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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종말은 게임이다-218화 (218/224)

218. 플레이어의 의지 (1)

불행히도 의지를 확인해 보겠다는 건 꽤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서였다.

쿵쿵쿵.

화신이 걸어가 고천수 일행들을 바위들 근처에 넣고 숨겨 주었다.

『네가 지킨 이들의 안전은 보장해 줄 테니 걱정 마라.』

그러더니 고천수에게는 지금 막 그러쥔 주먹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너는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쾅!

그렇게, 갑자기 달려든 화신이 고천수의 바로 앞 지면을 때렸다.

"큭?!"

엄청난 충격이었다.

직접 맞지 않았건만 풍압만으로 고천수는 멀찍이 비행한 뒤에 떨어져서 몇 미터는 구른 뒤에 멈춰 섰다.

"어, 억……."

그래도 계속 강화를 해 온 몸이었다.

그럼에도 이 정도 충격도 완화하기가 힘들다니, 기가 찰 정도였다.

-싸한데.

-화신 원래 이렇게 강했나?

-원래 그렇긴 했지. 우리가 너무 오랜만에 보는 것뿐.

훙.

고천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또 한 번의 풍압이 있었다. 이번에도 몸을 살짝 돌려 피하면서 직접 타격을 받진 않았지만, 고천수는 또 허공에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시발!"

지면에 두 다리가 닫지 않는 이상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고천수는 포물선을 그리고 또 다시 바닥과 충돌했다.

"컥!"

눈앞이 다 노랬다. 고통을 삭일 시간이 필요했지만 고천수는 힘을 짜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화신이 있는 쪽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가는 건가?』

그랬다. 일단은 싸울 방법을 알아내야 했다. 풍압조차 대응할 수 없는 존재와 맞바로 상대할 수는 없었다.

크아아아.

설상가상이라고 좀비는 이 와중에도 없어지지 않았다.

몰려드는 좀비를 도끼로 쳐서 박살내 버리며 고천수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뭐지, 이거?’

좀비는 왜 없어지지 않는 걸까. 보스가 나타날 때 으레 생기는 잡몹이라고 볼 수도 있긴 했지만, 다른 이유가 있을 가능성도 보였다.

콰득!

유니폼을 입고 있는 한 마리를 처리하면서 고천수는 페이크맨을 떠올렸다. 혹시 이 녀석들도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하기 지겹나?』

화신이 천천히 고천수에게 따라붙으며 말했다.

『그 녀석들은 다른 멸망한 세계에서 감염된 채로 이쪽으로 넘어왔다. 지구와는 다르게 완전히 박살난 곳들에서.』

역시나였다.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심어 주는 화신에게 다시 시선을 돌리며 고천수가 입을 열었다.

"그 세계들은 형님께서 시킨 게임을 클리어하지 못한 겁니까?"

『최종적으로는.』

"그 최종적이라는 게 뭡니까?"

지영배를 봤을 때, 지구는 마이 엑시트라는 게임을 반복하고 있었다. 즉, 누군가 클리어했지만 클리어되지 않은 모순이 생겼다거나, 클리어하지 못했는데도 게임이 다시 시작되는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는 뜻이었다.

"지구도 아직은 최종적으로 게임을 클리어한 적이 없다는 얘기입니까?"

『대화할 자격이 되지 않았는데, 질문이 많다고 생각하진 않나?』

고천수는 아직 화신을 물리치지 못했다. 엄밀히 말하면 온리원과 직접 대면한 상태는 아니었다.

『나와 대면하게 되는 것이, 순서상 먼저일 터.』

쿵쿵쿵.

화신이 빠르게 다가왔다. 고천수는 급하게 주위를 살펴보았다.

‘제기랄.’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고천수는 화신을 피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또 다시 도망인가?』

당연했다. 실수로 붙잡히기라도 하면 이 몸으로는 견딜 수 없었다.

다만 그냥 도망가는 것은 아니었다.

"야아아아아!"

이 층에는 좀비들이 있었다. 다른 힌트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화신과의 육박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분명했다.

"어디 있냐아아아아!"

최상층 바로 밑, 유성 층에는 다른 세계의 주민들이나 잔재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화신이 말하길, 여기서 나타나는 좀비들 또한 다른 세계의 주민이었던 것이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최상층 또한 유성 층이 있던 곳과 설정과 구성이 일부 겹친다고 할 수 있었다. 어딘가에 좀비들이 몰려나오는 통로나 지점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찾을 수만 있다면, 방찬혁처럼 그들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크아아아아!

