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 플레이어의 의지 (3)
크아아아.
곳곳에서 괴성이 울려 퍼지는 괴성.
-고천수?
-너 앞에 보여?
-야!
고천수는 채팅창으로 보이는 시야에 의지한 채 입을 다물고 계속해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뭐 하는 거야!
-위험하다고!
-너, 설마……!
위험은 이미 감수했다.
어디까지 안으로 들어왔을까. 고천수는 급하게 걸음을 멈추고, 그제야 크게 입을 벌리고 소리쳤다.
"이쪽! 이쪽이다아아아아아!"
고천수가 서 있는 곳은 여러 갈래의 길 한가운데 있는 커다란 공간이었다. 증폭된 외침은 사방에 있는 여러 길로 퍼져 나갔다.
"다 나와서 붙자아아아!"
자살행위였다.
이런 곳에서 좀비들에게 둘러싸였다간, 결코 부상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고천수!
시청자들의 말도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았다. 주위로 수많은 좀비가 몰려드는 기척이 느껴졌다.
어두운 동굴 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청각이었다.
좀비도 시각을 잃으면 청각에 의지해 이동하기 마련이었다. 고천수는 그 점을 이용해 가능한 많은 좀비에게 자신을 인식시킬 방법을 찾았다.
시각이든 청각이든 자극받은 좀비가 자신을 먹잇감으로 여기게 된다면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었다.
"……됐다."
고천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뒤돌아 입구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고천수를 인식한 수많은 좀비가 허우적대며 달려들었다.
퍽! 파악!
고천수는 그런 좀비들을 밀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크아아아아!
그럴수록 좀비들도 더욱 빠르게 달려들었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태로 달려서인지 좀비는 서로 엉키고 엉키며 넘어지고 괴성을 질러댔다.
"크윽!"
자칫하다간 고천수도 어디 한군데 붙잡혀 그대로 넘어질 위기였다.
채팅창을 통해 겨우 확보한 시야로 좀비들을 계속 밀치며 나아가는 와중에, 빛이 들어오는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다 왔……."
촤악!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고천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하며 오른팔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달려든 좀비가 오른팔의 살갗을 조금 떼어 간 상태였다.
마치 불에 닿은 듯한 통증이 느껴져 고천수는 신음을 토해내며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야, 시바!
-당했냐?!
아직이었다.
고천수는 오른팔을 쥐어 잡고 겨우 동굴 바깥으로 나왔다.
퍼억!
그리고 그 순간,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화신의 주먹질을 받았다.
『역시.』
하지만 화신의 주먹은 고천수를 그대로 날려 버리지 못했다.
[어그로 1024 - 07:24]
"형님이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고천수는 화신의 주먹을 붙잡은 채 이를 으득거렸다.
"필요한 건 다 주어졌다고."
여기서 고천수가 활용할 수 있는 균열과 좀비밖에 없었다.
그중에서 좀비는 고천수가 가장 직접적으로 강해질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자원이나 다를 바 없었다.
완벽하게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화신의 말대로 좀비들이 아래층의 설정을 이어서 멸망 세계의 잔해를 통해 넘어오고 있다면 숫자가 적지는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사실 동굴 안에 갇혀 있는 좀비들을 전부 풀어 놓는 게 더 확실한 정답일 수도 있긴 했다.
하지만 위기에 몰린 지금, 그것까지 하는 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대신 고천수는 소리를 이용했다. 좀비들이 동굴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이정표는 소리밖에 없었다. 소리가 안쪽까지 전해진다는 의미였다. 고천수는 가능한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 그 소리의 흐름에 자신을 안착시켰다.
"좀비들이 안쪽 어디에 갇혀 있든, 저를 먹잇감으로 생각해 주기만 하면 그만이죠."
노려지기만 하면 됐다. 좀비들을 다 풀어 주지 않고도 지금의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던 것이다.
『대단해.』
화신은 감탄하면서도 혀를 찼다.
