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플레이어의 의지 (2)
쿠구구구.
분위기가 착 가라앉은 가운데, 호수 주변의 균열이 심해졌다.
이로써 드릴 젤리가 무엇을 일으키는지는 확실해졌다.
‘붕괴.’
드릴은 물을 먹고 지반을 박살내는 것이 분명했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고천수는 화신이 붕괴되는 지반에서는 피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형님."
고천수는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말했다.
"자신 있으면 들어와 보시죠."
명백한 도발.
화신은 그런 고천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설마 그 정도에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예."
하지만 균열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화신이 피하려고 한다고 해도 어차피 고천수를 잡으려면 균열 쪽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계속 계시면 결국에는 제 뜻대로 될 겁니다."
『…….』
화신은 손을 얼굴에 올렸다.
난감해하는 것일까.
불행히도 그런 건 아니었다.
『재밌네.』
화신은 오히려 웃고 있었다.
『거기에 서 있다가 떨어지면, 너는 어떻게 될 것 같은데?』
한 층만 떨어진다고 해도 높이는 수십 미터 이상이었다. 이대로 떨어지면 고천수는 몸이 산산이 박살날 것이 분명했다.
『난 네 근본 없는 쇼맨십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너무 무리하면 스스로 파멸을 불러올 수도 있는 거야.』
"파멸이라면 이미 했죠."
지구는 멸망해 가고 있었다. 이미 서울의 일부는 종말 세계의 잔해로 편입돼 있었다. 이 와중에 고천수 혼자만 살려고 아등바등해 봤자 소용은 없었다.
다만 일전에 이미 얘기했듯이 의문점은 있었다.
한 번 파멸했을 세계가 어떻게 다시 플레이어를 배출했냐 하는 것이었다.
"형님, 아직 자격이 안 된다고 했지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생각하기도 싫지만 이대로 가면 플레이어 쪽이 불리한 건 사실이었다.
고천수는 적어도 진실을 알아내고자 했다.
"이 세계로 뭘 하고 싶으신 겁니까?"
NPC가 된 세계의 모든 이들에게 기억의 조작이 있었다. 고천수 또한 일부 기억 외에는 가지고 있는 것이 없었다.
그것조차도 원래의 기억인지는 알 길이 없는 상태였다.
재미로 이런 일을 저지르고 있다면 오히려 이해가 갔다.
하지만 재미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상황은 달랐다.
"이 세계는 이 게임을 반복하면서 망해 가고 있는 겁니까?"
어쩌면 기억 조작만이 다가 아닐지도 몰랐다. 모든 것이 붕괴되는 게임이 반복되고 있는 거라면, 정보가 소실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건, 게임의 반복 여하를 떠나서 사실일 터였다.
계속해서 지구가 가진 자원과 생명력이 깎여 나가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형님?"
뭐라도 알고자 했지만 화신은 대답이 없었다.
아니, 한참 뒤에야 대답을 하긴 했다.
『역시 넌 달라, 고천수.』
그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근본 없이 행동하는 것 같지만, 본질을 관찰하는 능력이 뛰어나지. 방구석에만 있기는 아까워.』
"그래서 이렇게 괴롭혀 대는 겁니까?"
『한계까지 몰아치면, 어디까지 성장할까 궁금하긴 했지.』
그러면서도 화신은 매몰찬 말을 가감 없이 내뱉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살아남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어. 결과 없는 과정은 중요하지 않아. 적어도 나한테는.』
쿵쿵쿵.
화신은 고천수를 향해 다가왔다.
『고천수. 이미 너한테는 충분한 능력을 줬어. 그러니까 더 이상 말로 시간을 끌 생각은 하지 말기를 바라지.』
"쳇."
뭐라도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고 궁리를 하고 있던 것은 맞았다. 고천수는 다가오는 화신을 보며 짧게 혀를 찼다.
-그래도 여유는 있나 보네. ㅋㅋ
-보통 여기까지 올라오면 겁에 질리던데.
-아니, 근데 천수 너무 빨리 와서 오히려 불리한 거 실화냐?
"형님들, 그런 소리 마세요."