고천수의 외침을 들었는지 곳곳에서 좀비들이 몰려나왔다.

[어그로 22 - 08:35]

하지만 처치하며 수치를 그러모아도 이 정도가 한계였다. 빨리 좀비가 어디서 나오는지를 찾아야만 뭐라도 할 수 있었다.

훙!

그 와중에 뒤를 쫓아온 화신이 또 한 번 주먹을 휘둘렀다. 고천수는 종이처럼 팔락이며 좀비들 사이에 나가떨어졌다.

크아아아아!

"꺼져!"

콱! 콰직!

그래도 어그로는 어그로였다. 강화된 몸이 다시 출력이 좋아지자 움직임이 훨씬 더 가벼워졌다.

좀비들을 처단하며 약간 자신감이 붙은 고천수는 다가오는 화신을 향해 먼저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번엔 내가 먼저 간다."

그렇게 도움닫기까지 하며 점프해 도끼를 휘둘렀을 때였다.

콰직!

화신이 도끼가 박히자마자 팔을 휘두르며 고천수를 튕겨냈다.

쿠드드드드!

날아가 지면에 미끄러지며 재차 신음을 흘리게 되었지만 고천수는 미소를 그렸다.

"한 대, 맞췄다……."

화신이 들어 보이는 팔에 확실히 표식이 생겼다.

-와. ㅋㅋㅋㅋ

-십도끼는 역시 어딜 가지 않네.

-최종 보스 때 쓰려고 그렇게 꼭 껴안고 가져온 거였나.

꼭 이때만을 위해 가지고 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십도끼는 강한 상대와 대적할 때는 가격 대비 효용성이 깡패인 무기였다.

"형님, 이제부터 시……."

그렇게 고천수가 여유를 부리려고 할 때였다.

순식간에 달려온 화신이 고천수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쾅!

피하긴 했지만 이번에도 풍압이 엄청났다. 살짝 비틀거리는 사이 화신이 연달아서 주먹을 내질렀다.

쾅! 콰앙!

도끼로 찍을 새도 없었다. 고천수는 휘청거리다가 주먹에 한 번 스치고 옆으로 날아갔다.

후웅!

화신은 그 시간조차 기다리지 않았다. 화신은 고천수가 떨어지기 전에 바로 점프해 추적했다. 그리고 고천수의 옷깃을 붙잡고는 바닥에 착지했다.

『이제부터 시작인가?』

"……!"

쫘악!

화신이 그대로 자신을 바닥에 찍으려고 하자, 고천수는 도끼로 옷깃을 찢고 탈출했다.

쿠아아앙!

화신이 지면을 찍으며 일으키는 흙먼지를 피해서 몸을 일으킨 고천수가 탄식했다.

"장난, 아니네."

이 정도면 그냥 기회를 줄 것도 없이 지구를 멸망시키고 싶은 게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화신 혼자 원펀치 놀이하는데?

-천수 표정 봐. ㅋㅋ

-밸런스 똥망이네. 어? 열받네?

열은 받았다. 적어도 상대할 수는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아.’

잠깐 잊고 있던 것이 있었다.

‘아이템.’

드릴 모양의 젤리는 아직 품 안에 남아 있었다.

분명 물에 넣는 것이 사용법이었을 터.

최상층에 올라왔을 때부터 기묘하게 생각했던 것이지만, 이 층에는 계곡이나 호수가 존재하고 있었다.

잠시나마 낙원에 도달했다는 느낌을 주려고 만들 것일 수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었다.

"형님들, 시야 좀 부탁드립니다."

-뭔 시야?

고천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호수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화신이 그를 뒤따라왔다.

-뒤 봐 달라고. ㅋㅋㅋㅋ

-우리가 네 백미러냐?

-야, 왼쪽!

콰앙!

듣자마자 오른쪽으로 피해서 기사회생.

고천수는 이를 악물고 다리에 더 힘을 줬다.

‘뭔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아이템을 쓴다면 상황을 좀 더 보고 쓰고 싶었다. 하지만 더 이상 뜸을 들일 시간은 없었다. 힌트가 부족한 이 상황에서는 아이템의 효과를 기대하는 수밖에.

슥.

드디어 품에서 젤리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화신이 지척까지 다시 따라왔을 때, 고천수는 팔을 접었다 펴며 젤리를 던졌다.