『하지만 네 꼴을 봐라. 그 힘을 얻으려고 하다가 무엇을 잃었는지.』
고천수는 오른팔을 내주었다. 감염이 온몸으로 퍼지는 게 느껴졌다.
"알고 있습니다."
그 감염의 속도를 빠르게 만들기 위해 고천수는 화신을 세게 밀어붙였다. 심장이 크게 펌핑하며 피를 빠르게 순환시켰다.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거."
고천수는 화신을 그대로 균열 쪽으로 밀어붙였다.
"이젠 제 의지를 확인하실 시간입니다."
콰가각!
화신이 밀려났다. 그러자 화신은 고천수에게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후웅!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고천수는 주먹을 피했다. 그리고 화신에게 도리어 발차기를 먹였다.
파앙, 하는 소리와 함께 주춤거린 화신을 고천수가 다시 달려들어 밀치기 시작했다.
『허튼 수고다.』
"……."
고천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먹으로 화신의 명치를 맞췄다.
놀란 화신이 고천수에게 자신의 주먹을 내밀었다.
한 대 얻어맞고 비틀거린 고천수가 화신에게 곧장 카운터펀치를 먹였다.
팡! 파앙! 파아!
서로의 주먹이 오갔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정신없이 상대방을 공격했다.
콰가가가가.
그 와중에 땅은 계속 무너져갔다. 균열이 어느새 화신의 뒤꿈치까지 쫓아와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고천수는 바로 뛰어들어 화신을 안았다.
화신은 바로 뒤로 비틀거리며 무너진 지면 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
고천수는 바로 발을 바닥에 지지하면서 화신을 잡은 손에 더 크게 힘을 줬다.
-아니, 잠깐!
-이러면……!
고천수의 몸도 화신을 따라 기울었다.
"같이! 가는 겁니다!"
추락.
고천수는 화신과 함께 떨어져 내렸다.
***
게임은 어떻게 클리어해야 할까.
종류마다 다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플레이어는 최종 보스가 두려워하는 것을 과감히 함께 직면해야 한다는 것.
휘이이잉!
눈을 뜨자 거센 바람이 고천수의 온몸을 때렸다.
겨우 정신을 차린 고천수는 화신을 내려다보았다.
화신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고천수를 마주 보고 있었다.
고천수는 그 표정을 보고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맞았다……!’
화신은 균열을 피하려고 했다. 그건 당연하게도 추락하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다.
화신도 추락하게 되면 심각한 타격을 피할 수 없는 것이 분명했다.
-고천수. 이대로 떨어지면 죽어!
-살아남을 방법을 강구해!
-얼른!
그럴 필요는 없었다.
고천수는 이미 시야가 흐릿해진 상태였다.
추락하면서 흥분된 몸에서 피가 훨씬 빠르게 돌았다.
이판사판이었던 행동이 고천수의 죽음을 앞당겼던 것이다.
"형님."
눈의 실핏줄이 터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고천수는 씨익 미소를 그렸다.
"이게 제 의지입니다."
그리고 10초 뒤, 고천수는 화신과 멀지 않은 곳의 지면에 충돌해 그대로 터져 버렸다.
***
『……무모한 것도 정도가 있다.』
죽지 않은 화신이 지면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중얼거렸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는군.』
화신의 시선은 고천수가 터져 버렸던 곳을 향하고 있었다.
피가 사방으로 튀어 있는 가운데, 고천수의 형태는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형님."
하지만 고천수의 목소리는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내 얼굴 뼛조각이 그 목소리를 내는 입술 근처에서 달라붙고, 머리와 몸통이 차례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절 잘 아시지 않습니까."
리커버리.
좀비가 되어 사망 판정을 받은 고천수는, 감염이 일어나기 직전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항상 상상을 초월하는 거."
방구석에서 살아가는 놈이었지만, 항상 상상력만큼은 지나칠 만큼 뛰어났다. 비틀거리며 온몸을 회복한 고천수는 화끈거리는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리커버리로는 감염을 일으킨 부상 자체는 회복할 수 없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고천수는 화신을 바라보았다.