괜히 파밍할 거 다 못 모으고 온 느낌이 커서 안 그래도 기분이 찝찝하던 차였다. 뭐가 됐든지 간에 일을 이렇게 만든 건 자신인 만큼,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로 승부를 봐야 했다.
"것보다 아직 후원 시스템은 작동합니까? 효력을 좀 얻고 싶은데요."
다만 얻을 수 있는 게 더 있다면 얻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고천수가 묻자 시청자들은 고민하다가 답변을 내놓았다.
-줄 수는 있는데 한정적임.
-거의 끝 무렵이라 지금은 엄청 비싸. 화신을 직접 이길 효력은 절대 못 줘. 네가 제안 기능 쓰면 더 비싸짐.
-간단한 거라도 말해 주면 최대한 알아서 맞춰 봄. 우리 다 나서도 한 개밖에 안 될지도 모름.
한 개밖에 안 된다고 하니 고천수는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두 개는 필요한데.’
하지만 한 개라도 어디인가.
고천수는 화신을 피해 뒷걸음질 치면서 말했다.
"천리안 같은 거 가능합니까?"
-천리안?
그런 걸 어디에 쓰려느냐는 듯 시청자들이 의아해했다.
-화신은 코앞에 있는데 그런 걸 어디다가…….
-아.
-그거네.
시청자들도 고천수의 의도를 알아챈 듯했다.
-기다려.
시청자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고천수는 화신과 마주했다.
화신은 고천수를 잡으려고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안 되지.’
고천수는 균열 사이사이를 요리조리 움직였다. 이곳의 지면은 마치 살얼음판과 같았다. 무게가 더 나가는 상태인 화신이 밟으면 그대로 무너질 곳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하며 어떻게든 회피를 지속할 수 있었다.
『천수야.』
하지만 화신도 계획은 있었다.
『이런 건 어때.』
화신이 갑자기 소형화했다. 균열을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가벼운 몸이 된 것이었다.
"으아악!"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짓는 고천수였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접근을 허용하지는 않았다.
휙!
고천수는 근처의 지면 조각을 하나 주워 화신에게 던졌다.
팍.
조각을 맞은 화신이 주춤댔다.
"그 상태에서는 위력도 약화되는 거죠?"
그렇다면 고천수도 대응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제 돌팔매에 맞고 그대로 추락하실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세요."
『…….』
그러자 화신은 다시 거대화해 고천수를 쫓기 시작했다.
콰장창!
무게에 짓눌린 지면이 더욱 빠르게 붕괴했다. 화신은 그런 지면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고천수에게 달려왔다.
후웅!
잡힐 뻔했다.
손아귀를 겨우 벗어나며 풍압에 날아간 고천수가 근처에 사뿐하게 안착했다.
"이젠 그냥은 안 넘어집니다."
풍압에 적응한 고천수는 이번엔 균열과는 반대되는 쪽으로 뛰어갔다. 화신은 고천수의 생각을 읽지 못한 듯 잠시 주춤댔다.
"형님들, 빨리 좀 부탁드립니다."
어그로가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 스킬만이 현재 고천수가 화신에게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스킬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곧 죽어도 이 스킬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려면 시청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찾았다.
-구매할 수 있는 목록에서 그나마 우리가 사 줄 수 있는 거야.
-잠시만. 이게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지만.
찰나의 시간, 고천수가 화신이 쫓아오는지를 돌아보며 뒤를 힐끔거리고 있을 때 알림이 떠올랐다.
[띠링! 울부짖는정신병자 님 외 48명이 효력 보상 미션을 설정하였습니다.]
[미션 - 100m 달리기 11초로 주파.]
[보상 - 설정한 1개 목적지 확인.]
"……11초!"
-가격 낮추려고 한 거야.
-할 수 있잖아.
할 수 있었다. 강화된 신체기는 하니까, 11초 정도는.
"그래도 팔도 덜렁이고 있고만……!"
불만을 토로하며 고천수는 이를 악물었다.
눈앞에 임의로 형성된 하얀 선이 보였다. 미션을 위해서 형성된 것이 분명했다.
고천수는 고통을 무시하고 더욱 빠르게 뛰었다.
그리고 선을 밟자마자 전력으로 질주했다.
통과.