"가라! 고천수 드릴!"

해괴한 이름이 부여된 젤리는 그대로 호수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첨벙!

화신이 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역시 뭔가 있는 듯했다.

"안 되지……!"

고천수는 바로 높이 점프해 화신의 등 뒤에 올라탔다.

"여태까지 방플해서 제가 어떤 아이템 쥐고 있는지까지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 이렇게까지 하시기입니까?"

최종 보스가 게임을 직접 이 세계에 적용한 시청자라니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적당히, 좀 적당히 하세요, 형님!"

온리원에게는 그저 재미있는 게임일지 모르지만, 고천수에게는 세계의 명운이 걸려 있는 일이었다.

플레이어로서 하면 안 되는 읍소를 하더라도, 지켜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콰직!

고천수는 화신을 도끼로 찍어냈다.

숫자 2가 새겨졌다.

콱! 콰직! 콰악!

연달아서 도끼로 내리찍으며 숫자를 갱신하자 화신이 고천수를 떨어뜨리려고 몸을 흔들어댔다.

"안, 되죠!"

콱! 콱! 콱! 콱!

숫자는 9. 고천수는 도끼를 꽉 쥐고 화신의 목을 향해 크게 휘둘렀다.

촤악!

베었다.

화신이 들어 올린 팔뚝을.

"큭!"

화신이 몸을 흔들며 팔을 들어 올린 탓에 그것조차 제대로 베어내지 못했다. 정확히는 스쳤다.

화신은 다른 손을 뻗어 고천수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냅다 앞을 향해 던져 버렸다.

쿵!

충돌.

나무에 몸을 부딪친 고천수가 신음도 내지 못하고 널브러졌다.

그사이에 화신은 호수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호수에서는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었다. 마치 안에 들어간 드릴 젤리가 무언가를 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야, 고천수!

-일어나!

-정신 차려, 새꺄!

채팅창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고천수는 더듬듯이 자신과 충돌한 나무줄기를 만지며 비틀비틀 상체를 일으켰다.

"온리원, 이 시발……."

시청자를 욕하는 것은 타당한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금기였다.

하지만 온리원은 이제 시청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타당한 이유까지 존재했다.

"나 존나 끈질기다고……."

가끔 리액션을 하다가 어이없이 죽은 적도 많지만, 고천수는 게임을 시작하면 클리어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너도 알지, 온리원?"

고천수는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금 화신에게 달려들었다.

물속에서 무언가를 찾던 화신은 지치지도 않고 달려든 고천수 때문에 몸을 뒤흔들며 허우적거렸다.

고천수는 방아를 찧듯이 도끼로 계속 화신을 찍어댔다.

화신이 그런 고천수를 다시 붙잡으려고 할 때였다.

콰드득.

호수 근처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마치 이 최상층에 올라올 때, 입구가 무너졌던 현상과 비슷했다.

첨벙첨벙!

화신은 심상찮은 기운을 감지한 것처럼 이젠 물 밖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고천수는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여기서, 어딜 갑니까, 형님!"

계속된 도끼질.

결국에 또 다시 숫자를 완성한 고천수가 화신의 어깨를 찍었다.

콰악!

폭발적인 절삭력.

힘을 느낀 고천수는 그대로 도끼를 밀고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멈칫.

하지만 이게 어찌된 일일까.

여태까지 숫자만 채우면 그 무엇도 베어내던 도끼는, 화신의 거친 피부 정도밖에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뭐?"

후우웅!

멍한 표정을 그리는 사이, 고천수는 또 다시 붙잡혀 멀찍이 내던져졌다.

콰직!

"끄아아아악!"

불행히도 어그로가 꺼지는 시점에 몸을 박으면서 왼팔이 뒤틀려 버렸다.

"크, 끄으으으윽!"

부러진 건지 어떻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고천수는 도끼를 놓친 채 식은땀을 흘리며 바닥을 기었다.

쿵, 쿵, 쿵.

심장 소리에 맞춰 화신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럴 때마다 내가 느끼는 게 있지.』

화신이 나지막이 말했다.

『방구석에 처박혀 사는 채로는 도저히 지을 수 없는, 절박한 표정도 있다는 걸.』

고천수는 몸을 일으키며 화신을 노려보며 답했다.

"그럼 잘 봐 두세요."

지금부터 그 절박함으로 얼마나 골 때리는 짓까지 할 수 있는지 보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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