니 정말 실감이 나지 않았다.
고천수는 숨을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형님들, 저 이 게임 깬 겁니까?"
솔직히 깰 수 있을 거라 장담하지 못했다.
목숨은 하나에 변수가 너무 많은 게임이었다. 가다가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플레이한 게임이건만, 이런 결말을 맞이할 수 있을 줄은 알지 못했다.
-그러게.
-축하해, 고천수.
-난 네가 해낼 줄 알았어.
채팅창에는 고천수를 축하하는 문구들이 가득 찼다.
고천수는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머리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해냈다는 감정이 드는 것과 동시에, 플레이어로서의 직감이 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해냈어.’
고천수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문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죽지 않고, 기어코 여기까지 왔다, 고천수.’
방구석 게이머에 불과했던 자신이 여기까지 온 것은 그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었다.
이젠 문을 통과해 자신이 약속받았던 것을 얻어내기만 하면 끝나는 것이었다.
‘……정말로, 내가 해낸 걸까?’
고천수는 문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무도 고천수가 문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시청자들은 아직도 그저 축하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분위기는 좋았다. 정말로.
덜컥.
하지만 고천수는 문을 잡기만 하고서는,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
-뭐 해, 고천수.
-이제 와서 망설이는 거야?
-괜히 이렇게 서 있다가 아직 살아 있는 몬스터한테 잡힐 수도 있어.
고천수는 뒤를 돌아보았다.
온리베어가 서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전부 다 무너지지는 않은 층들이 보였다.
위에는 고천수가 남겨둔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을 것이었다.
"여기 들어가면, 다들 다시 못 만나게 된다거나 그러진 않겠죠?"
고천수의 물음에 시청자들은 기가 찬다는 반응을 보였다.
-야, 우리가 알던 고천수 맞냐.
-왜 이렇게 감성적이 된 거여. ㅋㅋㅋ
-그냥 좀 들어가자.
꿀꺽.
그래, 더 이상 일을 뒤로 미룰 수는 없었다.
고천수는 마침내 문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동안 문과 같은 황금빛이 그의 몸을 감쌌다.
지금까지의 노곤함이 다 풀릴 정도로 따뜻한 느낌이었다.
고천수는 그 따뜻한 빛을 뚫고 들어가 어느 한 공간과 마주했다.
그곳은 커다란 테이블이 놓인 어느 접객실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낯선 공간에 고천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근처에 켜져 있는 촛불들이 어두운 공간을 살짝 밝히고 있었다.
"형님들?"
채팅창은 사라져 있었다.
시야에는 문구가 하나 떠올랐다.
[채팅 기능을 종료합니다.]
모든 게 완전히 끝났다.
고천수가 다시 한번 숨을 삼키는 사이,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천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가려진,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가지고 있는 이가 로브를 걸친 채로 걸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