결승선으로 표시된 곳까지 밟자 성공 메시지가 뜨면서 효력이 부여됐다.
"후우!"
고개를 들어 올린 고천수의 눈에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빛줄기가 보였다.
아마 고천수가 계속 목적지로 떠올리고 있던 곳일 터였다.
‘하, 진짜.’
너무나 적나라하게 위치를 표시하고 있었기에, 뒤에 있는 화신에게도 목적을 노출해 버렸다.
‘할 수 없지……!’
어차피 들키지 않고 진행하기도 어려웠다. 고천수는 빛줄기가 가리키고 있는 곳을 향해 온 힘을 짜내 움직였다.
크아아아!
가까워지면 질수록 좀비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래, 그렇다면 정답이었다.
꾸드드득!
어느새 마주친 좀비의 숫자는 일백에 가까웠다. 신체 능력이 향상되자 회복력도 당연히 좋아졌다.
고천수는 덜렁거리고 있는 팔을 어느 정도는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파악!
하지만 이 정도로는 모자랐다.
고천수는 좀비 밭을 뚫고 들어가면서, 그들이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지를 드디어 확인했다.
화아아아.
빛줄기가 비추고 있는 곳은 웬 동굴이었다.
좀비들은 그 안에서 뛰쳐나오고 있었다.
"아, 제기랄."
좀비들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아내서 최대한 어그로를 많이 끌 생각이었다. 하지만 좀비들이 나오는 동굴은 안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컴컴했다.
바로 내부 구조를 확인하는 것이 어려울뿐더러, 한 번에 좀비들의 어그로를 끌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쿵.
어느새 화신이 다가와 있었다.
콰득!
화신은 고천수를 잡을 듯 다가오더니, 바로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좀비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러고는 한 마리씩 밟고 찢어버리기 시작했다.
‘내가 힘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고천수는 화신의 의도를 알아채고 서둘러 소리쳤다.
"야아아아아! 여기다아아아!"
계속해서 써먹은 고전적인 방법이었지만 좀비들은 소리치는 고천수에게도 상당수 몰려들었다.
쌓인 어그로 숫자, 2백.
고천수는 좀비들을 찢고 있는 화신에게 다가가 주먹을 날렸다.
파앙!
역시 낮은 수치는 아니었다. 주먹을 맞은 화신은 약간의 충격을 받은 것처럼 살짝 흔들리더니 고천수를 바라보았다.
"좀 아프긴 했습……."
물어보려던 고천수에게 화신이 좀비의 사체를 내던졌다. 마치 화신이 소형화했을 때 지면 조각을 던졌던 것에 대한 복수처럼.
고천수는 화신이 내던지는 사체들을 피해서 계속해서 물러났다.
‘이대로는 끝이 안 나!’
고천수가 할 수 있는 건 몸을 피하는 일뿐이었다. 균열도 어느새 이 근처까지 쫓아왔다. 아래층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도 결국에는 한계가 있었다.
최종적으로는 이 화신과 함께 추락하게 될 것이었다.
‘이대로 떨어지면…….’
바로 죽진 않더라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정도의 어그로로는 생존을 장담할 수 없었다.
설령 산다고 해도 이 화신에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을 터였다.
‘하.’
짧게 한숨을 내쉬고 고천수는 동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사실 고천수는 어그로 스킬이 전부는 아니었다.
다른 스킬도 가지고는 있었다. 다시 쓸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어쩌면 이때를 위해서 아껴 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꽈악.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시도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고천수는 어그로 스킬을 바라보았다. 화신이 동굴 밖으로 나온 좀비들을 찢어발기는 사이,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어그로 스킬 점멸.
스킬이 다시 꺼졌다가 켰다. 이제 어그로 수치는 다시 모아야만 했다. 하지만 화신이 방해하고 있어 제대로 된 수치를 모으기는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제는 결단이 필요했다.
"결정했다."
화신이 말하길, 이미 줄 것은 충분히 줬다고 했다.
고천수는 그 말에서 확신을 얻었다. 지금은 적이지만, 이 게임을 관장하는 온리원이 그런 말을 꾸며낼 필요는 없었다.
크아아아!
그렇게 고천수는 좀비들이 몰려나오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동굴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