화신은 추락으로 인한 타격으로 온몸이 찢겨 나가 있었다.
그렇다고 형태가 사라진 건 아니었기에, 화신은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망했네요."
고천수는 그런 화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 남은 어그로도 없는데."
좀비가 되면 플레이로서 자격을 상실하는지 어그로가 그대로 꺼져 버렸다. 그 때문에 일반 좀비의 몸이 되어 지면과 충돌할 때 그대로 터져 버린 것이었다.
-넌 진짜 또라이다.
-일 꼬이면 어쩌려고 그랬냐?
-아냐, 그래도 화신은 추락시켰잖아…….
추락하면 힘을 많이 잃기라도 하는 걸까.
화신은 엄청난 어그로로 강화된 고천수를 버텨냈던 것치고는, 부상의 정도가 매우 컸다.
『훌륭하다, 고천수.』
그럼에도 화신은 고천수에 대한 격찬을 먼저 꺼내들었다.
『이렇게까지 무모하게 굴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다시 시청자가 되신 것처럼 얘기하시네요."
고천수는 화신을 노려보았다.
"죄송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셔도 이대로 끝내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
화신도 알고 있다는 듯 주먹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의지만으로는 날 이길 수 없다. 그건 너도 알고 있을 텐데.』
고천수는 위를 바라보았다.
최상층은 지금도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위에서 드릴 젤리가 내려오기라도 한다면, 지금 이 층 또한 무너뜨려서 또 한 번 화신을 추락시켜 줄지도 몰랐다.
하지만 고천수는 고개를 저었다.
화신이 그런 일을 두 번 당해 줄 리는 없었다.
고천수는 화신을 한 번 추락시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을 해냈다는 것을 알았다.
"형님."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게임을 끝내려는 것도 아니었다.
"제게 필요한 건 다 주어졌다고 하셨죠."
최상층에서 화신을 끌어내리는 데 필요한 건 고천수 자신의 능력뿐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도 다시 자신의 능력만으로 화신을 상대해야 할까.
"덕분에 좋은 힌트를 얻었습니다."
어려웠다. 화신은 고천수보다 강했다.
바보 같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그렇지도 않았다.
화신에게는 이 게임의 설계한 이의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역시 혼자 상대할 수는 없었다.
크르르르르.
주변에서 여러 괴성이 몰려들었다.
고천수는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다양한 세계의 잔재들.
고천수가 최상층을 올라갈 때 방해만 되었던 온갖 몬스터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사방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건…….
-고천수, 너.
-이래서 빨리 떨어진 거냐.
가능한 최상층에서 버텼다면,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드릴 젤리와 함께 떨어지는 게 정답이었을 수도 있었다. 화신을 계속 밑의 층으로 데려가며 약화시켜야 했을지도.
모든 게 다 가능성이었다.
그리고 고천수는 그런 가능성 중에, 가장 극적인 것을 골랐다.
"돌려드리겠습니다."
이곳에 있는 몬스터들은 각자 자신의 세계를 잃고 불려 온 것들이었다.
끔찍한 존재들이긴 했지만, 원래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을 만든 건 어디까지나 온리원이었다.
지금은 화신으로만 존재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누가 먼저 끝나나 해 보시죠."
몬스터들은 고천수와 화신, 둘 다를 노렸다.
수많은 몬스터가 둘을 에워쌌다. 고천수는 이번엔 몬스터들을 도발하지 않았다.
최대한 오래 살아남으려면 몬스터들의 이목이 화신에게 쏠리게끔 해야 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몬스터들은 대부분 화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몸이 다 찢겨 나갈 때까지, 네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마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질 기분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쪽에는 쓸 수 있는 패가 더 있었으니까.
남은 수명 - 00:00
주위의 수명을 확인하고 있던 고천수는 지금 막 무너져 사라지는 건물의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화신이 그를 쫓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몬스터들은 사라진 그 대신 화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과연.』
화신이 감탄처럼 내뱉는 순간, 그의 주위로 수백의 몬스터가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